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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그리고 ‘나쁜 새로운 것’에 관하여

내 삶에 권태가 찾아올 때마다 꺼내보는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by 조하나



조하나의 아일랜드 ▶️팟캐스트로 듣기








삶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고통도, 희열도 아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이다.



에세이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잡지사 기자가 되어 열정을 다해 일했습니다. 몇 년 후, 점차 사그라드는 열정에 저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내심 그 열정이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꽤 오래갈 줄 알았거든요. 마침 이직 제안이 들어와 환경을 바꾸면 다시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문득 이 새로운 열정도 오래가지 않으면 어쩌지, 갑자기 두려움과 무력감이 몰려오더군요.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은 언제나 상대로부터 입은 상처나 배신감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불확신과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한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사랑스럽던 사람이, 이제는 그 숨소리조차 싫어질 때 우리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무심한 조각가가 모든 뜨거웠던 것을 결국 닳아 없어지게 만든다는 진실 앞에서 항복하고 맙니다.


그때 만난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는 늘 제가 품어왔던 삶의 질문을 여성 감독의 시각으로 세밀하고 깊이 있게 다룬, 두고두고 제 삶과 동반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익숙한 삼각관계의 서사를 넘어, 주인공 마고의 내면에 존재하는 ‘틈(gap)’을 중심으로 현대인의 불안, 장기적 관계의 심리적 역학, 그리고 개인적 선택이 지닌 실존적 무게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성찰입니다. 사랑과 열정, 젊음, 시간에 대해 새로운 접근과 표현,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이 영화를 지금도 어디에선가 삶의 권태에 시달리는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원제는 <테이크 디스 왈츠(Take This Waltz)>입니다. 2012년 국내 개봉 당시 배급사가 국내 시장을 겨냥해 바꾼,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제목은 아쉽습니다. 애초에 메이저 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상업 영화가 아닌 인디 영화인 만큼, 레너드 코헨의 노래에서 따온 원제 ‘Take This Waltz’를 그대로 살렸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극본을 쓰고 감독한 사라 폴리는 캐나다 출신의 배우이기도 합니다. 사라 폴리 감독은 2006년 첫 장편 영화 <어웨이 프롬 허>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며 서로에 대한 충실함에 대해 고민하는 오랜 관계 속의 부부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뤄 호평받은 바 있죠.


관계의 출발과 지속, 그리고 끝에 대해 고민이 많은 사라 폴리 감독. 그녀의 두 번째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서는 이십대 후반의 보헤미안이자 작가 지망생 마고(미셸 윌리엄스)와 닭고기 요리책을 준비하는 남편 루(세스 로건)의 결혼 생활을 다룹니다.







관능으로 가득한 슬로우 댄스



영화의 배경은 캐나다 토론토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예술가와 힙스터들이 모여 사는 알록달록하고 개성 넘치는 ‘리틀 포르투갈’ 마을입니다. 여러 가지 색으로 페인트를 칠하고 스테인드글라스로 햇빛을 투과시키는 예술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고풍스럽고 아담한 집에서 마고는 5년째 남편 루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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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고 더운 여름, 잘 가시지 않는 후덥지근한 열기와 습기가 영화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이 햇살 가득하고 과포화된 색감의 시각적 열기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들끓는 욕망과 심리적 풍경을 시각화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합니다.


젊은 부부 마고와 루의 관계에 어느 날 갑자기 매력적인 이웃 다니엘(루크 커비)이 나타납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불륜’을 다루는 영화의 틀을 깨고, 직접 만지지 않고도 섬세하고 깊은 감정과 갈등을 묘사하며 관능으로 가득한 ‘슬로우 댄스’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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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는 무방비 상태로 다니엘의 매력에 이끌립니다. 하지만 자잘한 마찰과 오해, 서로에 대한 익숙함이 불러오는 권태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장난스럽고 애정 넘치는 루와의 결혼 생활도 망치고 싶지 않죠. 다니엘은 마고에게 자신을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그는 거리를 두고 맴돌며 마고의 양면성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면 언제든 이용 가능한 상대임을 알립니다. 이러한 양면성은 사라 폴리 감독의 솔직하고 확고하며 감정적으로 관대한 이 영화를 내내 지배합니다.


마고와 다니엘의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다니엘은 마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서로의 유대감은 더욱 깊어지지만, 마고는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남편 루는 닭고기 요리법 개발에 몰두하느라 둘 사이에 어떤 공간이 형성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죠. 마고와 다니엘, 두 사람의 감정은 현실적인 제약과 규범으로 인해 지극히 조심스럽고도 억압된 감정으로 조금씩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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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하지만 주체적인 여성, 마고


오늘날 영화계에서 가장 용감하고 영리한 여배우 중 한 명인 미셸 윌리엄스는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럽지만 결코 수동적이지 않은 젊은 여성 마고를 놀랍도록 눈부시게 연기합니다.


사라 폴리 감독과 미셸 윌리엄스가 이해하는 마고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그 자체로 일종의 열정입니다. 마고의 욕망은 자신이 잘 알고 익숙하며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원하는 낯선 사람을 향해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마고는 고집스럽고 예의 바르고 규율을 잘 지키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기적이기도 하고 수줍음이 많습니다. 이러한 마고의 복잡성은 감독의 탁월한 인물 설계에 기인합니다. 그녀는 자칫 ‘매닉 픽시 드림 걸(Manic Pixie Dream Girl)’이라는 상투적인 캐릭터 유형에 머물 뻔한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매닉 픽시 드림 걸’은 삶의 의미를 잃은 남자 주인공 앞에 요정처럼 나타나 영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지만, 정작 자신만의 내면이나 서사는 없는 남성적 판타지의 산물과도 같은 캐릭터를 말합니다.


마고는 겉보기에 기발한 특성들을 보이며 이러한 전형성에 맞닿아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영화가 뛰어난 점은 바로 그 상투성을 교묘히 전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마고의 행동은 관객에게 때로 분노를 유발할 만큼 모순적이며, 이는 그녀가 누군가의 성장을 위한 도구가 아닌,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결함 있는 진짜 인간임을 증명합니다. 그녀의 여정은 귀여운 외면과 신체, 안전한 유아성에 맞서 싸우는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조화시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통스러운 자아 탐색의 과정인 것이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독은 인간의 다면성과 이중성을 각 캐릭터의 특성과 모순을 통해 입체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하며, 관객이 마고와 루, 다니엘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도록 합니다.


미술 스케치 작업을 하며 토론토 도심 관광용 인력거를 끄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 다니엘은 불안하고 불안정하지만 매력적입니다. 그는 마고가 느끼는 공허함을 채워줄 완벽한 외부 해결책처럼 보입니다. 한편,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남편 루는 이제 더 이상 마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죠. 매일 함께 있으니까요. 그들의 관계는 어린애같이 다정하고, 엉뚱하며, 장난기 넘치는 상호작용과 둘만의 농담으로 정의되지만, 이는 점차 진실하고 성숙한 친밀감을 회피하는 강박적인 방어기제로 기능합니다. “너무 사랑해서 감자 으깨는 기계로 당신 머리를 으깨버릴 거야”와 같은 유치한 장난과 애정 표현은 더 깊은 차원의 교감을 차단하는 수단이 됩니다.


마고의 내면엔 여전히 불붙기만을 기다리는 불씨가 자리하고,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봐, 이렇게 나이 들어 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을 루는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마고와 루는 5년을 부부로 함께 살아오며 매일 같이 소소한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마고 내면의 꿈과 열정은 다니엘 앞에서 드러내게 됩니다. 마고와 루, 두 사람의 언어는 점차 서로의 진짜 감정을 나누는 다리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내면을 감추고 현상 유지를 위한 습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언어가 관계를 어떻게 공허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셰익스피어를 탐구한 알 파치노의 다큐멘터리 <리처드를 찾아서> 속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작품 속 거리의 한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런 느낌 없이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 그래서 우리는 총을 들고 서로를 쏘기 쉽고, 서로를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이죠. 마고와 루의 침묵하는 욕망과 반복되는 농담이야말로, 바로 그 서로를 느끼지 못하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길 두려워하며 여기저기 떠돌며 사는 불안정하지만 매력적인 화가 다니엘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쓰고 있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아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마고 사이에 불꽃이 일렁이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지만, 마고는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용기 있게 스스로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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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윌리엄스는 엉뚱하고 불안하며 늘 사랑과 관심을 원하는 마고의 존재감에 설득력을 높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조증에 걸린 꿈의 소녀’ 캐릭터가 될 뻔한 마고를 땅 위에 잘 안착시켰거든요. 그녀는 삶의 두려움과 놀라움, 어색함, 지루함, 통제, 후회, 피로 같은 순간을 적나라한 자연스러움으로 전달합니다. 사랑스럽고 연약한 날 것의 얼굴을 하고, 마고는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감정과 친밀감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자신이 더 성장하도록 도와줄 사람을 욕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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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노화와 몸에 대한 ‘여성적 시선’의 정수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을 마친 마고가 친구들과 함께 샤워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 즉 보이지 않는 인물인 ‘시간’이 처음으로 자신의 잔인하고도 공평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또한 이 샤워 장면은 여성의 신체를 착취적으로 다루지 않는 폴리 감독의 독특한 ‘여성적 시선(female gaze)’의 정수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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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카메라는 마고와 친구들의 젊고 탄력 있는 몸, 그리고 맞은편에서 샤워하는 나이 든 여성들의 몸을 나란히 비춥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착취적이거나 관음적이지 않습니다. 성적 대상화 대신, 어제의 몸과 내일의 몸을 하나의 무자비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며 ‘시간’이라는 절대자의 판결을 묵묵히 보여줄 뿐입니다.


나체의 여성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봐오던, 운동하고 씻고 옷을 입어야 하는 몸을 가졌습니다. 젊은 육체는 노화되고, 늙은 육체도 한때는 젊었습니다. 결국 이 무대 위의 모든 배우를 퇴장시키는 연출가는 바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출가의 각본에 체념하고 순응해야 할까요,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더욱 격렬하게 욕망하며 즉흥극을 시도해야 할까요?









이 모든 건 결국엔 끝나버릴 화려한 축제


영속하지 못하는 순간에 대한 뼈아픈 진실은 마고가 다니엘과 함께 ‘스크램블러’라는 놀이기구를 탈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변화와 진부함에 관한 상징적인 노래인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배경으로 돌아가는 놀이기구에서 마고는 색색의 조명이 바뀔 때마다 공포와 외로움, 기쁨, 욕망, 환희, 자유 등 다양한 감정의 음영을 드러냅니다. 이 노래의 선택은 주제적 공명을 일으키는 신의 한 수입니다. 노래 가사처럼, 새롭고 흥미로운 ‘비디오’인 다니엘이 편안하고 친숙한 ‘라디오 스타’인 루를 대체하는 상황을 완벽하게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기구 체험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파트너와 추는 현기증 나는 왈츠입니다. 이 순간의 황홀경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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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가 시간을 다해 멈춰서자, 음악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며 갑자기 공간은 차분한 회색 방으로 바뀝니다. 음악이 갑작스럽게 끝나는 방식은, 새로움에 기대어 시작된 이 도취 상태가 필연적으로 추락할 것임을 암시하는 냉혹한 복선이 됩니다. 황홀하고 화려하고 매혹적인 찰나는 언제나 공허함과 상실감으로 이어집니다.









영원히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또 다른 하나는 루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니엘에게 달려간 마고가 360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그동안 절제해 왔던 모든 것을 폭발시키고 자유와 희열을 즐기는 상황입니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서로 엉겨 붙어 사랑을 나누는 마고와 다니엘 뒤 텅 빈 배경에 점차 살림살이가 하나둘 늘어나고 결국 둘 다 무표정한 얼굴로 TV 앞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이 몽타주 장면은, 그녀의 탐구가 지닌 순환적 본질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며, ‘새로움도 결국 낡아진다’는 진리를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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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레너드 코헨의 ‘Take This Waltz’가 흐르죠. 이 노래를 관계의 가장 열정적인 순간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 아름다움과 함께 쇠퇴와 죽음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모든 관계가 ‘시간’이라는 엔트로피에 종속된다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소리로 예고합니다. 마고는 고통과 상처를 유발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 의심과 후회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마고는 어떤 파트너와 춤을 추든, 그녀를 리드하는 보이지 않는 손, 즉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매번 같은 장소에 도착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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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죽음 외에도 우리가 깨닫는 가장 큰 두려움, 즉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항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흐르는 시간은 운명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고통을 당하고, 또 고통을 유발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립니다. 마고는 상처를 구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상처가 얼마나 커다란 생명력을 주는지도 묘사합니다. 그녀는 새로운 것의 환희와 낡은 것의 고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마고의 선택은 ‘시간’의 지배에 대한 인간의 부질없는 ‘반란’ 같은 것입니다. 핵심은 남편 루가 결코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다정하고, 유머러스하며, 마고를 사랑하는 ‘좋은’ 사람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더 이상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마고가 느끼는 권태와 내면의 ‘틈’은 남편 루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이 문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 다니엘을 선택합니다.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루보다 ‘더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새롭기’ 때문입니다. 마고는 이 ‘새로움’이라는 가치가 ‘시간’의 법칙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죠.


하지만 ‘새로움’은 ‘시간’ 앞에서 가장 연약한 속성입니다. 그것은 임시적인 해결책이기에, 결국에는 ‘나쁜 새로운 것’이 될 운명입니다. 영화의 360도 회전 몽타주 장면이 증명하듯, 다니엘과의 불타는 사랑 역시 결국에는 지루한 일상으로 변해갑니다. 그녀는 ‘오래된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나쁜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씨름합니다. 새로운 것은 필연적으로 낡아질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의 황홀함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거는 마고의 선택을, ‘시간’의 절대적인 힘을 아는 우리가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요?









미성숙한 인간의 욕망과 성찰



<우리도 사랑일까>는 많은 질문을 던지며 관객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하지만, 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마고와 루, 다니엘의 초상을 통해 누구도 특별히 호감 가는 인물로 묘사하거나 누구의 편을 들거나, 또는 어떤 선택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거나 찬양하는 대신, 모호함과 해결되지 않은 긴장 상태에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묻습니다. 항상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서 관계에 서툴고 미성숙한 우리는 정말 삶에서 우리의 끝없는 선택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을까. 현실보다 마법의 힘을 좇은 마고는 결국,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무지했고,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며, 우리는 항상 혼자임을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어웨이 프롬 허>가 은유적으로 한 여자의 ‘겨울’을 배경으로 했다면, <우리도 사랑일까>는 그보다 이른 뜨거운 계절을 관통하는 젊은 여자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두 영화 모두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여름의 모든 색은 결국 겨울의 회색으로 녹아내린다는 걸 암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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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를 홀로 타는 마고의 마지막 모습은 실패의 초상이 아니라, 어렵게 쟁취한 자기 인식의 초상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틈’을 인간이라는 외부의 대상으로 채우려 했지만, 결국 그 틈은 자기 자신의 일부임을, 그리고 그 틈을 만드는 것은 ‘시간’의 흐름 자체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점에 이릅니다.


마고의 춤의 궁극적인 파트너는 루도, 다니엘도 아닌, 바로 ‘시간’ 그 자체입니다. 어쩌면 삶이란 올바른 사람을 찾아 그 틈을 것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 권태와 쇠락의 모든 스텝으로 우리를 이끄는 무심한 파트너 ‘시간’의 손을 잡고, 그 필연적인 리듬과 함께 살아갈 용기를 배우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틈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틈과 함께 왈츠를 추는 법을 배우라고 속삭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왈츠를 조용히 응원합니다.



<우리도 사랑일까, Leonard Cohen ‘Take This Waltz’>




2011년 작 <우리도 사랑일까>는 현재 넷플릭스, 왓차, 티빙, 웨이브, 쿠팡플레이, U+모바일tv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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