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랭크>가 개봉했던 2014년, 저는 음악과 영화를 주로 다루는 피쳐에디터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영광을 누리다 사양길에 접어든 종이 패션지에서 저는 고집스럽게, 끝까지 아무도 관심 없는 인디 뮤지션들을 만나고 인디 영화를 다뤘습니다. 기획 회의 때면 편집장님과 K팝 아이돌 인터뷰 하나 하는 대신 인디밴드 인터뷰 하나, 하는 식으로 협상을 하곤 했죠. 대형 상업 패션지 편집장님은 저를 ‘거리의 아이’라 불렀고, 저는 그게 싫지 않았습니다. 기자가 단 둘 뿐이었던 조그만 독립잡지 창간부터 시작한 이력 때문이기도 했고, 저는 뼛속까지 비주류에 ‘아웃사이더’였거든요.
저는 퇴근만 했다, 하면 강남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재빨리 한강을 가로질러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한숨을 돌렸습니다. 인디밴드 중에서도 덜 알려진 밴드는 ‘화요일 밴드’로 불리며 관객 하나 없는 텅 빈 공연장에서 밴드 멤버들끼리만 합주나 다름없는 공연을 하곤 했는데, 거기서 유일한 관객이었던 저는 그제야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안도감에 활기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국카스텐을 만났고, 검정치마를 만났고, 혁오를 만났습니다. K팝 아이돌이 모든 미디어를 잠식한 건 오래였고, 몇몇 인디 뮤지션은 외로움과 소외감,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기도 했습니다.
허구한 날 밴드 뮤지션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하는 대답 없는 속만 끓던 무렵, 이 영화 <프랭크>를 만났습니다. 인디 아티스트들의 내면적 결핍과 그로 인한 고통, 결핍이 위로하는 예술적 고독의 치유를 담은 영화 한 편이 저에게, 그리고 인디 뮤지션 친구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죠. 스스로 ‘사회 부적응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게 만드는 ‘다수’와 ‘대중’에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안아주고,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상해도 괜찮아. 우리 모두, 그저 사랑받고 싶은 작고 연약하고 소중한 존재야’라고 말하는 이 영화는 가장 경쾌하고, 기묘한 방법으로 이 세상 모든 아웃사이더들에 찬사와 공감을 보냅니다.
이 영화를 만난 이후, 저는 영화 GV를 진행할 때마다, 혹은 인디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참여할 때마다 <프랭크>를 추천했습니다. ‘영원한 아웃아이더, 인디 정신으로 살자’라는 제 삶의 모토와 함께 왼쪽 손목에 프랭크 가면을 타투로 새겨 넣었고, 영화를 만난 이후로 지금껏 쭉 제 인생의 안전어는 ‘친칠라’가 되었죠.
지금부터 제 인생의 특별한 영화 중 하나인 <프랭크>를 소개합니다. (스포일러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 최근 넷플릭스 영화 <킬러>로 사랑받았던, <엑스맨> 시리즈와 <셰임> <헝거> <스티브 잡스> 등 수많은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마이클 패스벤더가 영화 99% 내내 가면을 쓰고 나옵니다. <프랭크>에서 오직 목소리와 몸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회자되었죠. 한국에선 <어바웃 타임>의 남자 주인공으로 유명한 도널 글리슨과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이자 <다크 나이트>로 알려진 매기 질렌할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이렇게 쟁쟁한 배우들을 이 작은 독립 영화에 모은 장본인인 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은 <프랭크>를 개봉한 다음 해 선보인 <룸>으로 세상을 들썩이게 한 인물입니다.
영화 <프랭크> 예고편
영국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존(도널 글리슨)은 록스타를 꿈꾸지만 특출난 재능도 능력도, 예술적 영감도 없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영감으로 곡 작업을 하지만 결국 어디선가 들어본 노래로 귀결되고, 그래도 팔로워가 얼마 안 되는 (지금은 ‘X’로 바뀐) 트위터에 아티스트의 허세를 띄우는 건 잊지 않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발음조차 하기 힘든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의 공연 소식을 접하게 되고 그들의 키보디스트로 합류하게 되죠.
프랭크는 샤워할 때에도 벗지 않는 거대한 종이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살아가는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의 프런트맨입니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결핍을 예술적 재료로 사용해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는 프랭크는 존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죠.
밴드는 곡 작업과 앨범 녹음을 위해 아일랜드 깊은 숲속 산장으로 기약 없는 워크숍을 떠나고 그곳에서 존은 프랭크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에 매료됩니다. 프랭크의 기행적인 행동조차 밴드 멤버들과 존에게는 예술가의 에테르처럼 받들어집니다.
친칠라!!!
존은 밴드의 작업 과정을 트위터와 블로그, 유튜브에 올리고, 이를 계기로 밴드는 미국 텍사스의 인디 음악 페스티벌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에 초대받게 됩니다. 영화는 2010년대를 기점으로 각종 소셜미디어가 인디 음악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과 세계적인 유명 팝 뮤지션에 잠식당한 음악 페스티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인디 음악 씬 역시 말랑하면서도 인디의 쿨함을 덧입힌 ‘인디 팝’에 점령당하고 각종 록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를 팝스타들이 장식하기 시작했죠.
"인디 팝에 점령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우여곡절 끝에 밴드 멤버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무대를 거부했고, 내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악이 알려지고 사랑받길 바랐던 프랭크는 존의 부추김에 무대에 오르지만, 결국 ‘음악이 구려’라는 명언을 남기고 내려옵니다. 크게 실망한 존은 프랭크의 가면을 벗기려 실랑이를 벌이가 그를 놓치게 되고, 수소문 끝에 찾아간 그의 집에서 존은 마침내 프랭크의 가면 없는 얼굴을 마주합니다.
음악이 구려!
<프랭크>는 예술적 천재성과 고독,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여정을 독특하게 풀어낸 영화입니다. 사회적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예술적 길을 걷는 이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자아실현의 과정을 탐구하죠. 프랭크와 밴드 멤버들의 혼란스러운 예술 세계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지키고픈 고집과 세상으로부터 공감받고 싶은 욕망, 완전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상처, 모든 것이 혼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음악으로 내면의 상처를 끌어내고, 결국 서로 이해하고 위로받고 치유됩니다. 영화는 아무도 관심 없는 괴짜 같은 인디 밴드를 통해 외로움과 소외감을 겪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타고난 재능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과 결핍
존은 프랭크처럼 주체할 수 없는 끼와 재능으로 미친 예술가가 아닌, 그렇다고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습니다. 예술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가득하지만 스스로 재능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죠. 뮤지션보다 밴드 매니저에 어울릴 법한 사람입니다. 존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프랭크와 밴드를 세상과 연결하려 애쓰는 인물이기도 하죠.
음악적 재능 때문에 오히려 활기를 잃었지.
재능 넘치는 프랭크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를 선망하는 존. 그는 자신에겐 없고 프랭크에겐 있는 뮤지션으로서의 재능과 천재성의 이유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결국 프랭크에게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집과 화목한 가족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은 그저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그제야 받아들이게 되죠.
결핍을 보듬는 결핍
클라라(매기 질렌할)는 언제나 프랭크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합니다. 그녀는 프랭크의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가장 잘 이해하며, 그의 예술적 결핍을 감싸 안으려 하죠. 그녀 역시 결핍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프랭크의 가면 속 얼굴을 본 적 없는 클라라가 어떻게든 가면을 벗기려는 존과 달리 그의 얼굴을 궁금해하지 않는 건 이미 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가면을 벗고 돌아온 프랭크를 한눈에 알아본 클라라는 프랭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어두운 바다에서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지기처럼 그를 보호하고 싶어 합니다.
Lighthouse Keeper
우린 모두 그저 사랑받고 싶었던 것뿐
텅 빈 공연장에서만 공연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던 프랭크는 존을 만나고 나서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알리고픈 욕망을 마주합니다. 세상 어떤 예술가든 주류로 인정받고 싶은 갈망을 가슴에 담고 있죠. 예술가들은 종종 내면의 불안정한 자아를 외부 세계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치유하려 하지만, 프랭크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랑받고 싶어 했던 프랭크는 결국 자신이 속한 밴드 멤버들 사이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느낍니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랭크가 밴드 멤버들에게 돌아와 함께 노래 ‘I love you all’을 부르는 순간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 노래로 프랭크는 단순히 밴드 멤버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과 고통을 해방시킵니다. 프랭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결핍을 숨기지 않고 밴드 멤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죠. 프랭크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국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을 다시 돌려주는 치유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정서적 해방을 경험하는 순간 말이죠. 프랭크는 결국, 외부 세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유대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I love you all
크리스 시에비의 아웃사이더 정신에서 영감을 얻음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공동 각본에 참여한 존 론슨(John Ronson)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크리스 시에비(Chris Sievey)의 정신을 존중하며, 그의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내면을 탐구했습니다.
영화 <프랭크>의 실제 모델인 크리스 시에비는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뮤지션으로, 그의 독특한 캐릭터 ‘프랭크 사이드보텀(Frank Sidebottom)’으로 영화의 영감이 되었죠. 프랭크 사이드보텀은 거대한 종이 마스크를 쓴 인물로, 시에비는 이 캐릭터를 통해 일종의 ‘대안적인 정체성’을 만들었고, 그의 음악적, 예술적 표현을 확대했습니다. 이 영화는 시에비가 창조한 사이드보텀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그의 아이코닉한 가면과 독특한 무대 스타일이 영화에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화 <프랭크>의 영감이 된 프랭크 사이드바텀(크리스 시에비)
크리스 시에비는 1980~1990년대 동안 영국 인디 음악씬과 코미디 씬에서 활동하면서 독특한 팬층을 형성했습니다. 그는 주류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로서, 주로 기이하고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죠. 이 점은 영화 속의 프랭크 캐릭터와 많은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둘 다 자신만의 특이한 세계에 살고 있고, 그 세계에서만 진정한 창의적 해방을 느낍니다.
영국 출신의 작가, 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영화 각본가로 잘 알려진 존 론슨은 실제로 프랭크 사이드보텀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론슨이 프랭크 사이드보텀(크리스 시에비)와 함께한 경험은 영화 <프랭크> 속 존의 캐릭터에 많은 영감을 주었죠.
이상해도 괜찮아, 모자라도 괜찮아
<프랭크>는 등장인물들 제각각의 결핍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가지는 내면적 결핍, 그리고 아웃사이더의 고통과 소외감, 외로움을 위로합니다. 프랭크의 가면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닌, 세상의 눈으로부터의 보호막이면서 그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이죠. 그의 고통은 단지 마스크를 벗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데서 비롯되니까요. 프랭크는 단순히 마스크 뒤에 숨은 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불안과 결핍을 상징하는 현대적 아이콘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프랭크를 밴드 멤버들에게 데려다주고 떠나는 존의 뒷모습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프랭크와 밴드는 세상에서 아웃사이더였지만, 어쩌면 밴드의 세계에선 존이 아웃사이더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괜찮아요, 그대. 당신도 나도, 애써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사람이 많은 편에 슬쩍 서 있을 필요 없어요. 다들 이해하지 못해도, 조금 이상하고 모자라도 괜찮아요. 솔직한 자신을 마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에게 ‘괜찮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이어야 하니까요.
+ 영화 <프랭크>는 네이버 시리즈온, TVING, U+모바일tv을 통해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