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33회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말 많았던 개막식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는 시민 혁명 정신과 민주주의, 다른 사상과 가치관, 지향성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의 근본임을 자처했다. 힙스터 못지않은 우월함에 젖은 파리 엘리트주의를 바탕으로 기획된 개막식의 태도는, 거만함과 교만함의 극치였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인으로 살아오면서 서유럽 선진국 사람들이 턱을 잔뜩 치켜들고는 우리(서유럽과 영미권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에 익숙하긴 하다. 글로벌 팬데믹 초기, 한국의 QR 코드 사용과 강력한 격리 정책을 보고 우아하게 인권 문제를 들먹였던 프랑스 언론의 비웃음 가득한 뉘앙스를 기억한다. 인권과 자유를 외치던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결국 한국보다 훨씬 더 길고 강력한 격리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누가 누가 더 잘 사나’ 국가주의로 물들어 버린 올림픽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진정 관심 있고, 그 나라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개막식은 ‘전 세계의 축제’라는 올림픽의 보편성에 들어맞지 않았다.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올림픽 개막식은 인류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보편적이지 않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과연 프랑스는 물론 서구 사회엔 발도 들여본 적 없는 지구상의 어느 작고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의 소년이 이 개막식을 봤을 때 올림픽의 인류 보편적인 메시지가 전해졌는지 의문이다. 프랑스는 올림픽 개막식에 스스로 도취되어 카오스를 만들었다. 그 카오스마저도 프랑스의 정신이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내가 아는 프랑스의 무심한 듯 예술적인 ‘프렌치 시크’의 매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놓고 자랑하며 으스대는 건 프랑스답지 않았다. 그건 자유도, 평등도, 박애도 아닌 방종이었다.
한편으론 과거의 영광을 먹고사는 몰락해 가는 유럽의 현실을 부정하는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 비해 프랑스 역사와 정치, 패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었다. 모두 알다시피 파리 올림픽 개최 직전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극우 세력이 득세할 뻔했고, 오염되고 병든 도시는 인종차별과 난민 문제, 경제 위기로 온갖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올림픽 기간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끔찍한 인종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선수단은 올림픽에 참여했으나 러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올림픽 순위는 세계 경제 순위나 다름없다. 현대 엘리트 스포츠에는 모두 큰돈이 든다. 낭만적인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 출신의 선수가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는 드라마를 바라지만, 이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현대 올림픽은 더 이상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과 국가주의에 도취된 프랑스의 개막식을 수 시간째 보고 있자니 피곤해졌다. 한국 선수 입장만 보고 채널을 돌려야지, 하던 차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멘트를 들었다. 화면에 잡힌 건 분명 ‘대한민국’ 선수단이었는데 말이다. 이후에도 프랑스가 ‘실수’라고 표현한 문제들은 계속됐다. 개막식에서는 오륜기가 거꾸로 게양됐고,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프랑스 자국 국기가 낮게 게양됐고, 펜싱 오상욱 선수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는 등 자잘한 경기 운영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프랑스 시민들은 자국 선수와 경기를 치르는 상대 팀에 무차별적인 야유를 퍼붓곤 했다.
프랑스, 아니 프랑스뿐만 아닌 서구 세계의 오만함은 무지에서 온다. 아주 오랫동안 서양인들은 동양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 시대엔 동양인들에게 서구권 국가들은 따라가야 할 롤 모델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한국 K-팝, 영화, 드라마, 뷰티가 세계적으로 인기라 해도 트렌드에 민감하고 빠른 젊은 세대가 아닌 이상 여전히 서구권 국가에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과 ‘김정은’을 들먹이며 여전히 못 사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절절히 깨닫는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은 유튜브의 수많은 콘텐츠를 접할 수 있지만 기성세대의 정규 교육 시스템에서 한국은 그저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기억될 뿐이다.
해외에서 살면서 매일 같이 만났던 영국인 직장 동료가 어느 날 욱일기 패턴의 반다나를 머리에 두르고 나타났을 때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해맑은 표정의 그는 진정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에겐 욱일기는 그저 쿨-한 패션이었다. 예의 바르고 상대의 기분을 너무 살펴 탈인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한참 발만 동동 구르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를 내 앞에 앉혔다.
나는 그에게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문양을 찾아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아리아 민족의 우월성과 나치의 승리를 상징하는, 서구권에서는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전쟁범죄와 학살, 만행의 표식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욱일기는 일본인의 우월성과 그들의 영광을 온 세상에 뻗으리라는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아주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그들의 온갖 만행에 희생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게는 치욕이자 아픔이자 상처이자 분노라고. 그리고 일본은 여전히 그들의 전쟁범죄를 인정도, 사과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일본군에 끌려간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은 일본의 사과 한마디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제 8명만 살아 있다고.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두려움과 수치스러움에 휩싸인 표정으로 반다나를 벗어 쓰레기통을 가져와 내 앞에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정말 몰랐다고, 앞으로 네 나라의 역사와 아픔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배우겠다고 말했다. 언제나 나에게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의 문화나 관습, 영어 표현을 뿌듯한 미소와 함께 알려주던 그는 자존심이 크게 상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유럽인들의 피부 아래 깊숙하게 밴 자존감을 넘어선 우월감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내 나라는 더 이상 약하고 가난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걸. 교육이 게으르고 부족한 서구권 국가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내 나라의 집단적 지성과 용기, 단결, 품격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걸.
파리 올림픽에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선수들의 이름이 이제 더 이상 서구식대로 이름, 성 순이 아닌 우리 식대로 성, 이름 순으로 표기되는 걸 보면서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남의 기준에 따라왔다는 걸 느꼈다. 영국으로 돌아간 손흥민의 인터뷰에서 영국인 인터뷰어가 최선을 다해, 아주 또박또박 손흥민의 이름을 ‘흥민 손’도 ‘소니’도 아닌, “손. 흥. 민”이라고 발음하는데 전율이 일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외국 친구들에게 나를 “하나 초”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을 지어준 엄마, 아빠의 나라, 그리고 엄마의 엄마, 아빠, 아빠의 엄마, 아빠의 나라, 내 나라에서 부르는 방식대로 “조 하나”라고 소개한다. 그들의 나라가 이름을 먼저 말한다 해서 내가 그들의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으며, 그들 역시 내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저 내가 그들의 나라와 문화에서 이름을 앞에 두고 성을 뒤에 두는 걸 아는 것처럼 그들 역시 내 나라에서는 성을 먼저 두고 이름을 뒤에 두는 문화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
해외에서 만난 대만 친구들에게 나는 인기가 좋았다. 한국인이어서다. 대만 사람들은 웬만하면 한국인을 다 좋아한단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한국이 자신들을 ‘타이완’이라 불러주고 엄연한 독립국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란다. 한 대만 친구가 한국에 여행 온 적이 있는데 공항에 수많은 국가들의 국기 사이에 자리 잡은 청전백일만지홍기와 ‘타이완’이라는 표기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꽤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한국의 끈질긴 항일 투쟁과 대통령 탄핵 촛불 혁명은 대만 사람들에게 큰 자극과 위안이 된다고도 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서열 2위인 국회의장과 야 6당이 불참한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서글픈 광복절 기념식이 치러졌다. 마음껏 부를 국가와 드높게 게양할 국기와 이를 함께 기뻐할 국민이 있는데도 이를 축하할 수 없다. 그 대신 일제강점기, 우리가 일본에 쌀을 ‘수탈’ 당한 게 아니라 ‘수출’ 한 거라고, 사도 광산과 군함도에 우리가 ‘강제동원’된 게 아니라 ‘자발적 경제활동’을 한 거라고, 위안부에 끌려간 소녀들을 ‘전문 직업 매춘’이라 조롱하며, 김구는 ‘테러리스트’였다고 말하는 자들이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세운 대한민국 정부에서 감투를 쓰고 내가 낸 세금으로 주는 월급을 받고 있다.
독립기념관장 자리에 앉은 양반은 일본의 식민지 시절,
“우리는 일본인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이를 프랑스 친구에게 말했더니 나보다 더 길길이 날뛴다.
그럼 나치에 점령당했던 프랑스는 그때, 독일이었던 거냐고.
이번 파리 올림픽에도 여지없이 자신의 나라 이름 대신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국호와 자신의 나라 국기 대신 올림픽위원회 휘장기를 달고 나온 대만 선수들을 보고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8월 15일은 ‘건국절’이 아닌 ‘광복절’이다. ‘국가 수립’이 아닌 ‘정부 수립’이다. 우리는 한 번도 나라가 없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한국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잘 설명해 준 작가 조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