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
2024 제33회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예선에서 탈락한 축구 대표팀 외에도 수많은 구기 종목들이 고전하면서 대한민국 선수단은 48년 만에 가장 적은 인원으로 꾸려졌다. 대한민국이 5개의 금메달로 18위에 오를 것이라는 영국 슈퍼컴퓨터의 예측에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는 선수단 출정 전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언론 역시 어떻게든 사람들의 올림픽에 대한 기대를 꺾어놓으려 작정한 것처럼 굴었다.
한국에서 이러나저러나 욕만 먹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에 태어나 가장 우울하게 살고 있는 MZ선수들은 의기소침한 어른들과 달리 올림픽 기간 내내 그들만의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고, 서양 선수들과의 대결에서도 더 이상 피지컬로 밀리지 않으며, 기성세대처럼 ‘다른 게임은 져도 일본은 꼭 이겨야 한다’는 자격지심도 없이 ‘일본도 이기고 다른 게임도 이긴다’는 쿨함을 보여줬다.
예전 같으면 올림픽에서 은메달, 동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은 “금메달이 아니라 죄송하다” 하며 고개를 떨구곤 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북한 선수가 기자회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은메달을 따서, 기대에 못 미쳐 즐겁지 않다”라고 말했는데, 그 모습이 우리의 예전과 오버랩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에선 한국의 젊은 선수들 모두 메달의 색에 관계없이 마땅히 누려야 할 축배를 들었다. 선수들이 보여준 국제무대에서의 자신감과 여유, 매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품격 그 자체를 보여줬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올림픽 무대에서 쫄지 않고, 할 거 다 하고, 할 말 다 하고,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며 “올림픽 별 거 아니니까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말 그대로 빛이 났다.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
대외적으로 비치는 대한민국의 이미지만 이야기한다면 일부 사람들이 지적하듯 안세영은 잔칫집에 찬물을 뿌렸다. 하지만 올림픽 시작 때만 해도 선수들에게 아무것도 기대 안 한다던 한국 언론과 체육계가 안세영에게 “분위기 흐린다”라고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 잔치는 7년 동안 끔찍한 부상과 고통, 협회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처우와 홀로 싸우며 배드민턴 라켓으로 칼을 갈아 28년 만에 한국 배드민턴 단식에 금메달을 안긴 안세영의 것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들
마치 대한배드민턴협회의 각종 비리와 기형적인 구조, 불합리한 선수 대우 문제가 안세영의 입을 통해 세상에 처음 드러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언론은 오래전부터 때때로 드러난 선수들의 폭로에 눈을 감아왔다. 각종 협회에선 정기적으로 기자들을 불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불리며 언론을 관리한다.
선수보다 많은 협회 임원진은 하는 일도 없이 ‘네 돈도, 내 돈도 아닌’ 법카를 긁어대고, 협회에 복종하지 않으면 선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겁박하며, 실력으로 얻는 게 마땅한 태극 마크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모두 학연과 지연으로 묶여 있고, 함께 해 먹어온 게 하도 많아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눈물겨운 패밀리십을 자랑한다. 이건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다.
슬프게도, 이것이 대한민국 체육계만의 문제인가? 문화, 예술, 경제, 사법, 입법, 행정, 군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각각 나름의 카르텔로 운영되고 있지 않나? 그리고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세영처럼 용기 낼 수 없는 건 먹고살기 바빠서, 딸린 식구가 많아서라며 카르텔과 싸우기는커녕 카르텔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있지 않나?
방수현 같은 사람이 더 나쁘다. 1996 아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람이 자신 이후로 후배들이 28년간 아무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이유를 진단하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고민은 못할망정 “나 때도 그런 것 다 겪었다” “안세영 혼자 금메달 딴 것 아니다”라고 본질을 흐리며 물타기 하는 사람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까, 혹은 “에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침묵의 방관자들.
‘어른’ 방수현의 논리에 따르면 28년 전에도 있었던 협회의 부당함이 지금까지 이어져도 금메달을 땄으니 다 괜찮은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선수 개인의 인내심과 인성을 바탕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는 세계 수준의 실력을 갈고닦는 게 유일한 의무이자 권리 아닌가?
또 다른 ‘어른’ 대한체육회 회장 이기흥은 안세영을 어린애 취급하며 “이용대도 안 한 컴플레인이다” “방식이 서투르다”라는 등의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 사람 역시 축구협회 정몽규 회장 못지않게 오랫동안 체육계 권력을 쥐락펴락해 온 카르텔의 수장이다. 하지만 문체부 장관 유인촌과 유치한 힘겨루기 중인 인물이라, 어쩌면 이참에 문체부가 안세영의 작심 발언을 기회로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내부고발자는 언제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고 만다. 안세영이 대표팀에 남는다 해도 앞으로의 선수 생활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지가 그렇게 잘났어?’라는 못난 심리로 동료 선수들부터 그를 따돌릴 것이고, 드러나지 않게 은근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협회의 괴롭힘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질 것이다. 안세영은 이 모든 걸 몰랐을까?
성숙하고 용감한, 가엾은 청춘
그 대단들 하신 ‘어른들’이 그 어리다는 22살 안세영의 용기, 반만큼이라도 가졌을까? 누구보다 축하받아야 할 주인공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자리에서 7년 동안 참고 참아온 말을 어렵게 꺼냈다는데, 협회 공식 SNS에 선수 얼굴을 빼고는 “우리는 할 거 다 했다”라고 조목조목 따지는 A4 10장짜리 반박문을 냈다.
안세영은 자신의 목소리에 비로소 힘이 실리게 되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자리까지 분노의 힘으로 버텼다고 했다. 여전히 최고가 아니면, 1등이 아니면, 금메달이 아니면 아무도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아무도 관심 갖고 들어주지 않는 한국 사회에도 분통이 터졌다.
그리고 안세영의 청춘이 가엾었다. 22살 선수가 금메달을 바란 이유가 어리석고 악한 어른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니. 자신의 잔칫날을 스스로 망쳐버릴 폭로를 해야 하는 심정, 지금 누구 하나 헤아리려 하고는 있을까?
그리고 선수를 말 그대로 ‘감독’ 해야 하는 감독이란 작자는 “예전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비겁하게 줄행랑을 쳤다. 선수와 협회 사이의 오랜 갈등을 알고 있었던 감독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저렇게 뻔뻔스럽게 한다는 게, 그리고 안세영이 저런 사람을 감독이라 부르며 함께 훈련해 왔다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난다.
지금껏 안세영은 비겁하거나, 나쁜 어른들만 만났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잘하는 배드민턴을 하면서. 수백, 수천 번은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선수 개인에 대한 처우에 대한 불만을 감정적으로 터뜨린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협회와 어른들이 바뀐다면 몇십 년에 한 번 어쩌다 나오는 금메달이 아니라 약속된 메달이 수두룩 나올 수 있지 않겠냐고, 배드민턴에서 28년 만에 금메달 하나만 나오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안세영은 지난 7년간 침묵과 외로움 속에서 고통을 참아 내며 스스로에 주어진 숙제를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단 한 명의 어른다운, 진정한 어른을 찾고 있다. 그리고 먼 훗날, 대한민국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들은 안세영이라는 어른의 용기에 고마워할 것이다. 안세영은 그를 어리다 무시하고 비난하는 그 어떤 어른들보다 성숙하고 용감하다.
시대가 바뀌었다. 금메달이 아니면 쳐다도 안 보는, 결과만 중시하던 시대가 끝났다. 운동은 맞으면서 했던 시대의 체육인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자기가 받은 걸 오롯이 대물림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과정이 멋져야 결과도 멋진 거라는 질문을 세게 던졌다. 올림픽에 BMX, 스케이트보드, 서핑, 브레이킹 종목이 생기는 시대란 말이다. 이제, 어른들이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