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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좌절한 우리 시민에게 보내는 브라질의 편지

두 나라의 애환 가득한 평행 이론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

by 조하나

나무의 이름을 딴 나라가 있습니다.

브라질나무 말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붉은 염료 때문에 멸종 위기에 놓였죠.

그 이름만 남았습니다.

태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예가 죽은 나라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 오는 것이 더 쌌습니다.

모든 반란은 잔혹하게 분쇄되었고,

군벌에 의해 공화국으로 선포되었죠.

21년간의 독재 끝에 민주 정부를 세웠으며

세계에 많은 귀감이 되었죠.

브라질은 마침내 저주를 깨뜨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습니다.

대통령 한 명이 탄핵당했고,

다른 한 명은 투옥되었으며,

나라는 과거 독재 정권 시절로 빠르게 회귀하고 있죠.

오늘, 저는 땅이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짧게 끝난 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中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의 페트라 코스타 감독이 만들어 2019년 선댄스 영화제에 첫선을 보인 후 넷플릭스에 독점 공개된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작품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고, 2020년 플라티노와 피바디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는 작품이 가진 시의성과 메시지의 힘을 증명하는 바이지만, 동시에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 개인의 깊은 고뇌와 역사의 상흔을 담아내는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인해 더욱 강렬하고 논쟁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 예고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이 치켜세웠던 ‘브라질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

룰라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재선에 성공한 브라질의 대통령이었고, 퇴임 당시 87%가 넘는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다음 대통령으로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 지우마 호세프를 내세워 정권을 연장합니다. 지우마 호세프는 민주화 운동 당시 끔찍한 고문에 시달렸던 민주 투사였죠.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룰라 대통령. ⓒ 넷플릭스 <위기의 민주주의>



지우마 대통령이 보수 국회의원의 부패와 비리를 알아채고 조사에 들어가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수구 세력과 결탁한 검찰은 룰라 전 대통령이 대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거라 단정해 표적수사에 들어갑니다. 2016년 봄, 룰라의 자택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하며 망신주기와 마구잡이 식의 무리한 수사를 이어간 수사 판사 모루는 퇴임한 룰라 대통령을 아무 증거도 없이 부패 혐의로 기소하고 10년이 넘는 중형을 선고해 피선거권을 박탈합니다.

더 이상 국민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룰라는 대기업과 끈끈하게 연결된 수구 세력과 정치 검찰, 헌법을 유린하는 사법부, 대기업이 소유한 언론사들에 의해 재판을 받기도 전에 죄인으로 낙인찍힙니다. 그리고 수구 세력은 온갖 회유와 압박을 동원해 국회를 결집하고, 룰라의 후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지우마 호세프마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탄핵시킵니다.


노동자당 룰라 전 대통령과 지우마 현 대통령을 끌어내린 브라질의 수구 세력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습니다. 눈이 멀고 귀가 먼 국민은 브라질의 미래를 걱정하는 척하며 룰라와 지우마에게 등을 돌리고, 20년간의 군부 독재 정권의 유산을 가진 보수당에 또다시, 순순히 권력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수구 세력은 다음 대선에서 누명을 벗고 세력을 다시 규합하려던 룰라를 다시 한번 짓밟고 정권 연장에 성공합니다. 수구 세력의 정적 룰라를 제거한 모루 판사는 전례 없이 막강한 권한을 쥔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됩니다.

모든 게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 2010년대에 민주주의 국가 브라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이게 브라질인지 대한민국인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정치의 역사가 곧 가족의 역사이기에 똑바로 봐야 한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1984년 군부독재가 20년째 이어지고 있던 상황에 태어난 감독 ‘페트라’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페트라의 부모는 좌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감옥에 다녀온 뒤 신분을 감추고 군부에 대항하는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지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감독 자신의 가족사를 서사의 중심에 놓는 1인칭 시점은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특징이자 힘입니다. 감독은 자신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브라질 현대사의 격랑을 비춥니다. 덕분에 룰라의 집권과 몰락, 지우마의 탄핵이라는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은 한 개인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피와 살이 있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관객은 감독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그의 희망과 좌절, 분노와 슬픔을 공유하게 되고, 이는 딱딱한 정치 분석보다 훨씬 강력한 감정적 몰입과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의 내밀한 고백을 통해 세상을 배우듯, 코스타 감독의 진솔한 목소리는 브라질의 비극을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구두닦이 출신 노동자 룰라, 대통령이 되다


룰라는 1979년 브라질 대규모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고 노동자당을 창당해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하며 노동자와 서민의 권리를 대표했지만 89년, 92년, 98년 대선에 매번 낙선합니다.


수많은 시민의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 직선제를 통해 자국의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페트라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룰라에 표를 던집니다. 드디어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승리합니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에 노동자 출신인 룰라는 기득권의 온갖 방해와 횡포에도 불구하고 오직 시민의 힘과 지지만으로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자주권을 포기한 순종적인 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이의 고통을 소극적으로 지켜보던 불공정한 국가가 아니라,
자랑스럽고 고귀한 나라임을 세계에 용감하게 천명할 것이며,
모든 국민의 나라로서 계급, 인종, 성, 신념에 따른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룰라의 대통령 취임사 中



룰라 정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취한 힘과 부를 노예처럼 일하며 착취당하는 빈곤층과 나누라니 안 될 일이지요. 결국 룰라는 거대 보수야당과 연정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닥뜨립니다.






저는 룰라에게 투표했죠.

그가 정치 시스템을 윤리적으로 개혁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요.


룰라는 자신이 늘 비판했던 관행을 반복했으며

브라질의 낡은 과두 정치와 연정을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2천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죠.



룰라 정부가 만든 ‘보우아 파밀리아’ 정책은

브라질의 극빈층 가족에게 매달 30달러를 제공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아프리카계 국민의 숫자가 세배로 뛰었고,

실업률은 역사상 최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세계 경제의 붕괴 속에서

브라질은 세계 13위에서 7위의 경제 대국으로 뛰어올랐죠.

<위기의 민주주의> 中






브라질과 한국의 평행 이론

저 역시 페트라 감독과 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이 군부독재에 의해 통치될 때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아빠! 잘 생긴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라며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딸을 바라보던 아빠의 절망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페트라 감독은 생애 첫 투표권으로 룰라에게 표를 주었고, 저는 생애 첫 투표권으로 노무현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수많은 민주투사들, 제 부모와 삼촌, 이모 세대 덕분이었습니다.


룰라가 돌풍을 일으키며 브라질의 대통령이 되던 해,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에서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식에 참석인원의 절반에 가까운 2만여 명을 국민을 초청해 채웠습니다. 단상 인사에 국회의원과 주요 외빈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국민대표 50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취임사 연설문은 2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한 문장도 버릴 게 없습니다.




연설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진정한 동북아 시대를 위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함을 천명합니다. 노무현은 20년 전부터 부산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꿈꾸던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북아 시대를 열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사회가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이며 개혁과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시장의 투명성과 깨끗한 정치문화, 부정부패 척결,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 확대, 양성평등, 고령화 사회 준비를 대한민국의 숙제로 제시했습니다. 기회주의자를 없애고 원칙이 지켜지는 신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연설문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우리’ ‘국민’ ‘평화’ ‘동북아’ ‘세계’ ‘한반도’ ‘시대’ ‘대화’ ‘번영’ 순이었습니다. 반대 진영을 악마화하거나 혐오하고 배척하는 표현은 일체 들어있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넘은 2003년, 한 나라를 대표하는 품격 있는 지도자의 연설문입니다.





얼마 전 헌법 수호의 의지를 저버리고 국민의 신임을 배신해 파면당한 대통령은 연설에서 툭하면 ‘종북척결’ ‘반국가세력’ ‘타파’ ‘전쟁도 불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안 그래도 반으로 쪼개진 한반도를 또다시 반으로 쪼개놓는 데 국정의 전력을 다했죠. 상대당은 정치 파트너가 아닌 정적이고, 그들을 철저히 악마화하며 죽을 때까지 수사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가족과 진영에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포와 혐오를 먹고사는 대통령은 국민의 심판으로 파면당했고, 20여 년 전 야당 기득권의 횡포로 탄핵 소추를 당했던 노무현은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사 연설문에서 스스로 말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태어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TV에 직접 나와 조폭을 연상케 했던 수십 명의 검은 양복을 입은 검사들과 자유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리도 노무현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권력에 당당했던 검사들은 왜 지금 어떤 권력 앞에선 다르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졸에 사법고시로 변호사가 되고 돈도, 학벌도, 연줄도, 힘도 없는 노무현이 얼마나 만만했겠습니까. 아직도 임기 내내 노무현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심지어 민주당까지도)이 그를 황새 노는 곳에 낀 뱁새처럼 무시와 조롱으로 대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룰라처럼 거대 보수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추진하려는 정책의 속도는 더뎠지만, 그래도 노무현은 제가 기억하는 한 적어도 멈추거나 뒷걸음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익과 국민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인 미국에 턱과 어깨를 빳빳이 세우고 맞섰으며 일본엔 절대 허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거대 보수 야당에 의해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고 직무가 정지되었을 때에도 그는 참모들과 모여 앉아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수백 가지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비가 와도 자신 탓, 비가 안 와도 자신의 탓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엔 동네 개가 짖어도 노무현 탓이라는 조롱 섞인 농담이 사회 구석구석 가득했습니다. 서민 출신 대통령을 뽑은 수많은 국민조차 노무현 대통령을 만만하게 함부로 대했습니다.





결국 노무현은 그가 대통령 취임 연설문에서 말했던, 그토록 대한민국이 척결하고 싶었던 기회주의자들의 손에 희생당했습니다. 퇴임 후 정치 검찰의 망신주기 식 수사가 계속됐고, 검찰 조사 23일 후 나의 대통령 노무현은 모멸감과 수치심 속에 고민하다 우리 모두를 위해 투신합니다. “누구도 원망 말라”는 말을 남기고요.















상파울루 주정부 청사에서 열린 파티에서
정치가가 어떤 기업 소유주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그 기업주는 이렇게 답합니다.
“난 항상 여기 있었다오. 바뀌는 건 당신네 정치인들이잖소.”

<위기의 민주주의> 中






원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상업, 인격 없는 지식, 양심 없는 쾌락


재벌기업과 기득권을 뒤에 업은 사법부의 검사와 판사의 다른 잣대는 대한민국에서도 브라질에서도 다를 바 없습니다. 길고 긴 군부 독재 시절을 겪은 두 나라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요.


군부 독재 세력은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재벌기업과 끈끈하고 질긴 관계를 맺었고, 재벌기업의 힘을 업은 사법부의 검사와 판사는 노골적으로 기득권의 편을 듭니다. 진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주는 대로 받아쓰는 언론사는 그 재벌기업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인들과 도덕 없는 상업을 밀어붙이는 경제인들, 인격 없는 지식을 갖춘 법조인들, 양심 없는 쾌락을 즐기는 언론과 일부 세력 추종자들의 환상적인 조합입니다.


룰라 대통령이 대기업으로부터 아파트를 받았다고 검찰은 주장합니다. 하지만 룰라가 그 아파트의 소유자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이런 논리를 폅니다. “룰라가 기업으로부터 받은 아파트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이 실제 아파트의 소유주임을 숨기기 위한 증거”라고요. 지나가던 초등학생이 듣고도 웃을 논리입니다. 룰라의 아내와 아들까지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이뤄졌고 검찰은 아무 증거 없이 룰라를 중형으로 기소합니다. 결국 룰라의 아내는 몇 달 후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다시 한번,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죠.


한편, 룰라를 기소한 검사와 판사는 모두 국민적 스타가 됩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고 보던,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요?









저는 존경하는 상원 의원님들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음을 차분하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저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불공정하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탄핵에 회부 됐습니다.


정부 수반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갈아치우겠다는 것은

저를 고발한 분들의 바람처럼

적법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국민입니다.

오직 국민만이 투표로 그렇게 할 수 있죠.


지금 헌법을 들먹이는 위선적인 껍데기의 세계가

진실의 세계를 감추고 있습니다.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저는 두 번이나 죽음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제가 고문당했을 때…

(그녀는 끔찍한 고문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제가 여러 날 동안 고문당했을 때

학대에 굴복하면 인간성과 삶의 의미에 회의를 품게 된다고 생각하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심각하고 극심하게 아픈 고문 후유증은 제 삶을 단축시키지 못할 겁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죽음뿐입니다.

브라질 상원에서 탄핵 소추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


<위기의 민주주의> 中



룰라의 기소와 판결, 지우마의 탄핵소추를 지켜본 국제위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브라질 사법 시스템의 이상한 점은 검사가 수사, 기소, 판결까지 한다는 것이다. 검사가 용의자를 지목해 도청이나 가택수색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 용의자를 기소해 판사에게 넘기는 이상한 시스템이다. 피고인의 가장 중요한 권리는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이다.”


다시 한번, 룰라가 유죄든 무죄든 더 이상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재판을 받느라 왔다 갔다 하는 룰라의 모습만으로 사람들은 그를 이미 유죄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브라질 국민은 룰라를 버리고, 지우마의 탄핵을 묵인하고 다시 군부 정권을 택합니다. ‘백인’ ‘남성’으로만 구성된 쿠데타 군부 정권은 집권 일주일도 안 돼 커다란 부패와 정경유착 스캔들에 휘말리지만, 의회는 대통령의 기소를 막아줍니다. 이어지는 대선에서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대선 재출마를 선언한 룰라를 정치 검찰과 판사를 이용해 감옥으로 보냄으로써 군부 정권은 또 한 번 정권을 연장합니다.




법률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적 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도가 불규칙하게 기능하도록
만들 힘을 가졌다는 겁니다.

<위기의 민주주의> 中








누구도 막지 못하는 봄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는 룰라는 울먹이는 수만 군중 앞에서 이렇게 연설합니다.


ⓒ 넷플릭스 <위기의 민주주의>




우리는 지금 까다로운 일을 해야 합니다.

저들은 제 구속을 명했습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저는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들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제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제가 정의를 믿지 않았다면

정당을 세우지도 이 나라에 혁명을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의를 믿습니다.

공정한 사법 체계라면

제시된 증거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죠.


제가 이 나라를 돌아다니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수백만 명의 룰라, 볼루, 마누엘라, 지우마 호세프가

저를 대신할 테니까요.


제 사상을 멈추게 하려고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미 벌써 다 퍼져서 잡아 가둘 수 없으니까요.


제 꿈을 중단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꿈꾸기를 그쳐도

여러분의 정신과 꿈을 통해 꿈을 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룰라에게 심장마비가 오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생각하는 것도 다 소용없습니다.

제 심장은 여러분의 심장을 통해 뛸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하나, 둘, 백 개의 장미를 꺾을 수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투쟁은 봄을 찾고 있습니다.

<위기의 민주주의> 中 수감되기 전 룰라의 마지막 연설




재선에 성공하고 퇴임 후에도 89%에 달하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브라질이 사랑한 대통령’ 룰라를 기득권 세력은 얼마나 두려워했을까요.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바꿀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상징인 룰라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괘씸했을까요?


룰라가 수감되고 6개월 후, 자신의 진영이 아닌 국민을 ‘빨갱이’ ‘범법자’라고 부르며 동성애를 혐오하고 인종차별을 일삼는 보우소나로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리고 브라질은 극심한 사회 분열과 경제 위기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죠. 한때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룬 나라로 존경받던 브라질은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그리스 작가가 말하길
민주주의는 부자들이 위협을 느낄 때만 작동한다고 했죠.
그렇지 않으면 기득권의 과두 정치가 등장하고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손자로 증손자로 그렇게 모든 건 이어집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가문들이 장악한 나라입니다.
몇몇 가문은 언론을, 다른 가문은 은행을,
모래와 시멘트, 자갈과 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민주주의와 법치에 진력을 내곤 합니다.

우리 앞의 이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폐허를 헤집고 걸어 나가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어디서 얻을까요?

<위기의 민주주의> 中








질문을 던지는 용기


이처럼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 현대사의 비극을 고발하며 전 세계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제적인 수상과 후보 지명은 이 작품이 가진 힘과 시의성을 증명합니다. 특히 감독 개인의 진솔한 목소리와 서사를 통해 복잡한 정치 상황을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와닿게 전달한 방식은 이 다큐멘터리의 분명한 성취입니다.


결국 <위기의 민주주의>는 뜨거운 심장과 냉철한 두뇌 사이의 긴장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완벽하게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깊이 공감하고 분노하는 한 시민의 열정적이고 용기 있는 증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은 단순한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선 대한민국의 현실을 비추는 아프고도 절실한 거울이 됩니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역사는 결국 옳은 방향을 향한다


페트라 코스타 감독의 카메라는 룰라가 여전히 수감 중이던 2019년에 멈췄지만, 브라질의 역사는 쉼 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때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혹은 놀라운 복원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역시 주인공 룰라의 귀환일 것입니다. 숱한 법적 공방 끝에 그는 극적으로 모든 유죄 판결의 무효화를 얻어냈고, 2022년 대선에 재출마하여 박빙의 승부 끝에 기적처럼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한때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던 그가 다시 브라질의 최고 지도자로 돌아온 것입니다.


룰라 3기 정부는 출범 이후, 전임 보우소나루 정권 하에서 훼손되었던 민주주의 제도를 복원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극빈층 지원 정책인 '보우사 파밀리아'를 확대하고, 국제 사회의 우려를 샀던 아마존 삼림 파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환경 외교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군부에 대한 문민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 또한 민주주의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받습니다.


룰라의 복귀 이후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콜롬비아에 이어 6대 라틴아메리타 국가에서 모두 좌파가 집권하게 됐습니다. 나라마다 처한 상황도 집권의 배경도 다르지만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기후위기 등을 제대로 풀어내 달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위기의 민주주의>가 고발했던 브라질 사회의 깊은 균열은 룰라의 복귀만으로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2023년 1월 8일, 전임 대통령 보우소나루의 극렬 지지자들이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궁에 난입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건은 브라질 민주주의가 여전히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충격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룰라 정부는 관련자 처벌과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회를 둘로 가른 깊은 불신과 증오의 골을 메우는 것은 여전히 힘겨운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경제 성장 둔화와 높은 물가 역시 현 정부가 풀어야 할 시급한 숙제입니다.


그렇다면 한때 룰라를 심판하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룰라를 기소했던 세르지우 모루 판사는 법무부 장관을 거쳐 202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선거 자금 관련 의혹 등으로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하며 과거의 명성은 상당 부분 빛이 바랜 상태입니다.


룰라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2022년 대선 패배 후 여러 법적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연방선거법원으로부터 2030년까지 공직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극우 세력의 상징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의와 심판의 저울은 때로는 더디게, 때로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듯 보입니다.


결국, 룰라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민주주의는 여전히 ‘위기’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상처는 깊은 흉터로 남았고, 사회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으며, 민주주의 제도는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12.3 내란 사태와 1.19 서울서부지법 폭동을 겪은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위기의 민주주의>가 던진 질문들은 현재 진행형이며, 어쩌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 그리고 남겨진 이의 책무




같은 해 각 국가의 역사상 최초로 서민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된 ‘브라질이 사랑한 대통령’ 룰라와 ‘대한민국이 사랑한 대통령’ 노무현은 2005년 룰라의 방한으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20년 후, 룰라는 다시 돌아왔지만, 노무현은 우리 곁에 없네요. 하지만 우리 곁엔 또 다른 노무현이 있습니다.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노무현입니다.


여담으로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선 3차 토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위기의 민주주의>를 언급하며 이 작품을 보았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윤석열은 그때 “봤다”고 대답했는데, 정말 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의 여섯 번째 기소가 이뤄졌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일단 기소는 한다고 합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그래서 우리에게 단지 질문을 던지는 것을 넘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응답을 요구합니다.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이며, 한 번 획득하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 분열과 혐오가 강물처럼 넘실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손을 잡고 무너지지 않는 연대의 다리를 놓을 수 있는가? 역사의 퇴행을 막고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무거운 질문들 앞에서 깊은 무력감과 냉소에 빠져들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하지만 페트라 코스타 감독이 폐허 속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건 룰라가 차가운 감옥에서 “아무리 꽃을 꺾어도 봄이 오는 것은 절대 막지 못할 거”라 외쳤듯, 지우마 호세프가 고문 속에서도 오직 두려워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죽음뿐”이라 고백한 것처럼 모든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민주주의라는 연약하지만 끈질긴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간절한 외침 때문입니다. 그 외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것은 이제, 이 땅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자 책무로 남았습니다.


우리 역시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브라질이 겪었던 어제를 대한민국은 오늘의 현실로 겪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현재는 모든 것을 옳은 방향으로 조금씩 되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맙시다. 무기력해지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함께 힘을 냅시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듯 담벼락에 낙서라도 휘갈기는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원칙 없는 정치인을 가려내고, 도덕 없는 기업가를 몰아내고, 양심 없는 쾌락을 좇는 언론을 멀리하며, 인격 없는 지식인이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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