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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하고 낭만적인 첩보 스릴러의 철학적 질문

피를 뒤집어쓴 <러브 액츄얼리>,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도브>.

by 조하나

2024년 12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블랙 도브>는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가 엮인 섹시한 스파이 스릴러물입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크리스마스 로맨틱 코미디가 <러브 액츄얼리>(2003)라면, <블랙 도브>(2024)는 피 칠갑을 한 스파이와 킬러가 등장하는 다크한 스릴러 버전의 <러브 액츄얼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향해가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관계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영국식 블랙 유머와 냉소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대사, 그리고 다정한 제스처가 스며들어 있으니까요.




0_4.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TV 시리즈에서 보기 힘든 키이라 나이틀리가 영국 국방부장관의 아내이자 쌍둥이 엄마이면서 동시에 비밀 스파이 조직 ‘블랙 도브’의 핵심 멤버인 헬렌 웹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은퇴한 암살자로 조용히 숨어 살다 헬렌을 돕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샘은 오랫동안 탁월한 연기로 사랑받아 온 벤 위쇼가 맡았죠. 여기에 ‘블랙 도브’의 리더이자 헬렌을 조직에 영입한 후 모든 것을 통제하는 리드 역으로 <해피 밸리>의 사라 랭커셔가 분합니다. 이 밖에도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가 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환상적인 연기로 팽팽한 긴장감과 완벽한 균형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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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_2.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기리/하지>의 제작과 각본을 맡았던 조 바튼이 <블랙 도브>에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런던을 배경으로 중국 대사의 죽음과 실종된 딸,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스파이, 예민하고 감상적인 암살자, 그리고 영국 정부도 모자라 미국 CIA까지 연루된 범죄 조직 스캔들을 다룹니다. 그러면서 실존적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베테랑 스파이와 윤리적 규범으로 고뇌하는 전문 암살자와 그들을 둘러싼 관계를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다루죠. 최근 아주 재밌게 본 미국 시리즈 <외교관>에서 주영 미국 대사 케이트의 직업을 스파이로 바꾸고 피 튀기는 근접 액션과 영국적 색채를 진하게 가미하면 <블랙 도브>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도브> 예고편









2010년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실제 언더커버 스캔들

<라자루스 프로젝트> <기리/하지>를 제작했던 조 바튼은 강력한 그래픽 노블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합니다. 여기저기 기관총이 만연하고 사람들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가운데 런던의 거리 모퉁이에서 대량 총격이 일어납니다. 피를 뒤집어쓴 헬렌의 얼굴은 아시아풍 네온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는 런던을 누아르로 만들죠. 완벽한 이야기 구조를 너무 깊이 생각하는 대신 그의 초현실적인 상상력과 신랄한 유머, 과장되고 건방진 스타일을 즐기는 게 좋습니다.

조 바튼은 2010년, 영국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실제 스캔들 ‘스파이 캅스(Spy Cops)’에서 <블랙 도브>의 영감을 얻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1968년부터 2010년까지 스파이 경찰들이 1,000개 이상의 정치 단체 활동 인물에 접근해 수십 년 동안 이중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죠. 이 경찰들은 좌익 및 진보적 단체에 가입해 활동가로 위장해 운동가와 그들의 시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비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조 바튼은 이 사건에서 ‘가짜 결혼을 오랫동안 지속한 다음 사라져 버리는 그 이중성’에 끌렸습니다.











매혹적인 캐릭터를 만나 더 빛나는 배우들

헬렌(키이라 나이틀리)은 가정에 충실한 배우자이자 어머니지만 그녀의 주변 모든 소품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스파이입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한밤중 집안에 침입한 암살자를 주방에서 제압하며 그녀가 주방 기구를 이용해 어떻게 그를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지 차분하게 알려주죠.


10 Black Doves CROP.jp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그녀는 침착하지만 잔인하고 분노로 가득하지만, 현실적이며 세속적이면서 낭만적입니다. 그녀는 부드러운 아내와 다정한 엄마의 모습, 그리고 강철같이 차갑고 잔인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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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y-Ullman-Black-Doves-Netflix-1014x609.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부드러운 현모양처와 냉혹한 킬러의 영혼을 여성이라서 동시에 갖지 못할 거라는 사회적 통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블랙 도브’ 조직을 관리하는 리드(사라 랭커셔)와 암살 브로커 레니(케스린 헌터), 거대 범죄 조직 클라크 패밀리의 두목 알렉스(트레이시 울만), 모두 여성입니다. 헬렌의 무감각한 남편은 리드가 자신의 파티에 나타났을 때 그녀를 정부 관리 중 눈에 띄지 않는 하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제스처에 가려진 강인한 통제력과 무자비함을 통상적인 사회는 과소평가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어두운 일을 진행하기 수월할지도 모르겠네요.


샘(벤 휘쇼)의 세상은 고통과 후회, 직업적인 규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려 깊고 다정하지만, 언제든 산탄총으로 표적을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잔인하고 무심하기도 하죠.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함이 없고 완벽한 전문성을 지녔지만,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위협을 받을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BlackDoves_TrailerDebut_Image_11.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헬렌과 샘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가짜’로 살아야 하는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고 통제하며 계획을 세우는 리드가 있죠.


<블랙 도브>를 더욱 빛나게 하는 건 누구 하나 뺄 수 없는 완벽한 캐스팅입니다. 헬렌이 사랑했던 제이슨(앤드루 코지)은 과거의 회상 장면들만으로도 시리즈 피날레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며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빌어먹을 세상 따위> 스타일의 젊고 탐욕스럽고 막 나가는 사이코패스 암살자 듀오, 엘라 릴리 하일랜드)와 엘레너(가브리엘 크리비)의 어둡고 코믹한 앙상블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 연기의 거장으로 꼽히는 케스린 헌터와 트레이시 울만은 등장하는 장면마다 특유의 개성과 분위기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blackdoves_trailerdebut_image_9-972x777.jp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삶과 죽음, 그 사이를 유령처럼 서성이는 사람들

‘블랙 도브’ 영입을 제안하는 리드에게 헬렌이 “‘블랙 도브’가 조국(영국)을 위해 일하는 조직이냐”고 묻자, 리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조직이야. 이념적인 조직이 아니지.”

그러자 헬렌은 이렇게 되받아치죠.

“자본주의(Capitalism)도 이념(Ideology)이에요.”

‘블랙 도브’는 가장 높은 금액을 제안하는 입찰자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입니다. 누가 가장 큰 금액을 부르는지에 따라 적과 친구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긴장감이 시리즈 전체에 팽배합니다.


<블랙 도브>에 등장하는 이들은 인간의 복잡하고 이중적인 모습 안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흔들립니다. 모든 이의 삶은 직간접적으로 어떻게든 폭력과 연결되어 있고, 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돈이나 개인적 만족을 위해, 개인적 원한에 대한 복수를 위해, 혹은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이용합니다.


ⓒ 넷플릭스 <블랙 도브>




크리스마스라는 일 년 중 가장 밝고 따뜻한 시즌을 배경으로 <블랙 도브>는 절대 움츠러들지 않고 어둡고 잔혹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피가 사방에 튀는 폭력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와 균형을 이룹니다. 크리스마스 클래식을 배경으로 피비린내 나는 강렬한 총격전이 동반되는 기묘하고 불편한 느낌이 <블랙 도브>가 시청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크리스마스 그 자체의 이미지는 달콤하고 쾌활한 분위기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보내는 건 아니죠. 누군가에겐 그 밝음과 빛남으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 부각되는 어두운 시기일 수도 있으니까요.


<블랙 도브>에는 삶과 죽음, 폭력과 평화, 어둠과 빛, 좌절과 구원, 이 모든 것이 공존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도 있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있고, 크리스마스 음악도 있고, 성탄극에 나오는 아이들도 있고, 외로운 암살자가 먼발치에서 전 남자 친구의 행복한 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인과 납치로 가득한 어둠과 절망도 있습니다.


<블랙 도브>에 등장하는 스파이와 암살자, 범죄 조직 사람들은 언제나 삶과 죽음, 그 사이를 서성이며 유령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모두 삶이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 그 자체에 그리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그저 매 순간을 살아있으려 할 뿐이죠. 이상하게도 그 초연함이 저에겐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블랙 도브>는 그런 사람들이 엉켜 살아가고, 또 죽어가는 도시 런던의 빛과 어둠을 담습니다. 리든홀 마켓부터 피카딜리, 메이페어, 이스트엔드, 사우스뱅크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촬영된 시리즈는 마치 런던에 보내는 러브레터 같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손에 피를 묻히는 일

살인을 업으로 삼은 킬러는 직업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샘은 항상 농담을 빌어 “돈 때문에” “돈만 많이 주면”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헬렌 역시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얻은 국가 기밀 판매에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감각을 억제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노력하죠. 하지만 또 그게 잘 안됩니다.



img (2).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다른 이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스파이와 킬러가 정작 자신의 삶에서 겪은 혼돈과 갈등을 <블랙 도브>는 가만히 비춥니다. 냉혹한 킬러 안의 유머와 연약함, 인간성에 주목하죠. 스파이와 킬러로서의 삶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를 통해 헬렌과 샘은 끝없이 고민합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서로의 처지를 잘 아는 헬렌과 샘의 우정과 의리는 그래서 더 아름답습니다. 헬렌과 샘은 <블랙 도브>에서 개별적으로도 훌륭한 캐릭터지만 이들은 함께 할 때 더 멋진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성적 긴장에서 벗어나 서로의 트라우마와 직업적 전문성과 윤리, 연민으로 형성된 유대감은 그 무엇보다 강합니다. 헬렌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맹렬함은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샘의 예민함과 여린 내면과 서로 보완되며 기묘하게 균형을 이룹니다. 샘도 헬렌만큼이나 저속하고, 잔인하고, 감정적이며, 또 낭만적입니다. 그 역시 헬렌처럼 엉망진창이면서도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녀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고통과 상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BLACK DOVES CAST 031224 BlackDoves_EpisodicImagery_Image_37.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삶과 죽음에 초연한 스파이와 암살자인 헬렌과 샘을 죽음으로 몰게 하는 것도, 또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도 결국 사랑입니다. 살아가게 하는 건 그럼에도 사랑입니다. 리드는 과거에 헬렌을 구했고, 헬렌은 샘을 구했고, 샘은 다시 헬렌을 구합니다. 사랑, 우정, 모성, 집착, 복수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지만, 결국 모든 건 사랑입니다.








‘검은 비둘기’의 의미

비둘기는 기독교 전통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레위기와 누가복음에서 비둘기는 정화와 속죄를 위한 제물로 성전에서 바쳐지죠. 창세기에서 비둘기는 새로운 삶의 전조로 홍수의 끝을 알립니다. 과학자들은 비둘기가 일부일처제이며 한번 짝을 이루면 평생을 지속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비둘기는 ‘애도’ ‘과부’를 상징하기도 하죠.


‘블랙 도브’는 전적으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스파이 조직입니다. 그리고 헬렌은 제이슨의 죽음으로 마치 ‘검은 비둘기’처럼 애도하는 과부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간절히 구원을 원하죠.


검은색은 사악함을 의미할 수 있지만 어둠과 슬픔을 통한 여정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삶을 받아들이고 온화한 희망과 평화의 징조를 위한 공감을 남겨두고 그녀를 둘러싼 슬픔과 사랑을 통합하는 법을 배우고 깨달아 가는 삶의 여정말이죠.

샘이 외로움과 고립의 운명에 자신을 내어 맡기려 할 때 헬렌은 그를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가족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스파이와 암살자의 삶을 영원히 떠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하기 시작하고 인간관계를 통해 구원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37e18-17339520856619-1920.pn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 자기야, 해 질 무렵 석양 속으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운명은 아니야.”

샘이 말합니다.

“하지만 기다렸다가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는 걸 지켜볼 수는 있지.”



RAYE - Bang Bang (my baby shot me down) / 넷플릭스 <블랙 도브> 사운드트랙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블랙 도브>의 마지막 리드의 펜트하우스 소파에 앉아 있는 금발 여성을 알아챘나요? 그녀는 헬렌의 아이들을 봐주던 유모, 마리였습니다.


<블랙 도브>는 공개 전부터 이미 시즌 2 제작이 확정되었습니다. 다시 보고 싶은 배우들도, 알고 싶은 이야기도 아주 많습니다.



VS-Netflix-BlackDovesE6IntheBleakMidwinter-4826-e1734017498916.jpg ⓒ 넷플릭스 <블랙 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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