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프렌티스>는 미국 현 대통령 도널드 J. 트럼프에 관한 영화입니다. 2024년 11월 미국 대선이 치러지기 몇 달 전인 같은 해 5월, 칸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됐고, 몇 달 후인 10월,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상영됐죠.
ⓒ 영화 <어프렌티스>
메가폰을 잡은 알리 압바시는 이란 태생으로 억압받는 이란의 여성을 조명한 <성스러운 거미>를 통해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바 있는 감독입니다.
알리 압바시 감독, 세바스찬 스탠, 마리아 바카로바 ⓒ 영화 <어프렌티스>
<어프렌티스>는 소수자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영화로 이란 정부로부터 갖은 경고와 위협을 받는 감독의 자기 색이 적은 편입니다. 이란 아바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각본을 써두고, 2018년부터 기획된 영화에 감독과 주연이 2023년 합류하며 제작된 거라 기획 영화의 성향이 강하고, 전형적인 전기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또한 이란에서 태어나 덴마크에서 활동하는 감독인 알리 아바시가 이 영화를 감독함으로써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를 영화로 그리는 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각본은 정치 저널리스트 출신의 가브리엘 셔먼이 썼습니다. 미국 폭스뉴스 창립자 로저 에일스의 민낯을 드러낸 시리즈 <라우디스트 보이스>를 만들었죠. 폭스뉴스는 트럼프와도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언론사인 만큼 셔먼의 시선이 로저 에일스에서 트럼프로 향한 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영화가 공개되면서 트럼프 측으로부터 수많은 항의와 협박, 법적 조치를 받은 터라 미국 내 배급사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2024년 8월에야 소규모 배급회사를 통해 10월 개봉을 확정 지을 수 있었죠.
ⓒ 영화 <어프렌티스>
<어프렌티스>에서 가장 빛나는 건 배우들의 호연입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로 우리에게도 친숙하고, <어 디퍼런트 맨>으로 2025년 제82회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세바스찬 스탠이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연기합니다. 또한, 트럼프의 멘토였던 악명 높은 변호사 로이 콘은 미국 드라마 <석세션>으로 제7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정재를 제치고 골든글로브 TV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레미 스트롱이 맡았죠. 트럼프의 첫 번째 아내 이바나 트럼프를 연기한 마리아 바카로바 역시 화면을 꽉 채웁니다.
<어프렌티스>는 다가오는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남우주연상(세바스찬 스탠)과 남우조연상(제레미 스트롱)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이 작품은 미국의 45대, 47대 대통령이자 기업가 도널드 트럼프를 다룬 전기영화입니다. 성공을 향한 야망으로 뭉친 젊은 사업가 트럼프가 뉴욕의 어둠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악마 변호사’ 로이 콘을 멘토로 삼아 발돋움하는 성장영화이기도 하죠. 21세기 들어 리얼리티 TV쇼로 인기를 얻은 기업가가 백악관에 입성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만든 트럼프의 ‘현재’만 보고 있는 우리에게 <어프렌티스>는 그의 ‘과거’를 보여줍니다.
무엇이 트럼프를 건드렸을까?
‘어프렌티스(수습생)’라는 영화 제목은 트럼프가 미국 부동산 거물이자 기업가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결정적 계기가 된 리얼리티 TV쇼 프로그램과도 일치합니다. 트럼프는 이 쇼를 통해 “You’re fired!(당신 해고야!)”라는 유행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도 했죠.
한편, 영화는 로이 콘을 만나 성장하는 트럼프 자체를 ‘수습생’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트럼프가 개인적으로 날뛰며 이 영화 개봉을 막으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영화에는 언제나 자신감 넘치며 상대를 제압하는 ‘현재’의 트럼프가 아닌, 겁 많고 의기소침하며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과거’의 트럼프가 살아 있거든요.
만약 영화가 트럼프의 ‘현재’를 다뤘다면, 아무리 자신을 악랄하게 묘사했다 해도 트럼프는 오히려 이를 자신의 강한 권력자 이미지에 이용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대 자본과 영향력 있는 관계자들을 등에 업은 대형 상업 영화도 아닌 이 영화에 트럼프가 굉장히 예민하게 굴었어요. 영화의 어떤 지점이 분명 트럼프를 건드렸습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초반은 따뜻하고 빈티지한 분위기가 드리운 실내에서 주로 촬영해 필름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로우파이 비디오의 깜빡임과 흔들리는 카메라워크, 리얼리티 TV를 연상시키는 고르지 못한 편집을 선보이죠.
ⓒ 영화 <어프렌티스>
도널드 J. 트럼프의 시작은 ‘리틀 도니’였습니다. 그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보수적인 차별주의자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자랐죠. 트럼프에게 성공이란 곧 ‘이기는 것’을 의미했고, 이로써 아버지의 비웃음을 되갚아주고 싶습니다.
정·재계를 주름잡으며 ‘무조건 이기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로이 콘은 트럼프에게 제2의 아버지이자 멘토가 되었죠.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로이 콘으로부터 트럼프는 사기, 허세, 허영심, 그리고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기는 법을 배우며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트럼프가 되어 갑니다.
한없이 연약한 인물이었던 ‘리틀 도니’는 로이 콘과의 만남을 계기로 자기 내면의 두려움을 폭력과 기만으로 포장해 과시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영화는 트럼프가 변하기 전의 어리숙한 모습과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고, 로이 콘이라는 거물에 의해 괴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집중하죠. 트럼프는 아마도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지배하는 건 결국 트럼프가 아닌 로이 콘이거든요.
ⓒ 영화 <어프렌티스>
아이러니하게도 로이 콘의 특별 과외를 받으며 괴롭힘을 힘으로 착각하고, 권력을 무기로 삼으며, 자신만의 비뚤어진 아집과 믿음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스트가 된 트럼프는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미국 대통령까지 되어서도 여전히 로이 콘에 대한 두려움과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트럼프는 죽어서도 자신을 비롯한 미국 정치 역사에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로이 콘의 검은 그림자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화가 공개되면 트럼프가 제작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거라는 걸 아바시 감독도 충분히 예상했을 겁니다. ‘항상 소송을 제기하라’라는 트럼프의 인생 지침마저도 로이 콘에게 배운 것이니까요.
‘살인자’가 될 것인가, ‘패배자’가 될 것인가?
트럼프는 70년대 폐허가 된 뉴욕의 부활을 꿈꾸는 야심 가득한 청년 사업가입니다. 카메라워크는 불안하게 흔들리죠. 마치 렌즈 뒤에 사람이 대낮 뉴욕의 도심 한복판에서 강도를 당하거나 칼에 찔려도 놀랍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고담 시티에 등장한 조커와 펭귄처럼 트럼프와 로이 콘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도시를 접수하며 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를 맞이합니다. 큰돈을 벌기 위해선 도덕성이 부족한 것을 찬양하던 시대 말이죠.
로이 콘은 당시 뉴욕을 주름잡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정기적으로 파티를 엽니다. 실제로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 뉴욕 나이트클럽 ‘스튜디오 54’에서 파티를 열어 바바라 월터스, 앤디 워홀, 로널드와 낸시 레이건을 포함한 유명 인사들과의 친분을 자랑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마피아 보스부터 예술가까지 가리지 않고 변호를 맡았죠. 영화에서 트럼프는 이 파티에서 앤디 워홀을 마주치지만,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선 예술이나 사업이나 ‘돈’이라는 공통점을 겨우 찾아냈을 뿐이죠.
스탠은 영화에서 트럼프의 움직임과 표정을 완벽하게 표현합니다. 과장하거나 희화화하지 않죠. 대신 불안하고 흔들리는 영혼으로 트럼프를 그립니다. 트럼프는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전혀 모르고, 주차된 차 유리창 앞에 멈춰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죠.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기도 하고요. 미디어와 이지미 정치의 힘으로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가 된 트럼프도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실제 로이 콘과 트럼프 ⓒ 게티이미지
스트롱은 로이 콘을 황홀하게 연기합니다. 절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상대를 독사처럼 노려보며 조련하는 로이 콘은 ‘리틀 도니’에게 비싼 정장을 사주며 왜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지 알려주고, 언론을 장악하는 법을 가르치며, 훗날 트럼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다양한 문장과 태도를 가르칩니다.
로이 콘은 세상 사람들을 단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합니다. 살인자, 아니면 패배자. 말 그대로 그는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리고 트럼프 안에 숨겨진 그와 비슷한 기질을 알아본 거죠.
로이 콘은 오늘날 트럼프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사람들을 괴롭힐 때 여전히 사용하는 게임의 법칙을 전수합니다. 첫 번째 규칙, 공격하고, 공격하고, 또 공격할 것. 두 번째 규칙, 절대 아무것도 인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부인할 것. 세 번째 규칙,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말고, 승리를 주장할 것.
‘리틀 도니’는 갓 부화한 병아리가 어미를 각인하듯 로이 콘을 응시합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트럼프는 이 게임의 법칙을 이방카를 유혹할 때나 자신의 가족에게 그대로 적용합니다. 트럼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몇 편 봐도 그가 실제로 능력 있는 사업가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는 매번 큰 위기 때마다 실패를 부정하고 성공을 우겼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피해자가 생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죠. 그는 로이 콘으로부터 배운 이 세 가지 게임의 법칙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그대로 실천하는 중입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결국 트럼프는 로이 콘의 지혜를 통째로 삼켜 자신의 개성으로 만듭니다. 트럼프와 로이 콘, 두 남자 사이의 권력 교환이 이뤄지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달려갑니다. 트럼프는 친근하고 다정했지만, 술과 약물을 과용했던 친형 프레드 주니어의 죽음을 상실의 그림자 한 점 없이 그대로 지나칩니다. 트럼프 내면의 이런 잔인함을 로이 콘은 일찌감치 알아봤고, 한때 세상을 모두 가졌던 남자, 로이 콘은 시간이 흘러 자신이 알아보고 물과 비료를 주며 키운, 트럼프의 그 잔인함으로 인해 더 끔찍한 모멸과 고통을 당합니다. 로이 콘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트럼프의 탐욕과 잔인함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거였죠. 더 이상 권력이 없는 그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동정심이 들진 않습니다. 이 영화에선 트럼프도, 로이 콘도,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인간화하지 않습니다. 공감의 바탕이 되는 이해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건조하게 인물을 묘사하죠. 이 과정에서 스트롱의 연기는 정말 아름답게 모순적입니다. 그는 여전히 괴물이지만,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괴물이 된 것뿐입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트럼프가 아닌 로이 콘
<어프렌티스>를 지배하는 건 트럼프가 아닌 로이 콘입니다. 그는 무자비하고, 날카롭고, 섬뜩한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또, 그만큼 흔들리는 모순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옷장 속 동성애자이면서도 미국 정부가 동성애자 공무원을 해고하던 시절,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과 함께 성소수자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평생 사람들을 괴롭혔고, 진실을 덮고,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1986년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은 간암이라 주장했고, 동성 연인을 공개 행사에 데리고 다니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죠. 그는 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애정을 말할 때 억눌린 감정으로 눈시울이 젖는 사람인 것처럼 굴지만, 그는 미국인 대부분을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어프렌티스>는 죽은 지 거의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자신이 생전에 그토록 섬기며 사랑한다고 공언했던 조국에 사악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로이 콘의 악마성이 트럼프로 발현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1970년대 폐허가 된 뉴욕에서 만난 트럼프와 로이 콘의 만남은 21세기 미국뿐 아니라 세계 정치를 영원히 바꿔놓았습니다. 평생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두려움이 되어 살기로 작정했던 남자는 또 누군가의 두려움에 기생해 드라큘라처럼 죽지도 못하고 영생을 삽니다. 로이 콘은, 아니 로이 콘의 두려움은 죽어서도 건재합니다. 미국의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건 트럼프가 아닌 로이 콘입니다.
ⓒ 영화 <어프렌티스>
대통령 취임 후 한 달이 안 돼 미국의 일부 국민은 트럼프의 탄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쪽에선 그의 집권 2기를 지지하죠.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어프렌티스>가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할 것이고, 또 어떤 관객들은 충분히 가혹하지 않다고 비난할 겁니다.
미국의 대체적인 반응은 <어프렌티스>가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트럼프가 또다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논란의 여지를 최대한 피해 갔다는 거죠. 진정 사회를 흔들고 미국 대선 전 트럼프에 대한 경종을 울릴 목적이었다면 이 영화를 좀 더 파괴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도록 만들어야 했고, 누구나 다 아는 ‘트럼프는 나쁜 사람’, 그 이상을 말해야 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비겁했다는 거죠.
어쨌든 이 영화가 공개된 후, 트럼프는 또다시 백악관에 입성해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트럼프의 세상에선 이기는 데 진실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로이 콘이 트럼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 또한 후계자에게 게임의 법칙을 알리고 있죠. 어쩌면 이제 미국인 모두가 그의 ‘수습생’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갑자기 드는 의문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 트럼프가 로이 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괴물은 태어나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걸까요?
실제 트럼프와 로이 콘 ⓒ 게티이미지
*<어프렌티스>는 현재 U+모바일tv, 애플tv, 쿠팡플레이, 티빙, 왓챠,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