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사건의 전말, 뱀이 옳았고 하나님은 틀렸습니다..
요즘 창세기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벌써 몇 번째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창세기는 파고 파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무나 유명하여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고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 창세기 3장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세기 3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선 먼저 뱀이 등장합니다
뱀은 인류의 원수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꾀어 타락시킨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비틀어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되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라고 하셨으나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며 말씀을 살짝 왜곡합니다
'마음껏 먹어라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먹지 마라..'와
'아무것도 먹지 마라..'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내용입니다
그런데 뱀의 질문에 하와는 순진하게 대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 아니다.. 다 먹게 하셨고..
다만, 못 먹게 한 것은 선악과 하나뿐이다
그것도 그거 먹으면 우리가 죽을까 봐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변호합니다
사실 뱀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의심하게 해 볼 여지를 만든 것입니다
하와가 한 말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자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
'하나님이 다른 것은 다 먹게 하면서
왜 유독 그 열매만은 못 먹게 하셨을까?'
'정말 너희들을 위해서였을까?'
'정녕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열매를 다 먹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는 뱀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사실 그 열매를 먹어도 너희는 죽지 않아'
'다만 너희도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
너희도 하나님과 똑같이 되는 거야'
'그래서 너희에게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한 거야..'
진정 사랑한다면 아낌없이 주어야 하는데
왜 하나만 남기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논리입니다
뱀에게 설득된 하와가 다시 그 열매를 보니
정말로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만 같은
탐스럽게 생긴 열매였습니다
뱀의 말이 맞다고 확신한 하와는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그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타락시킨
선악과 사건의 전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가 죽었나요?
아닙니다 대신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죽기는커녕 오히려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이고 누가 옳은 것인가요?
뱀이 옳았고 하나님이 틀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뱀이 욕할까요?
왜 하나님이 옳다고 믿을까요?
성경을 읽을 때에는 늘 의문과 질문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저 무턱대고 목사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으니..
아멘 믿습니다.. 하면 안됩니다
내가 가진 답이 왜 답이 되는지
스스로가 납득이 되어야
비로소 그게 의미 있는 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과서의 답을 그저 외우는 것은
초등학생들이 하는 일입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몽학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이끌려 다닐 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답을 내어 놓을 수가 있어야 '자유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답에만 매어 있다면
자유자가 아니라 종입니다
스스로가 각자의 삶 가운데 해석한 말씀이야말로
비록 유일한 답을 아닐지라도
여러분에게 가장 어울리는 답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답을 내어 놓는 일에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선악과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선악과 사건에서 이런 질문에 혼동스러운 것은
선악과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사건의 본질은 '관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은
'상대적' 개념입니다
악이 없다면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그러한 상대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 의미로서의 선을 말합니다
그러면 '절대적 의미'로서의 선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절대적 의미로서의 선은
'하나님'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바로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선'이라는 개념과 '선 자체'를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와 존재물이 다르듯이
선 자체와 선이라는 개념은 다릅니다
제가 가끔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십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 존재 자체가 바로 선입니다
이 말을 조금 달리 표현해 본다면
오로지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에 속하는 것이
그리하여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선이지
어떤 특정 행위를 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선이란
그저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어 선하게 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과 악을 바라봤을 때에야
비로소 선악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선악과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만들어 먹지 말라
금령을 명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는
모두 명령문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도하라
모두가 명령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이 명령문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령문의 형태로 주어지고
이것을 어길 시에는 제재가 가해진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왜 주셨을까요?
그 자유의지를 통해서
관계가 세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핵심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동의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 관계의 핵심은
서로에게 거짓말하면 안 되고..
서로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되고
이러한 금지 사항에 동의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기면 부부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사실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종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관계를 상징하는 그것이 동산 중앙에 떡 버티고 있어서
언제라도 어디서나 우리가 볼 수 있어서
그것을 먹지 말라는 금령을 지키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선악과의 역할이었고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그것을 우선적으로 지키겠다는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고
반면에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태도를 일컬어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곧 악입니다
그래서 사실 창세기 선악과 사건은
우리의 구원이 어떤 모습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바로 구원입니다
즉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상태,
분별은 하되 판단하지 않는 마음 가짐,
남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의 태도가
곧 구원을 이룬 상태라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제목을 부끄러움이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이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은 남을 전제로 한 개념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나의 벗은 몸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벌거벗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보다 근원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인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가리거나 숨는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서로를 남으로 인식하게 된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한일은 몸을 가리고 숨는 일이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과 하와가 숨은 이유는
하나님마저도 남으로 여기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의식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낀 인간이
두 번째로 한 일은
변명과 핑계입니다
변명과 핑계란
남에게 탓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 또한 남을 전제로 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와 남의 구분하는 것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입니다
원죄를 지닌 인간의 한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남을 남으로 밖에는 바라볼 수 없는
원죄를 지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웃이, 남이 근원적으로는 아담 아래 한 몸이었음을 깨닫고
이웃을 남이 아닌 나처럼 여기고
형제요 자매처럼 여기고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육체를 지닌 채
이 땅 가운데 누릴 수 있는 구원받은 삶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말미에는
가죽옷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성경 학자들이 이 구절을 들어
원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하고
이 죽음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로 가죽옷은
‘케토네트 오르’라고 합니다
케토네트는 옷을,
오르는 피부, 가죽을 뜻합니다.
때문에 가죽옷을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피부를, 동물의 가죽이 아닌 피부를 덮는 옷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대충 가려 만든 옷을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재단하여
몸에 맞게 완전한 옷으로 만들어 제대로 입혔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이럴 경우 가죽옷을 신약의 예수님의 희생으로
연결시킬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저만의 해석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억지스럽게 모든 성경 구절에서 복음을 끌어내기보다는
그저 선악과를 따먹기로 선택한
인간의 선택을 존중한 하나님이
그 인간을 위해 옷을 제대로 만들어 입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악과를 먹기로 선택하였으니...
나와 남을 구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느니...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이왕 그렇게 된 거.. 하시며
손수 옷을 지어 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넷플렉스로 '폭싹 속았수다' 를 보고 있는데
거기 보면 금명이 엄마, 애선이 엄마..
부모의 마음이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자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끝내는 그들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뒤처리를 해주는 부모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자녀 된 우리가 아무리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비록 그 선택으로 인하여
하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하게 되더라고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이왕 그렇게 된 거.. 하며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니 목사들은, 신학자들은
구약에서 예수를 찾으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성경 구절 구석구석에서
예수님을 찾아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어떻게 그 구절에서 예수님을 발견해 낼 수 있냐고
칭송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학자 없이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그저 나를 위해 쓰인 편지 읽듯이
읽어 내며 그 가운데 나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를 나 스스로 찾아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목사나 신학자 들은 단지
우리의 해석을 위해 거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물어보고 참고하는 사람일 뿐이지
그들의 해석과 그들의 말을 마치 하나님 말씀처럼
절대적으로 여기고 정답처럼 여길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선을 행해서 구원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선 먼저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의 모든 피조물을
남이 아닌
나처럼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기계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왜 진리인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왜 진정한 행복이요
참된 즐거움인지를
체험적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단지 소망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