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사망과 이혼은 2순위..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후에
6일째 되는 날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신 내막을 살펴보면
진흙을 빚어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자를 본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하리라
하고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말은..
감탄할 만큼의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 살펴보면
여자는 남자로부터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한 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 온누리 교회에 출석을 했는데
제 기억에 도은미 사모님이라는 분이 가정사역 세미나라는 것으로
한 때 굉장히 잘 알려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미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강의 내용 중에
여자를 히브리어 에제르, 즉 돕는 베필이라고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참신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했고
'돕는 베필' 로서의 여자의 역할, 여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런 세미나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는 여자는 에제르,
돕는 베필이라는 인식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돕는 베필은 말하자면 헬퍼입니다 '도와주는 파트너'입니다
누굴 도와주는가 하면 남자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에제르, 돕는 베필인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사도 바울 또한 서신서에서
돕는 베필로서의 여자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명확히 정리해 줍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제가 신학을 공부하며
헬라어로 쓰인 신약 성경을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제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에제르는 물론 도움이나, 도와주는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도움은 그저 보조적인 도움이 아닙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도우미 정도가 아닌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극히 중요한 이라는 뜻이 강하며
이 에제르라는 말은 영어 단어 에션셜의 어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 에제르라는 말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33편 20절에서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할 때
도움이 바로 에제르이고
시편 46 편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할 때의 도움이 바로 에제르입니다
즉 성경 창세기에 표현된 돕는 베필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그저 조력자, 어시스턴트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신약성경의 보혜사 성령, 즉 파라클레토스
성령 하나님에 비견될 만큼 능력 있고 중요한 뜻을 지닌 단어인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창세기에서 여자를 에제르라 했을 때
이는 성령 하나님을 모델로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돕는 베필이란 절대로 단순한 도우미, 헬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아내를 남편을 돕는 베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정작 최초의 부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2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의 이 이야기 바로 밑에는
곧바로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은 서로 한 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거벗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존재가 또 있습니다
엄마와 아기입니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룬 두 개체이기에
서로 부끄러움이 없듯이
엄마와 아기는 본질적으로 한 몸이기 때문에
서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부 사이가 갈라지거나 깨어지게 되면..
자녀들과 이별하게 되면 우리는 누구나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2년 전 그러한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와의 사별 경험입니다
흔히들 트라우마라는 말을 합니다
트라우마 란
정신에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을 뜻합니다
트라우마가 지속되면 여러 가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의 강도에도 순위가 있는데
2위가 자녀를 잃는 슬픔이라고 합니다
자녀 가지신 분들은 충분히 납득이 될 것입니다
특히나 어린 나이의 자녀를 갑작스럽게 잃게 된다면
부모의 마음에는 평생에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를 능가하는 트라우마가 있는데
트라우마 지수 1위는 배우자 잃는 아픔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합니다
이처럼 자녀를 잃는 고통이나 배우자와의 사별의 아픔은
극한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데
이는 공통적으로 가족을 잃는 아픔입니다
가족은 우리가 자신의 팔다리 다음으로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한 몸, 곧 지체입니다
때문에 가족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아니 어떨 때에는 오히려 나 자신의 아픔보다 더욱 강도가 큰 아픔이기도 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자
온라인 예배가 이루어지기 위한 모든 수고를 해오신
김남희 사모님의 투병에 관한 소식입니다
현재 온몸으로 전이된 암 중에서
간으로 전이된 암으로 인해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상황이고
몸에 힘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을 텐데
현재로서는 체력이 많이 약해서
치료가 가능한지도 불확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남편 되시는 이인엽 목사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갑자기 제 머릿속에 23년 전의 일이 떠 올랐습니다
잊힌 줄 알았던 저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습니다
"길어야 3,4개월이니 환자분을 집에 모셔
편하게 여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 바랍니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또렷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23년 전의 저는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젊었고 또한 너무나 신앙이 좋았습니다
당신들이 못한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서실 때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저는 미련 없이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간 아내와 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이미 암 발병 후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제가 다니던 교회와
또 아내가 처녀시절 다녔던 교회에서
수백 명의 성도가 날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통해 기도해 왔고
저 또한 강남 금식기도원에 들어가 방언까지 받으며 기도해 왔던 터라
이번에는 뭔가 좀 더 세게 기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경주 산속에서 신유의 은사로
말기 당뇨 환자와 암환자를 고치시는
목사님이 계시다는 기도원에 찾아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저희와 같이 이미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환자분들이 함께 기거하며 매일매일 목사님의 인도아래
철야 예배와 기도회를 가지며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중의 어떤 분이 그 가운데 제일 젊은 나이인 저희 부부를 아껴주시며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 잘 왔어요 내가 여기 3개월째 있는데
몸이 많이 나아졌고
3개월 있는 동안에 병 고침 받고 나가는 사람 여럿 봤어요
그러니 용기를 내요... 반드시 고쳐 주실 거야..
저희 부부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역시 병든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내의 증상은 악화되었고
신유 은사가 있다는 기도원 목사님 조차도
가망이 없다고 저희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래도 저의 믿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못하시더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후
산속까지 앰뷸런스를 불러
우리 부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를 받아줄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암 발병부터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전도사님의 제안을 받아
그분이 사역하시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늦은 나이에 부름을 받아 신학을 하시고
홀로 주변의 노숙인들을 돕는 그런 사역을 하시는
아주 신실하신 분이었습니다
고려대를 졸업하시고 한국 쓰리엠에서 근무하시던 엘리트셨는데
소명을 받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길거리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노숙자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함께 예배하는 그런 사역을 홀로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갈 곳 없으면 누추하지만 노숙자용 빈 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함께 기도하며 지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보니 철거 직전의 다세대 건물을 임대해
철거되기 전까지 라는 조건으로 교회 겸 숙소로 사용 중이었습니다
그 건물에서 2002년 겨울을 보냈습니다
술에 절어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던 노숙자들이
그곳에서는 그나마 말끔하게 변회 되어
겨울이 되니 전도사님 신세만 지지 말고 뭐라도 하겠다고
군고구마 장수를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구마를 슬쩍 저희 방에
들이밀던 그분들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다시금 희망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참된 교회에 인도해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그 전도사님도 아내의 회복에 확신을 가지셨고
저 또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내의 회복을 믿었습니다
정말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날마다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아내와 저는 당시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회사 광고팀에 저는 해외 영업부서에서..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병이 나으면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부부가 사역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서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직금은 기쁜 마음으로 노숙자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저희의 헌금 덕분에 노숙자 교회는
철거 직전의 건물에서 나와
근처 상가 건물 2층을 리모델링해서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왕 리모델링하는 김에 아내가 침상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예배실 뒤에 커다란 유리 통창이 있는 방을 하나 만들어
침상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이 돌잔치도 하고
그렇게 4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아내는 정확히 의사들이 예견해 준 그 시간 그즈음에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미련 없이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데려가실 바엔 그냥 깔끔이 데려가시던지..
차리라 의사 말 듣고 임종을 준비했더라면
고통이 훨씬 덜 했을 텐데..
그놈의 신앙이 뭔지..
지난 1년 동안의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눈물.. 철야기도, 밤샘기도..
신앙으로 버텨야 한다며 진통제를 버리라는 목사님의 권유와
그 목사님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받아들여
이를 악물고 고통과 싸워야 했던 나날들..
밤새 아내의 신음소리를
귀를 틀어막고 옆에서 들어야 했던
그런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저에게 남은 생각은
종교란 이토록 잔인한 것이구나.. 이토록 무섭구나..
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지금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저는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창조주이시고
그저 우리의 섬김의 대상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어떤 대상자, 그렇지만 조금 특별한 대상자로서
어떤 절대적인 '존재'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대상이, 섬김의 대상이
우리의 예배, 우리의 섬김, 우리의 선한 행실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돼
그 기도하는 바가 하나님 선한 뜻에 맞으면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반응이 없으신... 것으로 응답해 추신은..
사랑과 공의의 심판자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어 깊이 하나님에 대해 묵상한 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대상,
어떤 존재물이 아닌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신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라는 유일신만이 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말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전체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나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절대란 대를 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란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하나님은 존재 자체란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존재 자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존재 자체, 하나님, 여호와,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I AM THAT I AM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마치 우리가 유 라는 개념은 알아도
무 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구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편재할 수 있으며
운명론과 예정론이 도대체 뭐가 다른지 명확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그러나 존재물이나 대상이 아닌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의 편재성이나 예정론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이것이 신약의 그 유명한 '주안에서'라는 말인데)
주안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2,30년 후 맞이 하게 될, 어쩌면 그 보다 더 빨리 맞이하게 될
우리의 육체적 죽음은
'주 안에' 있는 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사별의 트라우마를 겪은 후
그 아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이라는 대상에 대한 신앙은
오히려 저의 신앙에 커다란 해악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들고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제가 그 아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이 흐른 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에 있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는 신앙이
뭐가 다른가 하실 분도 있겠지만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차이를 못 느끼겠지만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차이입니다
섬김의 대상,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여전히 나에게는 남입니다
제 기도를 혹시 들어주실지.. 안 들어주실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만 기뻐하실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존재 자체로서의 하나님은
나와 동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에는 나뉨이 없고
그 하나님에 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니 그러한 이해만이...
죽음이라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있는 사람만이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며 죽음을 꾸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모님 안부에 관해 목사님과 통화하던 중
저는 사모님이 그래도 의학적으로 얼마간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의 목소리가 너무나 평온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화 끝에 알게 된 사실은
이미 암세포가 전신으로 퍼졌고
항암 치료를 해도 그 결과를 확신할 수 없고
더욱 문제는 그 항암 치료를 받을 체력을 회복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 부부는 씩씩하게 신앙으로 잘 견디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일로 인해 교회에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사님의 목소리는
담대했습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이렇습니다
자신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지도 모르는 고통까지도
성도들 앞에, 하나님 앞에, 신앙을 위해
인내하고 참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픔, 그 심정이 어떠한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목사님 그게요... 그 슬픔과 아픔이 참아진다고 참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거요..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요 목사님.. 괜찮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2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무너질 때가 있어요...
그제야 목사님이 무너지셨습니다
평온한 목소리는 간데없고 울먹이셨습니다
아내가 아픈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보험료 낼 형편이 안되니
조금 더 열심히 일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지 하고 버텼는데
이렇게 되었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무너지셨습니다
저는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지금은 목사님이 교회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
교회가 목사님을 위로할 때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도대체 왜? 왜요 하나님
제가 뭘 잘못해나요 하고 따지시고
울부짖으셔도 됩니다..
제발 제발 교회 걱정하지 마세요...
아픔은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흔한 오해가
신앙의 힘으로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픔과 고난과 슬픔과 환난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에게는 죄송합니다
한 때 저의 신앙은 그랬습니다
신앙이면, 온전한 믿음이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픔은 시간이 흘러야 사라지는 것이지
기도하면 뿅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겪어보니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마치 길가에 흰 눈 덮이듯 그저 덮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길이
눈이 녹으면 그대로 있듯이
마음속에 생긴 트라우마의 기억은 몇십 년이 흘러도
언제든 여건만 되면 생생하게 다시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삶 가운데 마주치는 이러한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트라우마에 대해서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제가 내린 결론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마주치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우리 신앙인의 몫은
그 희로애락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쁠 때 즐거워하고
슬플 때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울 때 울부짖는 것이 우리의 몫이란 말씀입니다
삶 가운데에 희로애락이 있는데
희와 락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노아 애는 사탄이 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진실은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아래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환난 가운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에게는
참 무정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그저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통당하고 있는 그 시점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두 인생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모든 인생은 평균을 내면
그 가운데 희로애락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느끼는 희로애락과
한낱 저의 인생의 희로애락이 평균을 내어보면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공평함이고 공의입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어서 인생의 쓴맛을 하나도 경험하지 못한 아이와
90세까지 장수하며 인생의 고달픔을 모두 느낀 할머니의
인생가운데 누리는 희로애락이 동일하다는 것이고
죽은 자와 산 자가 주 안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김남희 사모님의 병나음을 위해 기도를 못하겠습니다
목사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비난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신물이 나도록
지쳐 쓰러지도록 아내의 병나음을 위해 기도했다가
실족했던 저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니 양해 바랍니다
저는 이 시간 다만 목사님과 사모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깨달음으로 인한
평안함을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기적처럼 낫게 해 주시면 너무나 감사하지만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에게 너무나 쉬운 일일 수 도 있지만..
병 나음보다 더욱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번 이 일로 인해
우리 좋은 친구 교회 성도들이
그저 기도하고 예배하고
대상으로서 섬겼던 하나님이 아니라
근본이시고 영원하시고 알파와 오메가 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고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앎과
그 하나님이 나를 지체로 여기시며
아니 지체보다 더 귀한 자녀로 삼으신 분이라는
그 앎으로 인해
우리 또한 참된 신앙을 누리는
자녀들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