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희곡
"이 노래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봐요"라는 프로듀서 릭 처토프의 말을 듣자 할머니와 이모,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 책 <신디 로퍼> 中
등장인물
미영(60)
선재(30) 미영의 딸.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때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날
곳
미영의 집
거실에는 TV가 있고, 오른쪽으로 화분이 몇 개 놓여있다.
거실 한가운데에 캐리어 가방이 세워져 있다.
왼쪽으로 부엌이 있다. 부엌은 전체가 보이진 않는다. 냉장고만 겨우 보인다.
미영이 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는 캐리어 가방이 세워진 쪽으로 간다.
캐리어 가방 손잡이를 잡아본다. 잠시 멈칫하더니, 손잡이를 길게 빼본다.
그때, 미영이 들어온 곳 반대쪽에서 선재가 나온다.
선재 : 왔어?
미영 : (화들짝 놀라서는) 이걸 왜 여기다 놔뒀어. 정신 사납게.
미영, 물건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한다.
선재 : 뭘 그렇게 많이 샀어?
미영 : 많긴 뭐가 많아.
선재 : 조금만 하라니까. 나도 없는데.
미영 : 아이고, 안 많네요. 연휴 내내 먹을 건데 이 정도는 사야지.
선재 : (장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며) 동태전 해?
미영 : (선재가 들고 있는 물건을 가져가 냉동실에 넣으며) 네 아빠 좋아해. 너나 싫어하지.
선재 : 엄마도잖아.
미영 : 네 고모도 좋아해.
선재 : 고모도 줘?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많지. 왜 그래? 하여간 엄마는 일을 사서 하더라.
미영 : 아이고, 내가 알아서 해. 정신 사나워, 나와! 넌 가서 네 짐이나 싸.
선재 : 어제 다 싸고 잤거든.
미영 : 한번 더 확인해. 또 뭐 놓고 갔다가 포로록 다시 오지 말고.
선재 : 놓고 가면 그냥 거기서 사면 돼.
미영 : 돈도 쌨다. 살 생각하지 말고 한번 더 챙겨.
선재, 캐리어 가방을 열어본다.
선재 : 맞다. 돼지코. 저번에 어디다가 뒀지?
미영 : TV 아래 서랍 찾아봐.
선재, TV 아래 서랍을 열고 돼지코 어댑터를 찾는다.
미영 : 몇 시에 나간다고?
선재 : 나 이따 두 시간 후에.
미영 : 저녁은.
선재 : 가서 사 먹게.
미영 : 먹고 가. 뭘 또 사 먹어, 반찬 다 있는데. 엄마가 된장국 데워줄게.
선재 : 시간 애매해서 그래.
미영 : 아니면 지금 먹고 이따 간식 같은 거 사 먹던지.
선재 : 그냥 사 먹는다구.
미영 : …아빠는. 자?
선재 : 몰라.
미영 : 밥은 먹디?
선재 : 아까 내가 차려줬어.
미영 : (목소리를 작게 하며) 지겨워. 지가 챙겨 먹으면 되지 꼭 챙겨줘야 먹냐. 그것도 오늘 여행 가는 딸한테. 하여간 대접받긴 텄어. 에휴 지겨워, 내 팔자가 어쩌다가. 친구 따라서 절이나 들어갈걸. 나도 이제 도망갈 거야.
선재 : 갈 거면 지금 가지 뭐하러 추석 음식은 다 하고 가. 지겹다면서 동태전 해주는 건 또 뭐고.
미영 : 어떻게 그러냐.
선재 : 못할 건 또 뭐야. 나랑 같이 갈래?
미영 : 시덥지 않은 소리 하기는.
선재 : 시덥지 않은 게 아니라 진짜로.
미영 : 표도 없이 어딜 가.
선재 : 표 있으면 갈 거야?
미영 : 짐이나 싸.
선재 : 다 쌌다고. 어차피 도망간다며.
미영 : 너 할 일 없으면 밤이나 좀 까주고 가. (냉장고에서 밤이 든 비닐봉지를 꺼낸다)
선재 : 아니 뭐가 문제야. 나도 다 컸겠다, 이제 집안 체면 따지는 할아버지도 없는데.
미영 : (목소리 낮추며) 네 아빠 들어.
미영은 거실에서 신문지를 하나 꺼내고는, 밤을 까기 시작한다.
선재 : 줘. 나보고 까라며.
미영 : 됐어. 2시간 뒤에 나간다며.
선재 : 밤 까는데 2시간이 걸려, 1시간이 걸려.
선재가 미영에게 밤을 뺏어 까기 시작한다.
선재 : 내 친구들은 다 사 먹는대.
미영 : 그래, 요즘 누가 이렇게 하냐. 엄마도 안 하고 싶어.
선재 : 설날부턴 우리도 그냥 사 먹자.
미영 : 봐서.
선재 : 또 그냥 만들어 먹겠네.
미영 : 사 먹는 건 맛없어. 돈만 아깝지.
선재 : 돈 아끼려다 힘들어 죽겠어.
미영 : 이리 내! 너 안 시켜. 내가 다 해.
선재 : 그 뜻이 아니잖아. 내가 한다고.
미영 : 됐다고. 팔자에도 없는 짓 하지 말고 여행 갈 준비나 해.
선재 : 엄마야 말로 팔자에 없는 짓 좀 하지 마.
미영 : 뭐?
선재 : 동태전 하나 사 먹는다고 안 죽어. 다시는 안 한다, 안 한다 말로만. 그래 놓곤 허리 아프다 그러고.
미영 : 그럼 나는 허리 아프다고도 못 하냐?
선재 : (한숨) 됐어, 엄마랑 무슨 말을 해.
미영 : 나도 알어! 동태전 하나 사 먹는다고 안 죽는 거. 그런데 나는 몇십 년을 반대로 알고 살아왔어. 이제 안다고, 그게 쉽게 움직여져? 너도 뭐야, 다섯 살 때부터 손톱 쥐어뜯는 버릇 그거 아직 못 고치고 있으면서.
선재 : …
미영 : 가 빨리. 준비 다 했으면. 사람 속 그만 뒤집어 놓고.
선재, 아까 나왔던 곳으로 들어간다. 쿵-하고 문 닫는 소리가 난다.
미영은 계속 밤을 까고 있다.
미영 : 지지배. 잘난 척은.
한참 밤을 까던 미영이 선재의 캐리어 가방을 본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캐리어 가방 이 있는 쪽으로 간다. 캐리어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 길게 뺀다. 아까와 달리 행동에 자신감이 붙었다.
미영, 캐리어 가방을 끌고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움직임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행동도 조금씩 커진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선재가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나온다.
미영의 움직임도 멎는다.
미영 : (다시 앉아서 밤을 까며) 밖에 추워.
선재 : 일본 따뜻해.
미영 : 공항까진 한국 아냐? 몰라, 네 맘대로 해! 가다가 엄마 말 들을 걸 후회하지.
선재, 가디건을 벗으며 다시 아까 나왔던 곳으로 들어간다.
잠시 뒤 가디건보다 두꺼운 외투를 입으며 나온다.
캐리어를 끌고, 미영이 처음 나왔던 곳으로 간다.
미영 : (쳐다보지도 않고) 내년부턴 안 해.
선재 : …
미영 : 진짜야.
선재, 집 밖으로 나간다.
미영은 계속 밤을 깐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