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Track4.
등장인물
경자
난희
상현
때
1968년 10월 1일
곳
종로 3가에 있는 경자의 방
1968년 10월.
라디오와 신문에서는 작년에 개관한 세운상가 ‘나’동의 아파트 분양 공고와 이번 10월에 준공될 세운상가 ‘다’, ‘라’동의 공사 소식이 나온다. 또한 낙원동에서도 주상복합건물 낙원상가가 건설 중이다.
멀리서 건물 허무는 소리가 들린다.
사위가 밝아지면, 경자가 이삿짐을 싸고 있다.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경자의 표정이 구겨진다.
방 한 켠에 놓여있는 전축으로 걸어가, 신경질적으로 음악을 튼다.
경자 : 하루종일 부수고 또 부수고.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경자, 다시 이삿짐을 싸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경자를 부른다. 난희다.
난희 : 경자야, 안에 있어?
경자 : 어. 들어와.
난희가 경자의 방에 들어온다.
경자, 난희의 얼굴을 보고는 음악을 끈다.
경자 : 울었어? 왜?
난희 : 미경이 없어. 고향 내려간다고 아침 일찍 떠났대.
경자 : 그러니까 내가 어제 가보라고 했잖아.
난희 : 안 내려간다 했단 말이야! 어떡해 내 곗돈…. (울먹인다)
경자 : 걔 고향이 어딘데.
난희 : 어디랬드라. 뭐 어디 멀리서 왔댔는데. 몰라, 어떡해 나 이제.
경자 : 진정 좀 해봐. 운다고 답이 나와?
난희 : (울음 그치며) 경찰한테 말해볼까?
경자 : 퍽이나 도와주겠다. 지금도 포주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는데. 뭐? 빚을 면제해줘? 직업을 알선해줘?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어.
난희 : 왜 하필 지금이야. 없애려거든 한 달 뒤에나 하지. 그땐 내 차롄데.
경자 : 그냥 잊어. 잊고, 다시 벌어. 그게 빨라.
경자, 다시 짐을 싸기 시작한다.
난희, 그런 경자를 보고는
난희 : 너도 뜨게? 버텨본다며.
경자 : 여기저기 부서 재끼는데 다음은 내가 될지 누가 알아.
난희 : 어디로 가게.
경자 : 종암동.
난희 : 미아리? 거기로 많이들 간다더라.
경자 : 넌.
난희 : 몰라. 어디 숨어 있을 데 없나. 오늘 당장 가는 거야?
경자 : 봐서. 너 이거 비밀이야. 나 아직 포주한테 갚을 돈 남아 있단 말야.
난희 : (전축을 가리키며) 저거라도 팔아.
경자 : 싫어. 가지고 갈 거야.
난희 : 뭐? 너 포주 모르게 튀어야 한다며. 저거 가지고 어떻게 튀게.
경자 : (보자기로 전축을 싸기 시작한다) 슈퍼집 자전거 있잖아.
난희 : 미아리까지 실어다준대? 웬일.
경자 : 아니. 그냥 자전거만 좀 쓰는 거야.
난희 : 너 설마 훔친 건 아니지?
경자 : 잠깐만 쓰는 거라고.
난희 : 그게 그거지. 너 몇 명한테 쫓기려고 이러냐.
경자 : 그럼 도망가는데 여기저기 말 흘리면서 가? (전축을 칭칭 감은 보자기를 신경질적으로 풀며) 아휴 코딱지만 해가지고. 뭐를 쌀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집어던진다)
난희 : 이 큰 걸 자전거로 퍽이나 옮길 수 있겠다. 나와봐. (이불을 들어 전축을 쌀만한지 대충 크기를 가늠한다)
경자 : 오, 너 아직 머리 안 죽었다?
경자와 난희, 이불로 전축을 싸기 시작한다.
이불로 완전히 다 싸지지 않는 부분은 보자기를 가지고 싼다. 어설프지만 전축이 완전히 가려진다. 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경자 : 이제 옮기자.
난희 : 어?
경자 : 뭐해 빨리, 저쪽 잡아.
난희 : 너는 진짜… (전축을 드는데 무겁다) 어우, 이래가지고 미아리까지 가겠냐. 다 해지겠다, 해지겠어.
경자 : 똑바로 들기나 해.
난희 : 어우 난 못 해. 그냥 팔아. 밖에 침대며 화장대며 사러 온 사람들 천지잖아.
경자 : 내가 이걸 얼마 주고 샀는데 헐값에 팔라고?
난희 : 그러니까 무슨 전축은 전축이야. 여기에 천년만년 뿌리내리고 살 것도 아닌데.
경자 : 곗돈 날린 주제에 말이 많아.
난희 : …(경자를 노려본다)
경자 : …뭐.
난희, 방 밖으로 나가려 한다.
경자 : 야! 도와준다며!
난희 : 너 똑똑하니까 혼자서 잘 해봐.
난희, 방 밖으로 나간다.
경자, 자신의 입을 친다.
혼자남은 경자는 전축을 밀어서 옮겨보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힘껏 전축을 밀어본다.
그때, 누군가 경자를 부른다. 상현이다.
상현 : 계세요?
경자 : 누구세요?
상현 : 럭키 전축상에서 왔는데요.
경자 : 럭키 전축이요? (문을 살짝 열며) 얼마 전에 돈 줬잖아요. 어라? 매번 오던 아저씨랑 다른 사람이네?
상현 : 오늘은 저희 직원대신 제가 왔습니다.
경자 : 사장님이세요? 무슨 일이신데요?
상현 : 몇 달 전에 전축사셨죠? 월부로.
경자 : 네 그런데요?
상현, 고개를 들이밀어 경자의 방을 살피려 한다.
경자 : 왜 그러시는데요.
상현 : 여기 없어진다면서요.
경자 : 그런데요.
상현 : 아직 전축값 한참 남았잖아요.
경자 : 그냥 본론만 말해요.
상현 : 그러니까, 회수하러 왔다고요. 내 전축.
경자 : 네?
상현 : (경자의 방으로 들어오려 하며) 어딨어요, 내 전축?
경자 : (문을 붙잡고 상현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잠깐만요 내 전축이라뇨? 저한테 팔았잖아요. 그럼 내 전축이죠.
상현 : 돈 다 안 냈잖아요.
경자 : 아니 그럼 내가 4개월동안 다달이 낸 건 돈이 아니에요?
상현 : 짐 싸놓으셨네. 그쪽도 어디 다른 데로 가시나 봐요.
경자 : 어딜 봐요. 내가 어딜 가는 거랑 아저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상현 : 상관있죠. 전축값을 날리게 생겼는데.
경자 : (헛웃음친다) 사장님. 사장님 돈 안 떼어먹어요. 걱정 마세요.
상현 : 그걸 어떻게 믿죠?
경자 : 저 결혼해요. 요 몇 년 나한테 푹 빠진 남자가 한 명 있는데, 여기 없어진다고 하니까 그냥 같이 살림 차리자 그러대? 요 근처에 신혼 방 얻었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요. 그럼 가세요.
경자, 문을 닫으려는데 상현이 막는다.
경자 : 왜요, 또.
상현 : 가져가야겠는데, 내 전축.
경자 : 사장님, 내 말 못 알아들었어요? 전축값 드린다구, 안 떼어먹는다고.
상현 : (문을 꽉 붙들고는)…
경자 : 나와요. 나 바빠.
상현 : (문을 더욱더 꽉 붙잡는다)…
경자 : (한숨) 어차피 전축 가져갈 수도 없어요. 이미 다 옮겨버렸어.
상현 : 옮겼다고?
경자 : 내가 말 했잖아, 신혼 방 얻었다니까? 정 못 믿겠으면 주소랑 우리 집 그이 이름, 일하는 곳도 적어드릴게요.
상현,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건넨다.
경자가 주소랑 이름을 적는 사이, 상현이 경자를 살짝 밀치고 방으로 들어간다.
경자, 놀라서 상현의 뒤를 따라 들어간다.
경자 : 뭐예요 진짜, 남의 방에!
상현, 이불보로 둘둘 쌓인 물건에 눈이 간다.
상현 : 저건 뭐야?
경자 : 내 짐!
상현, 이불 보를 풀려고 한다.
경자 : 왜 이래요 진짜. 전축 보냈다니까?
상현 : (이불보 매듭을 푼다)…
경자 : 왜 남의 짐에 함부로 손을 대는데? 나 경찰 부른다?
둘은 실랑이한다.
경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상현이 이불보 매듭을 푼다. 전축 일부가 드러난다.
상현 : 내 전축.
경자 : …
상현, 전축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경자 : (상현 앞을 가로막으며) 저기요, 잠깐만요.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요. 미안해요. 거짓말 한 건 내가 정말 잘못했어. 갑자기 전축을 가져간다니까 놀라서 나도 모르게.
상현 : 나와. 무거워.
경자 : 전축값 때문이라며! 나 지난 4개월 동안 전축값 밀린 적 없어요. 나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향 집에 꼬박꼬박 돈 보낼 필요도 없어서
상현 : (말 끊으며) 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 시작부터 거짓말이었는데.
경자 : (이삿짐 속에서 숨겨놓은 손목시계를 꺼낸다) 여기 이거. 비싼 거예요. 응, 비싼 거랬어. 날 못 믿겠으면, 얠 담보로 가져가면 되잖아요. 네?
상현 : (시계를 보며 고민한다) 못 믿어.
경자 : (문을 막으며) 그럼 내 돈은! 4개월 동안 가져간 내 돈. 그거 내놔요.
상현 :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경자 : 이건 사기지. 돈도 가져가고 전축도 가져가겠다고? 이런 법이 어딨어!
상현, 무시한다.
경자 : 나 경찰 부를 거야. 오면서 봤지? 지금 여기 경찰 쫙 깔린 거?
상현 : 불러. 니들 말을 누가 듣는다고.
경자, 전축을 잡는다.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 하지만 전축은 끄떡도 하질 않는다.
경자는 상현에게로 달려가, 상현의 팔을 물어 뜯는다.
상현은 고통에 소리치며 손에 있던 전축을 놓친다. 굉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전축.
상현은 두 팔로 경자를 거칠게 밀친다. 바닥에 나뒹구는 경자.
상현 : (경자의 멱살을 잡으며) 이게 미쳤나.
경자 :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상현을 노려본다) 네가 시작했어. 니네가 먼저 시작했다고!
상현 : 이게 진짜. (경자의 뺨을 친다) 불쌍해서 좋게 대해주려 했더니.
경자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고이고,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상현, 바닥에 떨어진 전축을 살피러 간다. 전축을 살피다 쌍욕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다시 경자에게로 향하는데,
경자, 그런 상현을 보고는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진다.
하지만 허공을 날던 물건들도 상현을 막지는 못하고.
상현, 경자를 발로 차기 시작한다. 경자는 상현의 발길질을 온몸으로 막다가, 안 되겠는지 상현의 다리를 물어뜯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상현이 소리를 지르고 때려도 놔주지 않는다.
상현의 폭력이 멈추고 나서야 경자는 상현을 놓아준다.
상현은 이상한 사람한테 단단히 걸려들었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쩔뚝거리며 경자의 방을 빠르게 나간다.
사이.
다시, 멀리서 건물 허무는 소리가 들린다.
경자가 전축으로 가 음악을 튼다. 음악이 재생되지 않는다.
경자는 고장 난 전축을 하염없이 보다가, 아까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건물 허무는 소리가 경자의 방으로 계속 들어오고,
경자는 그 소리를 뒤덮으려는 듯 크게, 더욱 크게 노래를 부른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