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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안하나이하나 Feb 08. 2022

이제야 비로소 가족을 본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들은 한 가정을 꾸리는 가족이 된다. 사십 년도 전에 엄마와 아빠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아이라는 뜻에서 '하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우리는 '하나네'라 불리는 가족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엔 내 또래 아이들이 대여섯은 있었는데 외동은 나뿐이었다. 친구들은 외동이라 방이 두 개인 나를 부러워했다. 책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던 엄마는 청계천 중고 책방에서라도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사서 책장에 채워주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딱히 못 먹은 기억도, 누군가와 나눠먹어야 하는 걱정도 없었다. 친구들이 그런 걸로 형제자매와 싸우거나 마음에 담아둔다는 것도 외동인 나는 잘 몰랐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엄청 넉넉했던 건 아니다. 중학생 때 그 시절 유행했던 리바이스 청바지가 너무 갖고 싶어서 엄마와 함께 할인매장에 갔다가 너무 비싸서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던 길에 울음을 터뜨렸던 적이 있다. 나를 미안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마음 한편 이 아려온다.)



 가지런히 머리를 빗어 넘겨 묶어주는 엄마의 따뜻한 손길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일 때문에 지방에 있던 아빠가 주말에 올라올 때면 우리 가족은 심심치 않게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갔다. 그야말로 나는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 새싹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쑥쑥 자랐다. 엄마가 언제나 오냐오냐 한건 아니어서 친구들이 '넌 외동이라 좋겠다'라고 할 때면 나름 좀 억울할 때도 있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엔 그게 넘치는 사랑인지도 모르고 그저 받기만 하다 나이가 좀 드니 안다. 온전히 나를 향한 엄마 아빠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인생에 정말 공짜는 없는가 보다. 어릴 때 넘치도록 사랑을 받은 탓인지 이 생에서 엄마와 나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한 시간 24년, 그리고 엄마 없이 지낸 세월이 벌써 15년...이 되었다. 넘치도록 받은 사랑의 대가라면 너무나 가혹해서 도로 무르고 싶지만 현실은 그럴 수도 없고 부정해도 바뀌는 건 없다. 김훈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픈, 이제는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닌 풍화된 슬픔을 가슴에 품고 산지 오래되었다. 늘 그리운 엄마지만 서른 후반에 접어든 요즘,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서른 초반까지는 친구들이나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밀려오는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쳤다. 중반에는 애인들에게 마음을 쏟고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외로움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서른여덟 끝자락에 이별을 했다. 혼자가 되어 주변을 보니 어느덧 대부분의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 자신들만의 가정을 꾸렸다. 전처럼 편히 연락할 친구도 몇 남지 않았다. 칠십 초반, 유일한 가족인 아빠의 시간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이내 혼자가 되었다는, 될 거라는 불안과 두려움이 폭풍처럼 몰려와 나를 흔들어놓는다. 한차례 마음속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면 나는 바싹 마른 낙엽처럼 갈 곳을 잃고 나뒹군다. 이러다가 지나가는 누군가의 발에 밟히고 바스러져 내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싶다.



 서른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대한민국 며느리라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결혼 제도를 용인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자신감을 빙자한 오만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를 더 알고 보니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럴 수 있겠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짝을 만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물론 주변에 멋진 싱글의 삶을 사는 친구와 언니들이 있긴 하지만 난 그들과 다르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겐 그만한 용기와 배짱과 돈이 없고 형제자매도 없었다. 깊숙이 넣어두고 외면하려 했던 외로움만 가득 남았다. 인생은 누구나 혼자고 외로운 거라지만 외동인 나는 조금은 더 외롭다.



 슬프게도 영원한 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변 상황들이 변하고 사랑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나도 변했다. 내 생각과 가치관들은 쉬이 변치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을 반성한다. 나는 무섭고 두렵다. 이삼십 대에 치열하게 고민하며 다져온 내 생각과 가치관들마저 변한 지금, 앞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믿을 수 있을까 싶어 무섭고 두렵다. 서른아홉에 길을 잃은 것 같다. 잘못 든 길은 후진해서 나가면 되는데 후진을 하기엔 조금 멀리 온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불혹은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나이라고 한다. 나는 불혹을 앞두고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흔들리고 있다.



 나이도 나이이지만 요즘 같은 코시국엔 가족이 더 그립다. 사람들도 마음대로 못 만나고 집에서 홀로 노트북만 마주한 채 일을 하다 보니 이별 후유증에 코로나 블루까지 겹쳐 우울의 끝을 내달리고 있다. 엄마, 아빠, 나 그리고 우리 반려견 보리, 여래, 장금이. 여섯 식구가 함께 했던 가장 완벽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그립고 따뜻한 시절이었다. 아빠와 단둘이 남은 지금의 우리 집은 늘 고요하다. 나는 그 적막감이 싫어서 항상 거실 TV와 불을 켜 둔다. 가족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조용히 있고 싶은데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없어서 독립을 하고 싶다거나 집을 잠시 떠나 있고 싶단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저 웃고 만다. 사실 나는 그 북적댐이, 가족의 온기가 너무 부럽고 그립다. 티격태격하면서도 누구 하나 사고가 나면 우르르 몰려가는 가족이 부럽고, 같이 사네 못 사네 하면서도 연휴엔 함께 놀러 가는 가족이 부럽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전화를 돌리고 돌려 한곳에 똘똘 뭉칠 가족이 부럽고, 누구 하나 죽으면 함께 부둥켜안고 울어줄 가족이 부럽다. 생각해 보면 엄마, 보리, 여래, 장금이까지... 우리 가족은 여섯이나 되었는데 그중 넷이나 너무 빨리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내 마음에 예쁜 꽃을 피워놓곤 그 넷은 돌아오질 않는다. 이제는 꽃도 시든 지 오래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시린 바람만 분다. 나는 예전의 따뜻했던 바람과 예쁘게 활짝 피었던 꽃을 그리며 추억으로 산다.



 설 연휴 내내 좀 많이 지치고 외로웠다. 아빠의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아 다음 주 재검을 앞두고 마음이 편치 않다. 아빠와 함께 엄마와 보리, 여래, 장금이가 있는 절에 가서 눈 내린 뒷산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왔다. 이제 내 곁엔 사랑하는 엄마도 보리, 여래, 장금이도 없다. 대신 엄마 차례상에 올리라며 전을 부쳐준 친구 엄마와 그걸 갖다주러 남양주에서부터 와준 친구가 있었다. 혼자 엄마 차례 준비하느라 애썼겠다며 날 위해 기도해 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유일한 가족, 아빠가 있다. 없지만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들은 한 가정을 꾸리는 가족이 된다. 엄마와 아빠, 내 친구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겪은 듯한 이 과정들이 내겐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나도 이젠 남들처럼 짝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따뜻한 내 가정을 꾸리고 싶다. 엄마, 아빠, 나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웃고 울었던 것처럼, 보리, 여래, 장금이가 있어 더 행복했던 것처럼... 가족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고 비로소 가족을 본다. 내 곁에 남은 유일한 가족과 함께, 나를 지켜보고 있을 가족을 그리워하며 서른아홉 번째 새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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