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늘 강의를 들은 후 노트에 배운 것들과 그에 대한 생각을 적곤 했는데 복습 노트는 다 쓰면 버리다 보니 조막난 생각들 또한 버려지는 것이 아쉬워 학습 후 쓰던 글을 여기에 쓰고자 한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보니 엉성하고 백지노트처럼 강의 들은 것 중 생각나는 것을 교재 없이 써내려 나가보니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혼잣말과 닮은 사상 정리를 시작해보려 한다.
기나긴 유교와 불교 사상을 마무리하고 도가사상에 들어섰다. 도가사상의 창시자이자 근본이라 말할 수 있는 노자. 그는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서 공자와 비슷하게 당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해 염려하며 문제의 원인을 고민했다. 결국 모든 사상은 문제의 근원을 묻는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유가의 공자도 사회 문제의 원인을 고민하며 사상을 전개해 나갔고, 불교의 석가모니도 삶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모색하며 깨달음에 달한다. 삼국시대, 교종의 통합을 주장하던 원효의 일심, 화쟁사상 또한 분열되어 다투는 각 종파에 대한 고민 속에 전개된다. 그런 맥락에서 도가가 혼란한 사회의 원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노자는 당시 사회문제의 원인을 '인위적인 분별'에서 찾았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법이라는 이름으로, 문명과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차별하는 세태.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만연한 '혐오'이다. 그렇다면 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분별에서 시작된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 잘못된 것, 심하게는 역겹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이분법적인 사고의 확산이 사태의 본질을 보는 것을 막고, 성급한 판단을 야기한다.
그가 강하게 비판한 '도덕'이라는 것도 그렇다. 유교를 공부하면 챕터를 끝내도 늘 마음에 맴도는 의문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선'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미워하는 '악'이란 절대악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과연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는가. 선악을 호오로 이야기하던 이를 떠올린다. 자칫 위험한 사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 그 말을, 우습지만 어느 정도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정의, 법 또한 그토록 모호한 것이다. 살기 위한 합의.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기준. 그렇기에 늘 의심하고 경계해야 되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호함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을 추방하곤 한다.
노자가 경계한 '인위'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가 말한 무위자연, 자연에 따르는 것이 무욕, 순박, 소박한 삶이라는 것에는 온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 믿는다. 마음이 병드는 가장 큰 이유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발전을 낳기도 하나, 쉽게 분쟁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의 길로 들어서고, 그래서 더 자신의 무력함을 수용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각설하고. 인위적인 것, 분별을 지양했던 노자가 추구한 것은 '도'였다. 그가 말한 '도'는 유교에서 말한 '도덕',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중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말한 도는 세상이 구축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만물의 근원이자 운행의 법칙이다.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자연이라 칭해지는 도. 그것은 그러한 성질이기에 다른 것을 강제하거나 조작, 통제하지 않는다. 도는 되돌아가는 성질을 지녀, 극에서 극으로의 순환을 돕는다. 달이 차고 지는 것이 그러하다.
노자는 그러나, 도를 설명하며 분명히 한다. '도를 도라 말할 때, 도는 도가 아니다.' 언어를 초월한,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무언가. 전해야하기에 감히 언어로 표현했으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어떠한 것.
노자의 '도'를 받아들일 때는, 늘 사고로, 말로 형용되지 않는다. 마음 한켠에 스며들듯 오는,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어떠한 세상.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한 '도'가 아닐까.
노자는 모든 사람이 그런 도에 따라 무위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태어나서 인위를 배우기 전까지는 도에 따라 살아간다고 말한다. 인의예지, 법과 같은 것을 배우기 전 어린아이들이 무욕, 무지하며 순박, 소박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우리는 그 상태로 돌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무위자연'이다.
그의 무위자연 사상은 다른 어떠한 꾸며냄 없이도 인간은 그 사람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자기 긍정 혹은 타인을 긍정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다. 한 가지 이상향을 설정한 채 그 외의 삶은 무용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현대사회에 필요한 이야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든다. 그는 결국 사회문제를 막고자 사상을 전개한 것인데 무위자연한 것으로 사회문제가 정말 해결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가 추구하는 상태인 '무지, 무욕, 소박, 순박'한 것의 예가 어린아이라면 아이들은 싸울 일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에 따라 생겨난 '욕'에 권력욕 등이 포함되지는 않을지언정 소유욕, 식욕과 같은 것이 없을까. 그에 따르면 아이들은 배가 차면 식사를 멈추고 음식을 타인에게 나누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폭력성을 지니는 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노자와 관련해서는 강의 몇 번 들은 게 다 인지라 의문인 점이 많다. 추후 그와 관련된 서적을 읽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무튼,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며 그는 물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이야기한다. 위를 추구하는 우리와 달리 겸허히 아래로 흐르고, 무엇을 만나든 싸움 없이 피해하는 물을 보며 겸허와 부쟁의 덕을 발견한 그는 '상선약수'를 이야기하며 물을 찬양한다. 여기서도 의문이었던 점은 그에 따르면 무위자연, 즉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덕이거늘, 더불어 현자 숭상을 지양하며 현자를 숭상할 경우, 다른 백성들이 그를 투기해 그와 같은 형상을 가지려는 인위의 상태로 향할 것을 염려한 그가 특정한 덕을 칭찬한다는 것이 퍽 이상해 보였다. 겸허와 부쟁 또한 누군가의 속성일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러한 사상을 전개했던 노자는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소국과민'을 주장한다. 법과 도덕을 지양했던 그는 그러한 것들이 없는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작은 국가에 적은 국민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국가는 무위에 의한 통치, 무위지치에 따라 다스려져야 한다.
노자는 국가형태에 급을 매겼는데, 강력한 힘과 법으로 이루어진 공포정치가 하급이며, 백성이 통치자를 과하게 선망하는 것이 중급이라 주장한다. 가장 적합한 통치는 백성이 통치자의 존재를 알고는 있으나 공기처럼 자주 그것을 잊는 형태로 이야기하며 통치자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백성이 무지, 무욕, 순박,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야 함을 주장한다.
공자의 유가사상을 비판하며 성립된 도가는 여전히 의문인 점이 있으나 앞서 살펴본 사상들과는 다른 결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후 노자를 이은 장자의 사상을 살펴본 후 글을 이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