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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난 Mar 01. 2023

Who am I?

우도 라우흐플라이슈의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 장애일 때'를 읽고

 고등학교 졸업 후 이리저리 방황하던 진호는 생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집에 불과했으나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다 겨우 구한 일자리인지라 진호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아이스크림 가게 점장은 자애롭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경험이 없어 서툰 진호를 이해하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어린 학생이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하다며 꼭 가족처럼 식사며 가벼운 선물을 챙겨주기도 했다. 진호는 그런 점장을 존경했다. 가족들이며 친구들, 심지어는 지나치다 마주치는 주민들에게도 저의 점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찬양하고 다니곤 했다. 진호의 마음속에서 점장은 이미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신나는 마음으로 출근했고 문이 딸랑이며 열리자마자 점장님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그런데 어라. 점장님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한껏 찌푸린 미간에 살짝 달아오른 얼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진호를 노려본 점장은 짓씹듯 물었다.  "진호 씨, 어제 냉동고 끄고 갔어요?"
영문 모를 소리에 진호의 눈동자가 떨렸다.
"네? 아뇨?"
"아니라고요?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점장이 다소 둔탁한 발걸음을 옮겼다. 진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그를 따랐다. 냉동고 앞에 서 점장이 고갯짓으로 냉동고를 가리켰다. 군말 없이 문을 열자 놀라운 풍경이 보였다. 끔찍하게도 냉동고 속 음식들이 처참한 몰골로 녹아있었던 것이다.

 문득 지난밤이 떠올랐다. 한여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많았다. 서둘러 주문을 처리하고 나니 이미 퇴근 시간에서 20분가량이 지나있었다. 꼭 보는 드라마가 시작하기까지 40분 남은 시간이었다. 집까지 도보로 25분가량. 서둘러 정리하고 나가면 딱 맞을 듯했다. 바닥청소, 매대정리 및 시재점검까지 끝내고 나니 어느새 20분가량이 흘렀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불을 끄고 나갔다. 그래, 불을 껐다. 매장 전체 전기공급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얼굴이 하얘진 진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점장님, 제가.."
"진호 씨한테 누누이 말했어요. 첫날부터 다른 건 몰라도 포스기와 냉동고 전원만 주의해 달라고.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 신경 써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요?"
"점장님..."
"하.. 저는 가서 업체에 연락해 볼 테니 진호 씨는 치우고 있어요."
목덜미까지 붉어진 점장이 진호를 한 번 더 흘겨본 뒤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업체와 연락이 된 점장이 가게로 돌아왔다. "진호 씨?"
 그런데 가게 정리를 하고 있어야 할 진호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진호를 찾던 중 포스기 옆에 놓인 쪽지가 보였다.

 '시 ×. 더럽고 치사해서 그만둔다. 그딴 식으로 살지 마라.'

 



 위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장애일 때》 에 나오는 한 사례를 참조하여 만든 일화이다. 극단적인 예찬과 경멸을 오가는 사람. 위 사례처럼 극심하지 않더라도 만나거나, 스스로 그런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진호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 혼란스러움에 당황하고 있을 때, 저의 이야기는 들어주지도 않고 화부터 내는 점장님이 야속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호의 반응은 명백히 '과했다.'


 경계성 성격장애란 자아상, 대인관계, 정서가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특징을 갖는 성격장애이다.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위의 사례와 같이 변덕이 심하고 충동적이다. 감정 폭발이 잦으며 충동적인 행동을 자제하지 못한다.


 그나마 진호의 사례는 양호한 편이다.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실질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저의 애인을 봤다거나 상대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장애일 때 》는 다양한 환자의 일화를 바탕으로 성격장애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중 특히 흥미로운 것이 있다. 정신과 진단 시스템에 오른 대부분의 진단명을 받은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여러 병원에서 중증 우울증부터 반사회적 성격장애, 신경성 장애를 비롯해 무수한 진단명을 받는다. 심지어 어떤 병원에서는 그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이는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징과 연관 있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가 자아상이 불안정하고 자기 가치감이 낮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끝없이 흔들리고 불안하다. 지독한 공허함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을 찾아 헤맨다.


 사내 또한 그러했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고자 찾아 헤맸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우울증 환자, 반사회적 성격장애 환자가 자신이라고 여겼다. 연기가 아니다. 정말 스스로 자신이 그런 환자라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본인마저 속고 있기에 전문의도 사내를 '우울증 환자', '반사회적 성격장애 환자'로 판단해버리고 만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성공한 한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직업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인기도 많았다. 어느 모임을 가든 중심에 서 있었고 많은 이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사는 사람이었다. 언뜻 완벽해 보이는 그녀였으나 속은 달랐다. 워커홀릭 수준으로 본업에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특별해지고 싶어서'. 끝없이 모임에 참석하는 연유는 '혼자서는 견딜 수 없어서'. 너무 외롭고 공허해서, 이 고통의 끝이 있을지 알 수 없어서 침몰하지 않고자 애쓴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해와 자살기도를 하기에 이른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흥미로운 점은 얼핏 "어라? 나도 그런데?"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는 점이다. 나는 누군가 내게 잘해줄 때, 그를 찬양하다 조금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험담을 하거나, 본인의 잘못이 명백함에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린 적이 없었나? 반대의견을 들었을 때 불쾌한 적이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나?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누군가의 온기를 바란 적이, 과연 없었노라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사소한 이유로 상대를 평가절하하기도 해 봤고, 제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남 탓을 한 적도 많다. 상대가 내 의견에 동의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분 나빴던 건 셀 수 없고, 공허함에 울며 하루를 지새운 날도 있다. 다만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처럼 극단적인 행동으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성은 대부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특징이다. 다만 그 정도가 도를 넘어설 때, 우리는 그것을 '경계성 성격장애'라는 질환으로 명명할 뿐이다. 즉, 그들과 질환을 앓지 않는 이들 사이에는 아주 얇은 틈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현대사회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고 느낀다. 젠더갈등과 세대 간 갈등을 비롯한 무수한 이분법적 사고들. 아군이 아니면 적이 되는 이러한 사고는 경계성 성격장애의 대표적 특성이다. 그들은 양가감정을 느끼기 힘들어한다. 명확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감정은 자존감이 높아야 정확히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들은 자아가 불분명하고 자존감이 낮기에 이를 견딜 수 없다.


 처음 소개한 진호의 사례도 근래 속칭 MZ세대라 불리는 이들에게서 왕왕 발견할 수 있다. 토론의 장에서 상대의 의견 중 동의하는 부분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자 "인정했네? 그럼 끝이지"라고 하는 식의 언행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들에게서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성이 빈번히 발견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 우선 경계성 성격장애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서 나타날 수도 있으나 많은 경우, 심리사회적 스트레스 요인에 의해 생겨난다. 유년기의 트라우마, 정서적 방임, 학대, 성폭행 등이 대표적인 원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방임 또는 학대를 겪어 온 환자들은 무력감에 시달린다. 성인의 학대 속에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지속되는 무력한 상황 속에서 자기 효능감과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기에 공허하고, 제대로 된 자아를 형성할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불안하다. 불안함은 공격성을 낳는다.


 현대인, 특히나 젊은 층은 어린 시절 예전과 같은 애정과 보살핌 속에 자라지 못했다. 맞벌이의 증가와 출산율 감소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사교육 증가로 정체성을 찾고 타인과 감정을 공유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노력해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겪었다.


 물론 다른 세대들도 많은 고충을 겪었고, 현대인들이 이전에 비해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들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 또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과연 현대인들이 자아상을 구축하고 자기 가치감과 자기 효능감을 키울 수 있었을까.



당신을 전문가로 만들어
 이 사람이 경계성 성격장애인지 아닌지
진단 내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병을 앓는 환자의 가족 혹은 친구로서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더 잘 이해하자는 의도이다.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장애일 때-




 최근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경계성 성격장애'에 대한 정보도 접하기 쉬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해당 질환이 생소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앞선 설명을 보다 보면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들이 그저 안타깝고 안쓰럽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나 충동적인 성향이 많은 질환인만큼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를 곁에 두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이 안쓰럽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인들에게 모든 그의 행태를 감당하고 수용하라는 것은 가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선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와 다른 이들은 어떠한 행동양상에 있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어느 순간 그러한 정신질환을 앓을 수 있고, 그렇기에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가 특히 이상하거나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경계성 성격장애의 원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동학대'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경계성 성격장애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필요하다.



 

좋았던 적이 한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그런데 딱 한 번 생각나는 장면이 있어요.
삼촌이 목말을 태워줬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어린 시절부터 삼촌으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던 한 청년의 인터뷰 내용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그는 삼촌이 목말을 태워줬을 때가 가장 행복했노라 답한다. 많은 아동학대 피해자들이 폭력과 방임 속에 고통받으면서도 저들의 보호자를 놓지 못한다. 무의식에서나마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사랑해 주길 바란다. 성년이 되었어도 그들은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한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유년기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아동학대를 비롯하여 잘못된 애착관계의 형성, 성폭행 경험 등이 그들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최근 들어 아동학대 범죄의 수와 잔혹성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수시로 보도되는 잔인한 학대의 정황과 그로 인해 숨진, 혹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존재.


 더 이상 아동학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사회의,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 학대의 심각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 적절한 입법과 관련 기관의 확충 및 예산안 마련, 부모 및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바른 교육 방식에 대한 교육, 아동복지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 나 개인의 노력은 얼핏 무력하고 무가치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행동, 말, 생각 하나하나가 모여 궁극에는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작은 점이 내겐 말 그대로 점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소중한 선 또는 길이 될 테지
-언어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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