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라우흐플라이슈의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 장애일 때'를 읽고
고등학교 졸업 후 이리저리 방황하던 진호는 생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집에 불과했으나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다 겨우 구한 일자리인지라 진호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아이스크림 가게 점장은 자애롭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경험이 없어 서툰 진호를 이해하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어린 학생이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하다며 꼭 가족처럼 식사며 가벼운 선물을 챙겨주기도 했다. 진호는 그런 점장을 존경했다. 가족들이며 친구들, 심지어는 지나치다 마주치는 주민들에게도 저의 점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찬양하고 다니곤 했다. 진호의 마음속에서 점장은 이미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신나는 마음으로 출근했고 문이 딸랑이며 열리자마자 점장님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그런데 어라. 점장님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한껏 찌푸린 미간에 살짝 달아오른 얼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진호를 노려본 점장은 짓씹듯 물었다. "진호 씨, 어제 냉동고 끄고 갔어요?"
영문 모를 소리에 진호의 눈동자가 떨렸다.
"네? 아뇨?"
"아니라고요?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점장이 다소 둔탁한 발걸음을 옮겼다. 진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그를 따랐다. 냉동고 앞에 서 점장이 고갯짓으로 냉동고를 가리켰다. 군말 없이 문을 열자 놀라운 풍경이 보였다. 끔찍하게도 냉동고 속 음식들이 처참한 몰골로 녹아있었던 것이다.
문득 지난밤이 떠올랐다. 한여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많았다. 서둘러 주문을 처리하고 나니 이미 퇴근 시간에서 20분가량이 지나있었다. 꼭 보는 드라마가 시작하기까지 40분 남은 시간이었다. 집까지 도보로 25분가량. 서둘러 정리하고 나가면 딱 맞을 듯했다. 바닥청소, 매대정리 및 시재점검까지 끝내고 나니 어느새 20분가량이 흘렀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불을 끄고 나갔다. 그래, 불을 껐다. 매장 전체 전기공급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얼굴이 하얘진 진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점장님, 제가.."
"진호 씨한테 누누이 말했어요. 첫날부터 다른 건 몰라도 포스기와 냉동고 전원만 주의해 달라고.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 신경 써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요?"
"점장님..."
"하.. 저는 가서 업체에 연락해 볼 테니 진호 씨는 치우고 있어요."
목덜미까지 붉어진 점장이 진호를 한 번 더 흘겨본 뒤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업체와 연락이 된 점장이 가게로 돌아왔다. "진호 씨?"
그런데 가게 정리를 하고 있어야 할 진호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진호를 찾던 중 포스기 옆에 놓인 쪽지가 보였다.
'시 ×. 더럽고 치사해서 그만둔다. 그딴 식으로 살지 마라.'
당신을 전문가로 만들어
이 사람이 경계성 성격장애인지 아닌지
진단 내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병을 앓는 환자의 가족 혹은 친구로서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더 잘 이해하자는 의도이다.
-가까운 사람이 경계성 성격장애일 때-
좋았던 적이 한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그런데 딱 한 번 생각나는 장면이 있어요.
삼촌이 목말을 태워줬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이 작은 점이 내겐 말 그대로 점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소중한 선 또는 길이 될 테지
-언어의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