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모두맑음 Sep 28. 2021

보리수 익어가는 빨간 계절

우리 집 정원에는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있다. 소나무를 비롯해 감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으름나무, 사철나무, 보리수, 남천, 금송, 목련, 베롱, 해당화, 라일락, 철쭉, 진달래, 장미, 백합, 동백, 마가렛 등등 온갖 과실수와 꽃나무들로 마당은 또 하나의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조경 계획을 철저히 세워 심은 이 나무들은 모두 시아버님 작품이다. 만약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작은 꽃밭 정도 가꾸고 말았을 텐데, 시아버님은 뭐든지 철두철미하시다. 덕분에 아름다운 자연을 내 집 마당에서도 풍성히 누리고 있다.


전원주택에서 맞이하는 6월은 특별히 매혹적이다. 자연이 무르익어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6월이 내뿜는 자연색 중 가장 매력적인 빛깔을 뽐내는 건 단연 “보리수”일 것이다.


보리수/ 슈베르트 가곡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학창 시절 슈베르트 가곡에서 처음 만난 보리수. 대체 어떤 나무이길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가 단꿈을 보는 걸까.. 늘 궁금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내게 보리수나무는 어린 왕자 속 바오밥나무처럼 그저 상상 속 나무였다. 그런 보리수나무를 우리 집 정원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토록 동경하던 에펠탑도 실제로 보면 실망한다고 했던가. 나에게 보리수나무의 첫인상이 딱 그랬다. 전혀 감동이 없었다.


큰 매력 없던 보리수나무를 무심하게 지나치던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랐다. 또롱 또롱 귀여운 열매가 가지마다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푸르뎅뎅하던 딱딱한 열매가 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차츰 주홍 빛깔로 다시 슬금슬금 선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밤이슬과 새벽이슬을 며칠 더 먹은 보리수는 시뻘건 핏빛으로 낯빛을 싹 바꾸고 유혹했다.


“자! 이제 나를 먹어도 좋아, 그러나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거야.” 마치 이렇게 선전포고를 하듯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전!!" 아이들과 나는 보리수의 강렬한 색에 이끌려 생애 첫 보리수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빨간 보리수 하나 똑 따서 처음 맛본 날, 입안 가득 퍼진 떫은 거미줄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 이게 뭐야?! 퉤 퉤 퉤!!" 아이들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헉!! 이거 진짜 못 먹겠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연신 침을 뱉어냈다.


입안에 거미줄처럼 쳐진 얇은 막이 혀를 마비시키는 느낌이었다. 그 텁텁함에 깜짝 놀라 침을 뱉어낼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거다. 보리수를 처음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우리처럼 못난이 얼굴이 될 것이다. 시금 털털한 맛에 부르르 몸서리를 치게 되는 건 자동 수순이다.


"보리수가 얼마나 맛있는데! 아주 잘 익은 보리수는 꿀처럼 달아. 이거 한번 먹어봐!" 하시며 친정엄마가 굵직한 보리수 한 알을 내 입에 넣어준 적이 있었다.


"진짜 엄마?!" 반신반의하며 입에 넣고 맛을 음미하는데 아, 정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단맛이 느껴졌다.


말랑말랑 농익은 자줏빛의 크고 탐스러운 보리수 열매는 마치 젤리처럼 찐득하고 달짝지근해서 앵두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맛이 좋았다. 그렇게 잘 익은 녀석으로 골라먹다 보니 어느새 보리수 열매가 주는 특유의 새콤 달콤 떫은 오묘한 맛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에겐 앵두보다 보리수다.




보리수 열매의 모양은 길쭉한 타원형이다. 보리수의 빨간 색감 때문인지 아름다운 루비가 떠올랐다. 나뭇가지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은 마치 달랑거리는 귀걸이처럼 사랑스럽다. 먹고   씨를 뱉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펴보니, 씨의 모양은 길쭉한데 한쪽 끝이 무척 뾰족하다.  바늘귀처럼 생겼다.


떫은 보리수 맛에 한번 당한 아이들은  이상 보리수 열매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물까치 떼가 날아와 열매를  먹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단다.


"잘 익은 보리수가 얼마나 맛있는데.." 하며 보리수를 아이들 입 근처로 가져가면


 "우엑! 이게 맛있다고요?!" 하며 멀찍이 도망가는 아이들.


그 표정과 몸짓이 하도 재밌어서 열매를 들고 아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놀리곤 했다.


'그래, 이 맛을 알기에 너희들은 아직 너무 어리지.'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은 절대 모를 . 엄마와 내가 그랬듯, 나이를 먹어야만 인생의 참맛을 알아야만 깨달아지는 맛이었다. 우리 아이들도 이다음에 나만큼 나이를 먹으면 보리수의 참맛을   있을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산을 펼쳐 들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비에 젖은 보리수를 보기 위해서다. 루비 귀걸이를 연상케 하는 보리수 열매 끝에 빗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린 모습은 흡사 큐빅이 박힌 듯 영롱하다. 빨간 열매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금세라도 토독 토독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면 일부러 손가락을 튕겨 빗방울을 흩뿌리며 동심에 빠지곤 했다.


초록 자연을 더 초록으로 보이게 만드는 빨간 보리수와 빨간 보리수를 더 빨간색으로 느끼게 만드는 초록 자연, 거기에 자연색의 선명함을 극대화시켜주는 맑은 빗방울. 완벽한 삼박자다. 자연의 하모니에 넋을 잃고 아름다운 색상에 취했다.


이쯤 되면 슈베르트 가곡 속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가사가 완벽히 이해된다. 작사가처럼 나 역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랑스러운 보리수나무 아래로 달려가 마음을 달래고 싶어 지니 말이다. 보리수 그늘 아래서 나도 종종 단꿈을 보았다.



"엄마, 나도 나도 따, 따”

넷째 태준이가 보리수 열매 따기에 도전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깨금발을 들어봐도 역부족이다. 가장 낮게 달린 보리수도 태준이에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태준이 모르게 가지를 지긋이 내려주었다. 보리수 열매가 손끝에 닿자 태준이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보리수 열매 따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요.’라는 표정이다. 초롱거라는 눈망울 속에 하늘과 바람과 보리수가 일렁인다. 토실한 얼굴과 오동통 영근 보리수 열매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바라만 봐도 절로 웃음이 돋았다.



"보리수가 기관지, 기침, 천식, 가래에 그렇게 좋대."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아.. 진짜? 그럼 한번 청으로 담아볼까?!"

그렇게 보리 수청 담그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셋째 경준이가 제일 열심이었다. 앙다문 입술을 하고 고사리 손으로 사부작사부작 다듬기 시작한 보리수가 커다란 쟁반 한가득 수북수북 쌓여갔다. 경준이의 올망졸망한 손끝에서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보리수가 깨끗하게 분리됐다.


누나 형과 함께 보리수와 설탕 양을 1:1 비율로 야무지게 담았다. 만든 이와 만든 날짜를 적고 꺼내서 맛볼 날짜도 계산해서 적어두었다. 그렇게 우리는 겨우내 따뜻한 물에 청을 넣어 마셨다. 설탕이 반이니 달콤하지 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사실, 이렇게 딱 한번 만들어 먹어본 이후 두 번 다시는 보리수 청을 담그지는 않았다. 한 번이면 족했다. 그러나 이날 이후 보리수야 말로 자연이 준 가장 고마운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맛으로도 멋으로도 나에게 보리수는 최고의 열매다.




뱀딸기/동요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오빠는 그러지만 나는 안 속아
내가 따러 갈까 봐 그러는 게지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이 말은 정말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산딸기=뱀” 공식이 머리에 떠오른다. 동요의 가사처럼 오빠가 혼자만 먹으려고 저 말을 지어낸 걸까? 아니면 정말 산딸기 근처에 뱀이 사는 걸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뒷마당 울타리 밖에 난 빨간 산딸기를 볼 때마다 종종 뱀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얘들아, 산딸기 따러 가자!" 친정엄마, 외할머니가 부르시면..


"네, 할머니 같이 가요." 산딸기를 담을 양푼을 들고 뒷마당 넘어 숲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뱀이 무섭다고 탐스런 산딸기를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눈앞에 보이니 일단 따고 보기로 했다. 그 대신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 발아래를 조심하면서.


셋째와 넷째와 나는 마당에 편히 앉아,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씁씁거리며 맛있는 산딸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엄마! 이만큼 땄어요!”

산딸기를 번쩍 들어 올리며 세아, 현준이가 활짝 웃었다.


“와!! 진짜 많네??!! 고생했어!!”

개선장군 맞이 하듯 아이들을 맞아 주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산딸기에 손이 가요 어른 손 아이손 자꾸만 손이 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콤 달콤 맛있는 산딸기를 먹었다. 한두 개 먹었을까? 벌써 바닥이 보인다. 순식간에 아이들 입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진 산딸기. 보리수처럼 얼굴을 찡그릴 일도 침을 뱉어낼 일도 없는 맛 좋은 산딸기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흐물흐물한 산딸기는 앉은자리에서 빠르게 먹어야지 안 그러면 맛과 모양이 금방 사그라진다. 하나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횃불 같기도, 예쁜 연등 같기도 하다. 작은 불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춤을 추는 것 같이 참 곱고 예뻤다.




달마중/동요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 중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동요 가사처럼 가지마다 알알이 박힌 빨간 앵두를 똑똑 따다가 실로 엮으면 진주 목걸이가 될 것만 같다.  보리수가 길게 늘어진 귀걸이라면 앵두는 귀에 착 달라붙은 진주 귀걸이를 연상케 한다. 배지를 만들어 옷에 걸고 귀걸이를 만들어도 귀에 걸고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팔찌를 만들어 팔에 걸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앵두다.


입에 쏙 넣어보면 매끄러운 표면에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앵두. 이름도 어쩜 앵두일까. "앵두 앵두 앵두" 앵두를 부르다 보면 내 입도 귀여워지는 느낌이다.


맛은 또 어떤가. 새콤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며 얼굴에 붉은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맛이 아니던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가장 사랑받는 열매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6월은 빨간 계절이다. 


초록은 더 초록으로 빨강은 더 빨강으로.. 그렇게 모든 자연이 곱게 익어가는 아름다운 6월.


보리수, 산딸기, 앵두 열매 속에 아이들의 미소가 햇살처럼 서리어있다. 아이들을 보듯 탐스러운 열매를 본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영글어가는 빨간 계절 6월이 나는 참 좋다.  

이전 08화 욕실의 욕조와 세면대는 이렇게 만들었어요.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사계절이 쉬어가는 우리 집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