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중입니다, 이 결혼에서 ‘무례한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사람들의 이런 무례함과 오지랖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경계를 더 자주 침범하게 된다. 어쩌면 서투른 표현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말을 고르고 아끼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일수록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더 신중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살아남는 중입니다, 이 결혼에서 35p - ‘무례한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중.. ]
최근 리뷰를 썼던 친구 작가의 책 “살아남는 중입니다, 이 결혼에서” 에서 유독 마음에 걸리는 챕터가 있다. ‘무례한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부분. 이 페이지를 읽을 때 여러 번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나도 누군가에게 어쭙잖은 오지랖을 부렸을 테다. 충고, 조언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를 앞세워 수많은 침범과 무례를 저질렀을게다. 무례를 범하지 않으면서 진심을 제대로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은 사실 특별할 게 없다. 그저 말없이 어깨를 한 번 토닥여주는 것,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 한 번 건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살아남는 중입니다, 이 결혼에서 35p - ‘무례한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중.. ]
“그저 말없이 어깨를 한 번 토닥여주는 것”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 한 번”
아빠가 아프게 세상을 등진 나의 20대, 박제된 듯 새겨진 장례식 풍경.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그 당시 무례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게 따뜻한 진심을 전해준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는 내 친구들
장례식 내내 내 곁을 지키겠다고, 함께 밤을 새우겠다며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와 내 곁에 그림자처럼 있어주었던 친구들. 그녀들 덕분에 장례기간 중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나보고 눈 크게 뜨라고 하지 마, 이게 다 뜬 거야. 붕어가 따로 없지? 태어나서 이런 눈 처음이야. 하하하.” 퉁퉁 붓다 못해 눈을 뜨기 조차 힘겹던 우스꽝스러운 눈을 셀프디스 하며 잠시나마 환히 웃을 수 있었던 건, 그녀들의 넉넉한 위로 덕분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감동과 위로를 주었던 그녀들의 눈빛과 행동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빠 친구 아저씨들
“너네들 가여워서 어쩌니?” “그런 무책임한 아빠가 어딨니?” “이 야속한 사람아! 아들딸 버려두고 떠난 이 모진 사람!” 침 뱉듯 툭툭 이런 말을 내뱉었던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우리 삼 남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 주던 아빠의 친구 아저씨들의 포근한 눈빛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장례절차가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분들의 엄청난 부의금 덕분에 더 이상 지하 월세가 아닌 지상 임대아파트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요란하지 않게 생색내지 않으면서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어 주신 아빠 친구 아저씨들. 가족 친지도 그렇게는 못하는데.. 아빠를 대신하여 우리 삼 남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시겠다는 듯 잡아 주셨던 따뜻한 손길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직장 동료 선생님들과 음악 선생님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아빠와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본 분들이기에, 유일하게 왜?라고 묻지 않았고, 왜!라고 궁금해하지 않았던 분들이다. 나만큼 충격이 컸던 분들. 힘껏 끌어안은 포옹과 뜨거운 눈물에서 수많은 위로의 문장이 읽혔던 분들. 선생님들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꾹꾹 눌러놓았던 서러운 울음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중 음악 선생님만 출산을 코앞에 둔 상황이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음악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아주며 장례식에 못 가서 미안했노라 고개를 떨구셨다.
이후 한 아이가 반갑게 다가와 내게 말했다. “미술 선생님 어디 갔다 왔어요?” “응, 선생님 아빠가 멀리 가셨거든. 보내드리고 오느라 며칠 못 왔어.” “있잖아요 선생님, 지난번에 음악 선생님이 계속 울었어요. 너무 슬픈 일이 있다고 수업 내내 울었어요.” 서영이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눈물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본인은 장례식장에 끝까지 오려고 했는데, 시댁과 친정에서 아기에게 부정 탄다는 이유로 극구 말렸다고 한다. 호상도 아닌 곳에 만삭의 몸으로 가는 거 아니라며.
음악 선생님은 아마 모를 것이다. 내가 그날의 눈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어느 요란한 위로보다 큰 울림을 주었던 음악 선생님의 눈물이 아름다운 흑백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내 친구들과 아빠 친구 아저씨들, 그리고 직장 동료 선생님들과 음악 선생님처럼 요란하지 않게 생색내지 않으면서 제대로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사람.
구태여 쓸데없는 말을 보태 상대의 심기를 더 어지럽혀야 할까?
[살아남는 중입니다, 이 결혼에서 35p - ‘무례한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중.. ]
무례하지 않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은 쉬운 듯 하지만,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면 말은 뱉기보다 삼키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성실하게 사랑하며 조용히 침묵을 지키라. 성실한 사람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제나인) “구태여 쓸데없는 말을 보태 상대의 심기를 더 어지럽혀야 할까? “ 저자의 이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