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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Aug 02. 2021

피카소 vs 뷔페, 두 천재 화가의 여자 이야기

피카소 전시회를 다녀와서.

왼쪽/ 젊은 시절 ‘파블로 피카소’ vs 오른쪽/ 젊은 시절 ‘베르나르 뷔페’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2021.05.01-08.29 예술의전당 한가람

지난달, 7월 12일 하루 휴가를 내고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전시회를 다녀왔다. 코로나 시대라 50명씩 시간차를 두고 입장하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있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 그나마 평일 오전 관람이라 내 앞 대기자는 26명이었고, 50분 뒤에 입장할 수 있었다. 전시 초기에는 400명씩 대기했었다고 한다.


현생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피카소” 이름 세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천재 화가라는 사실에 딴지를 걸 사람 역시 드물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믿어왔다. 개인적으로 추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피카소 그림은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었다. 그림에 어떤 정신과 사상이 담겼는지 모르고 말이다.


이번에 피카소 그림을 둘러보며 그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 게 되었는데 조금 충격이었다. 피카소는 노년에 ‘공산당’에 입당해 전쟁에 관련된 작품을 다수 남겼는데,  ‘한국전쟁’ 그림을 남긴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의 이데올로기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예술가로서의 순수함이 살짝 변질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카소의 마지막 그림들을 둘러보며 전시장을 빠져나오는데, 뭔가 모를 씁쓸함과 허탈감이 몰려왔다. 그 순간 나는 왜 “베르나르 뷔페”가 떠올랐을까!


베르나르 뷔페전/ 2019.06.08-09.15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9년에 ‘베르나르 뷔페 전시회’가 이곳 한가람 미술관에서 있었다. 그림을 보기 전까지 사실 “뷔페”라는 천재화가를 잘 몰랐다. 코로나 시대 이전이라, 도슨트의 상세한 설명을 겸해 그의 전시회를 볼 수 있었고, 전시 관람 이후 나는 뷔페라는 천재 화가에게 깊이 매료당했다. 이번 피카소 전시회를 보고 나서 두 천재화가의 삶이 극명하게 엇갈려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전시회 이후 피카소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서 여러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우리 팀 디자이너들에게 두 천재화가의 일화들을 들려주니 재밌다고 난리다. 그래서 이 글을 준비했다. 이미 알고 있는 분들에겐 뒷북일 수 있겠으나 모르셨던 분들에겐 소소한 앎의 즐거움이 되면 좋겠다.



20세기 프랑스는 피카소의 그림과 같은 ‘추상화’가 추앙을 받던 시대였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돌연 ‘구상화’를 들고 나와 큰 주목받은 젊은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베르나르 뷔페였다. 당시 60대 후반의 피카소는 지는별, 20세의 신성! 뷔페는 뜨는 별이란 찬사를 받았다.


베르나르뷔페 “닭을 들고 있는 여인” 1947년 작.

20세의 젊은 뷔페가 비평가 상을 휩쓸며 돌풍을 일으키자 자존심이 상한 피카소도 폭동 수준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뷔페의 전시회를 찾게 된다. 전시관에 들어선 피카소는 뷔페의 작품 중 “닭을 들고 있는 여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나갔다고 한다. 덩달아 이 그림이 어마어마한 가치의 그림이 되었다는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전시회에 몰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냥 가까이에 있던 그림 하나를 빠르게 보고 나간 것일까? 아니면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것은 그저 딱 한 그림으로 족해서 그랬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었고, 황량함과 삭막함 속에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대였다. 저 삐쩍 마른 여인과 살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닭을 보면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캔버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뭐에 막 긁힌 듯 거칠고 얇은데, 그건 무슨 기법이 아니라, 물감이 귀한 시절이다 보니 유화물감이 마르기 전에 나이프로 다시 긁어내 다른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한 흔적이라고. 재료를 살 돈이 없어 식탁보와 커튼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니, 모든 자원이 턱 없이 부족했던 시절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뷔페 그림 속 모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동질감과 친밀감이 컸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이 뷔페 그림에 열광한 것이 아닐까!


베르나르 뷔페와 그의 그림이 특히 여성들에게 유독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지고지순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던 아름다운 “아나벨”을 만나 뷔페는 첫눈에 반했다. 평생 그녀만을 뮤즈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한평생 그녀만을 끔찍이 사랑했던 뷔페의 순애보는 모든 여성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나 역시 그 대목에서 마음이 크게 요동했으니 말이다.

왼쪽/ 운명적 첫 만남 & 오른쪽/ 오스카 시상에서의 두사람

왼쪽 사진이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첫 만남이다. 자세히 보면 창가에 할머니 얼굴이 살짝 보인다. 저분이 이 사진의 주인공이고 아나벨과 뷔페는 들러리로 앉아 있었던 거라는데, ‘시작되는 연인들’ 이란 제목의 사진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선남선녀의 사진이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결혼 이후 오스카 시상식에서의 행복했던 한 때라고 한다. 뷔페가 그림을 그리면 그녀는 서평을 써주고, 아나벨이 책을 내면 뷔페가 책의 그림을 그려줬다고 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뮤즈가 되어준 사랑. 영혼의 단짝이자 진정한 소울메이트가 아닐 수 없다.


뷔페의 그림 속 여인은 “아나벨” 단 한사람.

그렇게 행복할 것만 같았던 뷔페에게 1997년 갑자기 “파킨슨병”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온다. 손에 마비가 와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뷔페에게 그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99년 10월 그의 나이 74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도슨트에게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다가 그 방법마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나는 그만 조용히 눈물을 흘렸었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땠을까?!

아마 그가 세기의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60,70대의 나이에도 20대의 젊은 여자들과 사랑에 빠졌던 피카소! 남자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능력자라며 부러움의 엄지 척을 날릴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여성편력 덕분에 피카소는 단 일분도 여자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살아생전 셀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을 만났지만 그중 굵직하게 기록된 여인만 8명이라고. 모두 젊고 아름다웠으며 일부는 지적이고 유능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다. 그녀들을 살펴보자.


수없이 많은 여인을 만났지만 그중 역사적으로 기록된 8명의 여인들.

1. 페르낭드 올리비에

: 그림 모델이 직업이었던 여인으로, 젊은 피카소와 동갑내기였지만 유부녀였다. 7년간 연애를 했고 그녀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마르셀을 만나며 헤어졌다고 한다. 피카소가 헤어지며 다른 화가의 모델은 되지 말라고 해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2. 마르셀 험버트

: 마르셀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가 아픈 와중에도 피카소는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3. 올가 코를로바

: 피카소보다 10살 연하였던 올가는 발레리나였다. 공식적인 피카소의 첫 번째 아내이다. 그녀는 피카소의 심각한 학대를 견뎌냈으나 신경불안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4. 마리 테레즈 월터

: 피카소 47세에 28살 연하였던 17세 스웨덴 소녀 마리 테레즈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피카소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한다. 올가와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음에도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 길 건너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마리는 그 유명한 명작 “꿈”의 주인공이다. 올가가 끝까지 이혼을 해주지 않아 올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함께 살았다고 한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 도라 마르

: 54세가 된 피카소는 24살 차이의 연하 유고슬라비아 여인 도라를 만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사진작가였다. 피카소는 돌연 프랑수와즈를 만나 그녀를 떠나게 되고 그녀는 속세를 떠나 방랑하다가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가난하고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6. 프랑스와즈 질로

: 62세의 피카소가 무려 40 연하의 22 꽃다운 프랑스와즈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의 아이 둘을 낳고 피카소를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의사와 재혼을 한다. 피카소에게서 낳은 2명의 아이들을 앞세워 엄청난 상속금도 챙기고 그와 빠르게 헤어진 바람에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영리한 여인으로 기록되었다.

7. 잔느비에브 라포르트

: 24살의 어린 잔느비에브는 피카소가 프랑스와즈와 함께 살 때 비밀연애를 했던 여인이다. 피카소가 도망가서 살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 나이 79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비밀연애 기간 자신을 그려준 그림 20여 점을 경매에 붙인 여인이다.


8. 자끌린 로크

: 프랑스와즈와 잔느비에브에게 연달아 거절당해 외로움에 떨고 있던 72살의 피카소 앞에 무려 45살의 연하 27살의 자끌린이 나타난다. 그녀는 피카소의 공식적인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92세의 나이로 피카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20년을 함께했다. 그녀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피카소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무덤 앞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의 공식적인 두번째 아내이자 마지막을 함께 한 여인 자끌린

아이러니하게도 피카소는 92세의 나이로 장수했는데, 피카소의 그녀들은 단명하거나 하나같이 불행한 삶으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피카소를 회고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문구가 등장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약탈자의 성정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이들은 거의 온전하지 못했다. 피카소의 손이 닿았던 자들은 모두 파멸에 이르렀다. 그에게 게걸스럽게 먹혔다. 화가는 그들로부터 갈취해 파멸에 이르게 만들고 예술을 완성했다. 그들은 피카소가 되었다.”


천재화가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서, 그녀들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서 평가하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녀들이 말하 길 “그림으로 그려질 때만큼은 내 생애 최고의 행복이었다” 고 회상한다면 그게 정답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상상해 봤다. 어느 날, 피카소가 내게 다가와 고백을 한다면 나는 어떨지..


당신은
그리고 싶은
매우 신비롭고
매력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소.
당신을 초상화로 그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작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와 함께 하겠소?
나, 피카소요!


피카소의 작업 멘트였던 저 멘트를 내가 직접 듣는다면? (물론 그런 제안을 절대 받을 리 없는 비주얼입니다만;;) 떨쳐내기 참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라며 하트 눈빛까지 날린다면? 10중 6,7의 여인은 넘어가지 않을까! 작업을 걸어온 남자가 세계적인 천재 화가 “피카소”라면 말이다.



여인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베르나르 뷔페와 파블로 피카소” 두 천재 화가의 삶을  부족한 식견으로 기록해봤습니다.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글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두 화가의 그림을 평가하는 건 각자의 몫이라 생각합니다만, 예술작품에는 예술가의 사상과 영혼이 깃든다고 믿기 때문에 피카소 작품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답게 바라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살아생전 더 큰 부귀영화를 누렸던 피카소보다 뷔페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내가 인정하는
프랑스 회화의 마지막 거장은
베르나르 뷔페이다
-앤디 워홀-


왜 피카소는 되고 뷔페는 안 되는가?
어째서 역사가 그런 식으로 흘러간 것일까?  
-아담 린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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