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I would 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아름 Dec 15. 2019

조심스러운 사람들

이인용 원터치 텐트 동그랗게 펼쳐두고, 파란색 피크닉 매트 작은 걸로 하나, 거기에 은색 자동차 썬 커버를 덧대고 테이블은 맥주 박스, 그 곁으로 다섯 엉덩이가 둘러앉았다. 차 두 대를 두기 위해 빌린 두 개의 캠프 사이트는 부린 것이 적어 그런지 많이 남았다. 남은 공간은 휴대용 그릴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냄새가 채웠고, 우쿨렐레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육성이 채웠고, 웃고 떠드는 수다가 채웠고, 무엇보다 밤새도록 마시기 위해 넉넉히 사온 시원한 맥주가 채웠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서로가 있었고.     


호주에 있을 때였다. 한국인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칠 개월 정도 산 적이 있다. 내가 사는 동안 한국 사람이 나 포함해서 열 명이 채 안됐었다. 커뮤니티가 작다 보니 알자면 쉽게 알 수 있었고 반대로 모르자면 마주치지 않고 살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같이 살던 언니가 아는 남매의 송별회가 있던 날, 그 언니를 따라갔다가 세 명의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됐다. 서먹해하며 몇 마디 나누다가 그날은 금세 헤어졌다. 이후에 활달한 성격의 여자 친구 하나가 자리를 만들어 다시 모였을 때 우리는 어떤 책임감에 사로잡혀 적극적인 탐색전을 벌였다. 그때 알아봤던 것 같다. 서로가 참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걸.     


‘어떻게 이렇게 딱 모였을까’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만날 때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서너 번을 하면서도 매번 탄복과 한심함 사이의 어떤 감정을 공유하며 웃었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이 일곱이었다. 우리는 농담으로 친해졌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주로 헛소리를 해댔고 그러면서도 쑥스러움이 있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했고 그럴 때면 술을 더 마셨다.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는 군말 없이 참여했다. 서로를 끊임없이 놀리면서도 상한선을 지켰다.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맞춰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조심스러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들여다보는 일을, 살피는 일을 피곤해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각자의 어떤 행동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없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마음이 충만했으니까. 어디에서 그런 여유가 나왔을까. 어떻게 그렇게 딱 모였던 걸까.      


그래서인지 몇 달 안 되는 기간 동안 많은 걸 했다.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캠핑을 가기도 하고, 홈파티를 하기도 하고, 에어비앤비로 집을 빌려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낚시를 하기도 하고, 돈까스 하나 시켜 놓고 낮술을 마시기도 했다. 일곱이 모여 그룹을 나눠 시티를 돌아다니며 누가 더 즐거웠는지 대결해 보기도 하고, 햄버거를 케이크 삼아 핑거 치킨을 초 삼아 꽂아서는 생일 파티를 하기도 했다. 여섯 시간 거리를 옆 동네처럼 오가기도 했고.     


각자 다른 귀국 날짜를 가지고 있어 한 명 두 명 보낼 때마다 마음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사람 난 자리가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님을 느꼈다. 참 애틋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서, 적응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해내면서 서서히 뜸해졌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다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럴 수 없겠지 한다. 이들과 다시 모이면 호주에 있을 때처럼 완벽히 끈끈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글쎄 싶고. 관계의 유한함은 주로 어디에서 오는 걸까. 환경이 클까 아니면 마음일까.

      

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거리가 멀어도 혹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있으면 잊을 수 없다. 가까이 있어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결국 남이 되기 마련이고. 우리의 관계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서로가 가진 조심스러움이 시간에 밀려 왠지 늦었다고 느끼거나, 한국의 일상에 진지해져 있는데 괜히 들쑤시는 꼴이 되진 않을지 걱정하거나, ‘호주처럼’을 기대하고 만났다가 더는 그럴 수 없음을 느끼게 될까 주저하는 거겠지.      


누군가의 아주 좋은 모습을 보고 나면, 내가 아주 좋은 인상을 준 것 같다고 확신하고 나면 어쩐지 자신이 없어진다. 누구도 아닌 내가 이 호감을 망치면 어쩌지, 길게 알면 알수록 매력보다는 지루함만 주게 되면 어쩌지.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만큼 조심성이 그 심성을 키운다. 대체 이토록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자주 자신을 원망하면서.

     

그들이 보고 싶다. 다시 함께 모여서 농담하고 싶다. 비슷한 사람끼리 나눌 수 있는 감정 안에서 편하고 싶다. 또 한편,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만으로, 추억으로 아름다우면 됐다 싶기도 하다. 대체 시소 위에서 왜 평행을 맞추려고 하는 걸까 자주 자신을 의구하면서.    

 

다행스러운 건, 우리는 비슷한 사람이라 아주 나중에 만나더라도 혹은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줬던 사람들이었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여길 거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웃으면서 지내는 사람에게서도 종종 외로움을 느끼는데 옆에 없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신뢰를 갖는다는 게 따뜻하다. 드물다.     


이런 믿음이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데 너무 오래 걸린 게 아닌가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한국에 가면 이들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만나야겠다. 내 곁에, 마음에 오래 있어줬던 게, 힘이 되어 줬던 게 참 고마웠노라는 것을 농담으로 건네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나고 나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