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백령도
브런치 스토리에는 소설이나 서평을 올리려고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수필도 한 번씩 써보고자 합니다. 기록을 한다는 의미도 있어 치과의사로서 생활하면서 느낀 바를 최대한 담담하게 적어보고 싶습니다. 어색하고 조금은 지루한 글이 되지 않을까 떨리기도 하네요.
저는 올해로 치과의사로서 활동한 지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처음 3년간은 인천 백령도와 충남 계룡에서 공보의로 지냈고 2년은 페이원장으로 나머지 5년은 대표원장으로 일해왔습니다.
치과의사는 5년 차에 한 번 10년 차에 한번 번아웃이 온다고들 하는데 제가 치과의사로 일한 지는 10년 개원의로 5년 차이지만 다행히 아직은 괜찮게 일하고 있습니다.
군사지역인 백령도에서 공보의로 처음 치과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거의 생존의 공포로 비장하기도 했고 한 번 해보자는 열정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백령도는 가로 10km 세로 7km 남짓한 크기로 한국의 유인섬 475개 중에 울릉도에 이어 7번째로 큰 섬입니다. 서해 최북한에 위치해서 지리적, 군사적 의미가 컸고 주민이 5천 명 군인이 5천 명으로 모두 약 만 명이 모여사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2016~2018년에는 북한의 핵보유로 서방과 북한의 긴장이 심해지던 시기였고 북한이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으로 괌 앞바다에 시험사격을 한다고 했을 때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백령도 앞바다까지 들어왔습니다. ICBM 이 뜨는 즉시 핵잠수함으로 북한을 총공격한다며 백령도 바다에서 진을 쳤던 시기라 모두가 불안해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쓴 유서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개인 SNS에 여전히 비밀 글로 남아있는 편지의 시작 부분입니다. 비밀글로라도 적어두면 나중에 누군가 발견해서 읽어주지 않을까 하여 적어두었습니다. 이땐 좀 많이 비장했던 것 같네요^^,
당시 섬에는 세 명의 치과의사가 있었습니다. 백령병원 치과 담당 선생님, 군의관, 그리고 백령보건지소의 저였습니다. 백령병원에는 항암치료를 마치고 요양차 오신 한 할머니 교수님이 계셨는데, 종종 함께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곤 했습니다. 주로 횟집이나 새로 생긴 카페베네를 찾았는데, 교수님은 대체로 담담한 태도로 말씀하시다가도 가끔은 호탕하게 웃으셨습니다. 젊은 의사였던 저를 학생처럼 여기셨는지, 진료와 관련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1년 후에는 교수님의 부군(역시 치과의사)이 대신 섬으로 들어오셨고, 교수님은 육지로 나가셨습니다. 그때 꽤 아쉬움이 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편, 섬에는 키가 180cm가 넘는 마르고 말수가 적은 군의관(대위)도 있었습니다. 보존과 전문의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무래도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의 생활 영역이 다르다 보니 특별히 친해지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두세 달에 한 번쯤 배를 탈 때 가볍게 목례를 나누는 정도였습니다.
백령병원 진료비는 육지 로컬 의원과 비슷하거나 약간 비싼 편이었고, 군의관은 군인만 진료했고 가끔 군간부들의 친척등을 봐주는 듯 했습니다. 백령도 주민의 상당수는 결국 보건지소로 몰려왔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보건지소 진료비가 파격적으로 저렴했습니다. 당시 레진은 900원, 보철 크라운은 19만 원, 틀니는 35만 원 정도였습니다. 둘째,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지역 보건소에서는 환자 안전 문제로 보철 진료를 금지했지만, 서해 5도의 지리적 특성상 백령도에서는 오히려 공보의에게 보철 진료가 권장되었습니다.
저는 매달 틀니 네 개나 크라운 12개만 만들어도 최대 3일 휴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실제로는 늘 그 이상을 했습니다. 관사가 진료실 건물 2층에 있어서, 밤늦게까지 진료실에서 뭔가를 만들거나 작업하다가 올라가 잠들고, 아침엔 귀찮은 듯 내려와 다시 일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레진은 900원에 불과했지만(거의 공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재료는 제가 주문하는 대로 다 사주셨습니다. 덕분에 가장 좋은 재료들을 색상·채도별로 모두 구비해 두고, 최대한 고급 진료를 하려고 애썼습니다. 관광객들은 주사님이 진료를 제한해 일반 치료는 거의 받지 못했지만, 응급 환자의 경우만큼은 예외 없이 다 보았습니다.
소문이 금세 퍼진 것도 환자들이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백령도의 특성상 공중보건의(이하 공보의)는 1년에 한 번씩 바뀌었는데, 임기는 3년이지만 다리가 연결되지 않은 섬에서 1년을 근무하면 육지나 다리가 놓인 섬으로 옮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서로 힘든 일을 나눠서 하자는 취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년 4월이 되면 주민들은 새로 부임한 공보의를 점검하려는 듯 보건지소 치과실에 선발대를 보내 이것저것 해 달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울대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진료도 꼼꼼하다며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환자들이 “올해 밀린 이빨 다 처리하자, 내년에는 못할 수도 있다”라는 분위기로 몰려들어, 성원에 힘입어 정말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무리한 결과 허리디스크가 와서 배를 탈 때마다 말도 못 하게 고생했는데, 사실 자초한 면이 컸습니다. 어려운 케이스는 무리해서라도 끝을 보려 갖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결국 고생만 하고 끝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겁 없이 여러 가지 시도를 이어가다 보니, 1년 차가 끝날 무렵에는 마무리하지 못한 환자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결국 저는 스스로 1년 더 백령도에 남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내과, 한방 공보의와 보건소 담당 공무원은 크게 놀랐습니다. 내과나 한방친구는 인천으론 오줌도 안싸겠다며 나가기 3개월 전부터 나갈준비에 바빴고, 담당공무원은 본인이 백령도를 맡은 10년 동안 자원해서 추가 근무를 한 공보의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좀 이상한 인간으로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과 상의하며 내린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당시 전쟁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고, 다른 지역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임상 결과를 1년 더 지켜보는 것이 직업적으로도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렇게 백령도에 남기로 했습니다.
환자 중에는 민간인이 대다수였지만 의외로 군인도 많았습니다. 군대 내에 군의관이 있으니 군인은 적게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아서 처음엔 약간 우쭐해지기도 했습니다. '내가 진료를 잘해 소문이 나서 군의관 대신 여기로 오는구나' 하며 입을 쩍쩍 벌리던 장병들에게 정성을 쏟기도 했던 겁니다. 하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미혼 위생사 선생님이 예쁘다는 소문이 퍼져, 장병들이 은근한 기대를 품고 보건지소를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나름 음흉한 마음으로 기웃거리던 이들을 주사님이 단칼에 돌려보낼 때면, 좀 웃기긴 했습니다. 위생사 선생님은 이듬해 육지로 나가 약혼자와 무사히 결혼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적어 보겠습니다.
처음에 백령도에 부임했을 땐 경험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치아를 거의 다 뽑아버린 환자들이 '밥 좀 먹게 해달라'고 입을 벌리시면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치료야 어렵지 않았지만 치아 전체를 손봐야 하는 치료에서 미세한 교합을 제 깜냥으로 과연 잘볼 수 있을까 불안에 떨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하버드 외과 전공의 아툴가완디의 Complication(한국번역본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를 읽고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의사의 보람에 대해 깊이 감명을 받은 터라, 진료와 수술을 환자의 삶을 바꾸는 기회라 여기며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닥친 사정없는 구강 앞에서는 그들 삶을 망치지만 말길.. 정신 바짝 차려라.. 그리고 제발 나를 비난하지 말길 하는 심정이 컸습니다.
대부분의 주민 입장에선 섬 내에서 웬만한 건 다 해결해야 했습니다. 육지까진 하루에 1회 뜨는 배로 적어도 4시간은 타고 나가야 인천연안부두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 치과까지도 1~2시간은 나가야 했으며 결국 육지에서 하룻밤은 머물러야 했습니다. 변덕스러운 바다 날씨에 따라 배가 안 뜨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서 연안부두에 가면 직원과 주민이 거의 몸싸움할 정도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며칠씩이나 섬으로 못 돌아갈 위험을 안고 육지 치과를 가려면 정말 큰 의지나 각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비용도 비용이고 막상 나갔다가 못 들어오면(장마청에 비가 많이 오면 일주일을 배가 안 뜬 적도 있습니다.) 섬 내의 일상도 상당히 망가지기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섬 내에서 해결해야 했고 그 대부분이 보건지소에서 해결했습니다.
한 번은 한 환자가 심근경색이 왔다며 백령병원 내과의에게 응급 헬기를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과의는 절차에 따라 심전도를 찍었는데 결과는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환자가 “지금 이상해요, 다시 찍어주세요”라고 하면, 내과의는 “네, 알겠습니다” 하며 계속 검사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거의 스무 번이나 심전도를 찍은 끝에야 환자가 실토했습니다.
사실은 따님의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날씨가 나빠 배가 뜨지 않자 헬기를 타고 육지로 나가려고 심근경색을 가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응급 헬기는 군사지역 특성상 전투기 두 대가 일정 거리까지 엄호해야 하고, 비용만도 수천만 원이 들었습니다. 모두 세금과 군사력이 투입되는 일이라, 안타깝지만 환자의 말을 그대로 들어줄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무튼 공보의 초반에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제게 상당히 파격적인 구강을 맡겨주신 어르신들 덕분에 진료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해던 저는 교수님 두 분께 매번 치료계획을 이메일을 보내 점검받으며 진료를 이어나갔는데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괴롭지만 즐거웠던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보낸 메일에 정성스럽고 자세한 피드백이 도착하면,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받는 도움이라 더욱 감사한 마음이 절로 끓어오르곤 했습니다.그 덕분에 환자를 대할 때는 더 이상 쫄지 않고, 교수님의 피드백이 담긴 치료 계획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상담하고 치료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