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知音)이란 종자의 거문고 연주를 백아가 알아봐 주었다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를 이른다. 이 고사에서 종자는 지음인 백아가 죽자 거문고 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살면서 지음(知音)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우선 지음이 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기가 어려운 일이며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지음이라고 신뢰하기까지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흔히들 평생에 걸쳐 1명의 지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무엇을 지음이라 일컫을 수 있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선 '음'을 정의하기 어렵다. 쉽게는 본인의 가장 가치있는 면을 음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 그 가치 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것이며 숨겨져 있어 본인조차 망각하기 일수인 그것에 적당한 이름을 정하는 일은 막막한 문제이기도 하다. 누구는 존재라 부르고 누구는 마음 누구는 본질이라 부를 그것을 보다 구체적이고 확립된 언어로 표현하려는 것은 바람에 이는 물결을 손 안에 담아두려는 시도 일지 모른다.
'지' 또한 말하기 어렵다. 여기서 지-알다는 동사는 음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으니 음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의미의 결이 달라진다.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할 수도 있고 지속적으로 알아가는 자세나 혹은 알려는 의지를 말하는 걸 수도, 혹은 이런 모두를 포함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일 수 있다. 결국 더 이상 명확할 수 없는 그대로 지음, 그저 내 음을 알아줌 이라는 언어가 그 의미를 표현하는 한계라고도 생각된다. 따라서 지음을 얻는 문제는 인생의 가장 큰 난제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살면서 단 한명의 지음이라도 얻는다면 그 삶은 실패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지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것보다 우선시 해야할 건 자명하다. 최소한 자기의 '음'을 스스로 알아야만 혹은 적어도 그 결을 꽤 정확히 느끼고는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서는 지음을 찾을 오감을 가질 수 없다. 자기 음을 모른다면 우연히 그걸 알아줄 귀인이 다가와도 그대로 떠나 보내면 다행이요 운이 나쁘면 상처를 주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시간이 지나 노인이 되어 죽기 전에 후회할 수도 있다. 요컨데 지음을 찾는 능력은 스스로의 문제이자 정신수양의 문제이고 자기가 스스로의 지음이 되는 청음 능력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오로지 스스로가 스스로의 지음이 되는 조건 하에서 만이 외부의 지음이 될 귀한 손님을 그대로 대접할 수 있고 곁에 둘 수 있으며 나 또한 그 사람의 지음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지음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행운을 새삼 알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야심한 밤에 지음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반성이다. 이것은 방종에 의한 결핍이고 한편으론 세상적 긴장과 불편 속에서 지음에 대한 그리움이며, 어쩌면 지음이라 할만한 지기를 얻었음에도 쉽사리 놓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경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