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안 Oct 14. 2019

<히스토리 보이즈>, 소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연극은 두 번 할 수 없어

연극 하다가 매체로 간 배우들은 소위 연기의 '각'이 깎이는 데 5년은 걸린다고 한다. '각'이 무엇일까? 흑백영화 시절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베티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연극배우는 영화 연기를 위해 큰 제스처를 버리고, 감정의 그림자가 약한 근육 수축만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 베티 데이비스(1908-1989). 꼰대같은 말 좀 해도 된다. 필모부터 연기력까지 레전설이라(…)

연극 연기는 기본적으로 매체 연기보다 과장되어 있다. 일단 관객과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먼 곳에서도 잘 보이도록 크게 움직여야 하고, 마이크도 쓰지 않으니 기본적인 발성이 무척 크다. 클로즈업이 따로 있지 않으니 언제나 온 몸이 연기하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영화 연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클로즈업이 들어올 때에는 얼굴 근육을 나직하고 섬세하게 써야 하고, 속삭이듯 말해도 된다. 카메라가 워낙 가까이 들어와 있으니 관람객은 다 알아볼 수 있다. 


물론 관람자가 이 차이를 평소에 자주 의식하게 되지는 않는다. 관객은 무의식중에 연극을 볼 때에는 연극 연기의 문법에 적응하고, 드라마를 볼 때에는 드라마 연기의 문법에 적응한 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차이를 가장 도드라지게 느끼게 되는 때가 있다. 연극에서 같은 배역을 연극 전문 배우와 매체 전문 배우(※ 영화 연기를 더 많이 하는 배우)가 나눠서 연기하게 될 때다.


이 차이를 가장 극심하게 느꼈던 건 2016년에 유연석의 <헤드윅>을 봤을 때였다. 유연석은 때로 너무 작게 말해서 잘 안 들렸고, 손가락이나 눈짓 같은 작은 몸짓을 활용했다. 난 꽤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종종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뒷자리나 2층 관객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2016년 공연했던 유연석 헤드윅. 너무 예뻐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가 헤드윅의 감정에 제일 일치할 수 있었던 관람이기도 했다. 유연석의 헤드윅은 정말 슬펐고 감성적이었다. 보다 나의 일상 생활에 가까운 연기였기 때문에 그 마음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며칠 후 보았던 다른 배우의 헤드윅은, 몇 년 동안 극찬을 받아온 스테디셀러 캐스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차고 우악스럽다는 인상이었다. 유연석의 헤드윅이 모노드라마였다면 그 배우의 헤드윅은 보다 쇼에 가깝다는 인상이었다. 이입하기보다는 화려한 볼거리를 보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 배우가 못한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매체 배우의 접근법이 더 어울리는 배역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오늘 소개하는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헥터 선생이 딱 그런 역할이다.


이제는 돌아오지 못하는 배우 이야기


<히스토리 보이즈>는 2013년에 초연되었다. 그리고 헥터 선생은 언제나 극의 중심이었다. 


헥터는 정말 어려운 역할이다. 선하면서 이상적인 교육자인데, 동시에 성추행범이다. 그리고 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이 히스토리 보이즈의 핵심이다. 어떻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두 가지 면이 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히스토리 보이즈는 단순히 학생들의 악몽으로 추락하고 만다. 


히스토리 보이즈는 한국에서는 2013년 초연되었다. 어떻게 그 간극을 메워서 2019년의 4연까지 끌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알았다. 바로 캐스팅 때문이었다.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배우를 잘 뽑았던 것이다(…)

영화판 <히스토리 보이즈>의 헥터 선생.
3연까지 헥터 캐스팅의 핵심이었던 최용민 배우. 영화판보다 더 착해 보이는 인상이라 생각한다.

3연까지 헥터를 맡았던 최용민은 연극보다 매체에서 자주 보이던 배우였다. 그가 맡는 역할은 어수룩하거나 순하거나 익살맞은 중년 어른이었다. 영화, 드라마 등의 매체를 주로 했으니 섬세한 감정 연기에도 능했다. 그런 배우가 이중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완전히 적역이었던 셈이다. 


최용민은 앞서 말했던 매체 배우의 이점을 모조리 살려 헥터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는 정말로 헥터의 문학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고, 동시에 헥터의 괴벽조차 이해해 주고 싶을 만큼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나쁜 짓을 한 게 맞지만, 그가 쫓겨나는 것은 막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관객으로서 그런 마음이 들게 했으니 <히스토리 보이즈>를 여기까지 끌고 오게 한 주역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관객들이 배우를 사랑하게 되면서, 극 속의 악덕은 잊혀졌던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배우가 진짜 성추행으로 추방당했다(아이고야…;) 그리고 비로소, <히스토리 보이즈> 4연의 문제점이 시작된다. 

4연에서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중년 남자 배우를 캐스팅했다. 그와 비슷한 배우를 데려올 수 없으니 아예 연기 스타일이 다른 배우를 데려와 다른 방식으로 돌파하려 했던 것 같다. 연출이 어련히 잘 선택했으려니 싶으면서도, 한편에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중년 남자 배우는 보통 선이 굵은 리얼리즘 연기에 특화되어 있다. 그런 배우가 헥터를 연기한다면, 최용민이 비밀스럽게 숨겨놨던 극 속의 추행이 관객 앞에 만천하에 까발려질 것이다. 


오늘 보고 왔다. 슬프게도 걱정이 맞았다. 헥터 역을 맡은 중년 배우는 기존의 연극 문법 그대로 연기를 했다. 우락부락한 발성과 아주 정확한 발음. 테크닉적으로는 정말 훌륭했는데, 캐릭터 해석에는 다소 성의가 없었다. 보통 배역이었다면 상관 없었겠지만, 헥터는 보다 세심하게 다뤄야 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1~3연에서는 헥터의 어두운 면 중 하나로만 기능했던 성추행 소재가 4연에서는 완전히 전면으로 드러나 버린다. (계속 성추행 성추행 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한데 이 소재를 예술로서 잘 승화시킨 게 히스토리 보이즈의 저력이었다) 


덕분에 극 내용에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들이 급격하게 늘었다. 조금 슬프다. 약간 "나의 히보는 이렇지 않아!"라는 기분이랄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봤던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런 연극이 아니고, 그것은 정말 최고였다고 말한다 한들 연극은 현재성의 예술이다. 연극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하고 있는 연극만이 의미를 갖는다. 내일 다른 배우가 연기한다면 그것은 다른 연극이다. 


마찬가지로 3년 전에 했던 <히스토리 보이즈>는 다른 연극이다. 내 기억 속의 연극과 똑같은 연극은 딱 한 번 할 수 있고, 이미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도 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최용민에게 돌아와 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사라진 배우다. 그와 같은 몇몇 배우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지 못하고 구시대의 어법으로 살아가다 소멸해 버렸다. 관객들은 더 이상 그들이 나오는 연극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아쉽다면 오늘 보는 연극을 똑바로 기억해야만 한다. 연극은 언제나 그렇게 봐야 한다. 그러니 이런 것도 쓰는 게 아니겠나. 잊지 않으려고. 



덧. <히스토리 보이즈>의 다른 변화


헥터가 심각해지니, 다른 배역들이 가벼워졌다.


3연까지의 <히스토리 보이즈>는 다소 어둡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특히 헥터와 함께 두 개의 주축을 이루는 어윈 캐릭터가 그랬다. 지적이고 섹시하면서, 심지어는 다소 악독한 구석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번 <히스토리 보이즈>는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 쪽으로 연출한 느낌이다. 헥터가 무거워지면서 반대로 나머지 주연 배우의 연기 톤을 높인 느낌이랄까? 


예를 들어, 최용민이 주연을 할 때에는 나머지 주연들이 최용민에 맞추어 비밀스럽고 어두운 톤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박은석의 데이킨은 장난기와 명민함과 사악함의 밸런스가 훌륭했다. 손승원의 포스너는 데이킨 못지 않게 굳건한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음주운전으로 추방). 김태구의 데이킨은 아예 잔재주를 빼버리고 마초 느낌을 전면적으로 살렸다. 그리고, 한때 계속 회자되곤 했던 이명행과 김병희의 어윈은 캐릭터 본연의 스마트함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헥터와 함께 탄탄하게 극을 지탱했다(※ 그리고 이명행은 연극계 미투 운동의 창시자가 되어 추방).

못 돌아오는 사람들 얼굴이나 보고 갑시다 / 출처: (왼) tong (오) bnt뉴스

반면에 이번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중성이 없다. 포스너는 대본의 글자 그대로 살랑거리고, 김찬호의 어윈은 똑똑하지만 어수룩하고 사랑스럽다. 때로는 아예 로맨틱 코미디처럼 연기해 버린다. 김찬호 캐스팅 자체가 아예 무해한 보이즈 러브를 노리겠다는 뜻으로도 읽히는 지경이다. 


강영석 데이킨은 너무 청량하고 멋있는 캐릭터라, 가끔은 고급 어휘를 쓰는 반휘혈처럼 보이기도 한다. 밝은 톤의 <히스토리 보이즈>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침 강영석이 지옥에서 온 난이도의 연극 <R&J>를 하느라 살이 쪽 빠져서(…) 잘 어울리더라. 

기분 탓인지, 포스터 연출 자체가 전 시즌과 다른 느낌이기도…

이렇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올라가니 코미디 신이 잘 살아났다. 이전의 관람보다 훨씬 관객들이 웃음 터지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래, 그냥 재미있게 봤으니 된 거 아니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성공적인 실험,《리더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