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리더스》에 대한 미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극장에 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확신 없이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극장이라고 할 만한 커다란 건물은 안 보이고, 지은 지 몇십 년이 되어가는 오래된 건물들만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거린 후에야 알았다. 그 낡은 건물의 아주 작은 공간이 극장이라는 것을.
네? 극장이요? 여기에요?!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의 창문에 붉게 빛나는 네온사인. 비가 와서 종이를 오려 붙인 입간판이 젖어들어갔다. 할머니가 옆에 알로에 잎을 늘어놓은 좌판을 지키고 있었다. 계단은 최소한 80년대, 더 오래되었다면 70년대에 지어졌을 법했다. 군데군데 깨진 타일과 드러낸 시멘트가 의구심을 자아내는 가운데, 낭만적인 연극 대사들을 프린트해 붙여놓은 것만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줄 따름이었다. 다 올라가자 커다란 입간판이 보였다. "종로예술극장."
이 극장은 뭘까? 극장이 맞을까? 이렇게 커다랗게 극장이라고 적어놨으니 맞긴 하겠지. 하지만 얼마나 낡고 지친 극장인지가 중요했다. 곰팡이 냄새 나는, 무딘 얼굴의 점원이 표를 끊어주는, 시트지 붙인 세트의 구석이 너덜거리고 지친 배우가 공연하는 극장은 솔직히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극장에서도 명작은 피어나겠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위에서 쓴 어떤 것도 거기에는 없었다. 책장이 가득 찬 벽을 따라 빙 둘러앉은 관객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활기찬 청년이 크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종로예술극장입니다!
(진짜로 당황했다…)
종로예술극장, 매력적인 공간
종로예술극장. 극장이자 카페인 공간의 이름이다. 2011년 창단한 극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를 맞아준 청년들은 카페 종로예술극장의 웨이터이자 바리스타고, 동시에 극단 종로예술극장의 배우들인 셈이다.
바로 이 사람들이다. /출처: 이뉴스데일리 여기는 평상시에 카페로 운영된다. 전시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카페의 불을 끄고 공연을 시작한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던 카페 손님들이 그대로 공연의 손님이 되는 식이다.
공간이 공간인 만큼 요란한 무대 장치는 없다. 전기 설비 일을 겸임하는 배우가 직접 설치한 조명 장치는 무척 소박하고, 특별한 음향 장치도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쓰면 이 공연이 마치 학교 극단에서 진행되는 향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이 약점을 보완하는 것은 이 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이다. 그리고 공간을 채운 배우들이 다급해 보이지 않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사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생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 전업 배우로만 살기에는 생활이 어려운 탓이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전기 배선 기사나 강사, 사무직 등의 일을 하며 이 공간을 버텨나갈 자금을 모은다고 한다. 실제로 《리더스》 공연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루어졌다)
내가 종로예술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는 이 사실을 잘 몰랐다. 그래서 나는 마치 벽과 문 하나 사이로 허름한 종로의 길바닥에서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앨리스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직원(=배우) 한 명이 나에게 티켓팅을 하라며 오른편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티켓팅하는 점원(=배우 =바리스타)는 직접 손으로 써 온 명단을 대조하며 내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티켓과 팜플렛과 스티커 드릴게요. 그리고 저희 공연에서는 무료로 음료 한 잔이 제공돼요. 고르시면 만들어서 자리로 갖다드릴게요."
보통 공연에서는 생수 정도만 반입할 수 있다. 목마른데 아이스티 쪽쪽 마시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이 공간이 마음에 드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는 마치 만화에 나올 것 같은, 완전히 새로운 극단인 셈이다.
책과 책장으로 가득 찬 카페 내부는 그대로 연극 세트가 된다. / 출처: 종로예술극장 인스타그램 (@jongnotheatre)
젊은 공간에서의 정통 연극, 이 새로운 느낌은 마치
이제 연극 이야기를 해 보자. 내가 보았던 말이다. 《리더스》 커뮤니티의 연극 팬들은 이런 말을 했다.
연극을 좋아한다면 무조건 꼭 이 연극을 봐라.
《리더스》는 그들이 2014년에 직접 각본을 써서 초연까지 올린 공연이다. 당시에도 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올해의 인기는 더 본격적이었다. 이 소규모 극단에서 올린 공연 치고 놀랍게도 2차 연장 공연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간 날에도 빈 자리 하나 없이 매진이었고, 그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매진이라고 했다. 대체 이 연극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사람들을 매혹했을까?
첫 장면은 책으로 가득 찬, 불을 꺼서 어두운 카페 안에서 시작한다(그러니까 지금 관객들이 앉아있는 책으로 가득 찬 '종로예술극장' 공간 말이다. 이 책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협찬받았다고 한다). 배우들은 아까 관객들을 자리로 안내하고 서빙하던 평상복 차림 그대로 불이 꺼진 카페 안에서 책장에 램프를 비추어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 책들은 사전에 인스타그램으로 신청받은 책이다. 다 읽은 배우는 한 명 한 명 문을 닫고 나간다.
마지막 배우가 책을 다 읽었다. 그가 책장을 덮는다. 쾅쾅쾅. 그 순간, 누군가가 엄청난 소리로 문을 두드린다. 끼이익, 현관문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분장을 하고 무대의상을 착용한 사람이 들어와 방금 전에 책을 읽던 배우를 체포한다. 그리고 모든 조명이 꺼진다.
이 첫 장면은 스토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러나 《리더스》라는 극 안에 드리워진 불행과 불운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관객이 있는 시공간과 극 속의 공간을 도치시켜, 마치 현실의 내가 위협당한 듯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시공간은 100년 전의 시리아로 이동한다.
100년 전 시리아에서 생전 처음 연극을 본 관객들이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던 악역을 때려눕힌 후 주인공을 구해 극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시리아 최초의 연극을 공연한 깝바니와 동료들이 대중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연극이 금지된다.
연극이 금지된 이후 우회적이고 외설적인 그림자극을 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연극 금지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육지책으로 그들은 관객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한다. 비밀경찰의 감시 속에서 책 읽기가 시도되는데..
등장인물은 총 5명이다.
카페의 주인이자 배우들의 리더 격인 깝빠니(홍수영 분)
연극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벗어나 혁명을 꿈꾸는 배우 하킴(이양호 분)
이미 혁명을 시도한 적 있으며 그 댓가로 5년 동안의 수형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배우 하싼(고현준 분)
막내로 순수하고 무대 경험도 적은 유니스(길정석 분)
그리고, 예전에는 동료 배우였지만 이제는 비밀 경찰이 된 쟈키(성천모 분)
이 연극의 모든 등장인물은 연극을 갈구하고 있다. 심지어 악역으로 나오는 쟈키조차 연극에 얽힌 과거가 있다. 말하자면 연극 《리더스》는 무거운 금지가 자신들을 내리누르는 상황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예술혼을 펼쳐보이려는 연극인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카페에서 외설적인 그림자극을 하는 것도, 책을 읽어주는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도 자신들의 처지에서 어떻게든 연극과 비슷한 것을 해내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그리고 연극 속의 그 모습은, 당연히 실제 종로예술극장의 배우들과 겹쳐 보였다.
연극 《리더스》는 극단 종로예술극장이 왜 이곳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우화와도 같다. 연극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배우들의 생활은 '연극이 금지된 100년 전의 시리아'라는 배경으로 치환된다. 생활고는 문득 공격적으로 찾아오는 비밀경찰의 모습으로 그들을 위협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어주며 자신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달래는 배우들의 모습은 바로 여기, 종로예술극장 공간 자체를 그대로 재현한 바에 다름 아니다.
물론 모든 상황을 1:1로 대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더스》에는 예술을 갈구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진정성이 있었다. 이곳에서밖에 공연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연극이 유난히 많은 사람에게 가닿은 것이다.
진정성, 삶에서 우러나오는
물론 극의 완성도도 훌륭했다. 스토리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어 묵직한 힘이 느껴쪘다. 배우들도 잘 훈련된 정극 배우들이었다.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현장감이 살아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배우들은 카페 공간에서 관람하던 관객들을 일어나게 해 복도를 가로지르면 나오는 전시 공간에 앉도록 한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 그림자극이다. 배우가 직접 나와 그림자만으로 해내는 그림자극이다. 그것도 극중 연극 금지 조치를 이끌어낸 극중극 '시리아 최초의 연극'이다.
경건하고 아름다운 극중극이다. 사랑과 연민, 공감과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연극이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예술이구나, 라고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이런 것을 금지 조치하는 당국이 얼마나 악랄한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연극이기에 사람들이 연극을 한다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리더스》 속의 주인공이 고문과 죽음을 감내하고 연극을 한다고 깨닫게 된다. 종로예술극장의 배우들이 연극을 한다고 깨닫게 된다.
마지막 장면, 막을 찢고 나오는 배우들 /출처: 종로예술극장 인스타그램 (@jongnotheatre)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시대에,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한 글자도 꺼내지 않고 관객을 감명시키는 연극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절박한 열정으로.
공연 정보
● 공연 기간
19.03.15~19.07.28 (끝났습니다… 다음에 재연하면 보러 가세요…ㅠㅠ)
● 극장 컨디션
일반적인 극장은 아니지만 건물 연식에 비해 관리가 잘 된 편이다. 화장실도 깨끗하다!
다만 에어콘이 오래되어 연극 중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배우도 시작하기 전 한 번 주의를 줄 정도로 그 소리가 무척 큰 편.
● 추천 대상
평상시에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무겁고 주제의식이 깊은 정극을 좋아한다면 취향에 안 맞을 리가 없다.
● 알고 보면 좋은 팁
공연 전 종로예술극장 인스타그램(@jongnotheatre)에서 DM으로 낭독 신청을 받는다. 그날 낭독한 책은 연극 도중에 촬영해서 끝나자마자 인스타그램에 올려 주니,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면 바로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