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안 Jul 15. 2019

연극에 대한 연극의 찬사, <R&J>

"왜 연극을 할 수밖에 없을까?" 에 대한 대답

※ 연극 《R&J》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래 화제작이었습니다


R&J》의 이름을 들은 것은 2018년 여름, 그러니까 작년의 지금쯤이었다. 심심하면 들어가는 연극뮤지컬갤러리(이하 연뮤갤)에서 이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 캐스팅만 진행된 상황이었지만 다들 이 작품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좋은 느낌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 이런 식의 댓글이 달리곤 했던 것이다.

대놓고 덕후들 지갑 노리고 만든 거 아니냐?


물론 세상의 모든 작품은 대놓고 남의 지갑 노리고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유달리 '잘 먹히는' 코드를 많이 넣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로 치면 대규모 블록버스터 같은 것이다. 연극·뮤지컬의 경우 팬이 많은 배우들을 많이 캐스팅해서 깊은 드라마를 만드는 작품이 쉽게 반응을 얻는다. 2007년 대성공을 거두고 지금까지 상연되고 있는 《쓰릴 미》에서부터 시작된 공식이다.


마찬가지로《R&J》또한 그렇게 읽힐 만한 텍스트가 많은 작품이다.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몰래 연기하는 4명의 사춘기 남학생


문장 안에 노골적으로 읽히는 텍스트가 너무나 많다. 물론 소재는 죄가 없다. 하지만 상업적인 히트만을 노렸을 때 저 소재들이 어떤 식으로 오염될 수 있는지도 뻔하게 보인다. 그리고 팬들은 그런 작품을 쉽게 감지하며, 금방 등을 돌린다(곁가지로 이야기하자면 연극·뮤지컬 팬들의 성향은 꽤 재미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쓰는 걸 아끼지 않지만, 대신 자신이 돈을 쓰는 작품은 그 수준과 매력을 엄정하게 따지는 편이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적절한 작품 이야기에서 또 풀고 싶다). 그러니 아무리 소재가 파격적이고 로맨스가 절절한들, 일정한 작품성을 갖추지 않으면 금세 막을 내리고 말 것이다.


《R&J》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몇개월 후 다시 연뮤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이 작품을 언급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해석을 쏟아 놓으며, 배우의 표현법을 캐스팅마다 분석하고, 중요 소재인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해석하며 컨텍스트를 풍부하게 늘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 아주 오랜만에 나오는 수작인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19년, 재연이 열렸다. 나는 재연이 열린 지 3일만에 작품을 보러 갔다.

포스터는 2018년 버전이지만…


초여름,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생소한 극장이었다. 10년 가까운 서울 생활 중 동대입구역에서 내려본 적은 처음이었다. 대학교 내에 위치한 극장에 들어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해랑 예술극장의 외부.
내부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반적으로 극장과 대학교 건물의 중간값이라는 느낌이 물씬 든다.

이해랑 예술극장. 이해랑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붙여진 극장이다. 그는 한국 연극의 1세대 배우고, 연극계 대부라고 했다. 극장 입구 앞의 깊은 지하실에는 그를 기리는 전시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곳을 돌아보았다. 그가 쓰던 아주 오래된 대본이 전시실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1950년대 공연한 연극의 대본이라는 짤막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1950년대의 연극. 그 연극은 대체 어땠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1950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1950년대에 한국에 있었던 굵직한 일을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했다.


1950년 1월, 한국 최초의 징병검사가 이루어졌다.

1952년, 이희호 여사가 '여성문제연구회'를 조직하며 우리나라 1세대 페미니스트로서의 첫 번째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추진한 캠페인이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1954년,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이 진행되며 초등학교 취학률이 5년만에 96.4%를 달성했다. 거의 동시에 한국의 교육열 열풍이 시작되었다(이건 너무 현대적이어서 놀랍다).

1955년, 영화 <자유부인>이 엄청나게 흥행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다.


말하자면 한국이 아직도 근대화의 길을 걷던 시점에 누군가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가져와서 공연의 형태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다지 주류 예술 취급받지는 못하는 연극이 당대에 어마어마한 대접을 받았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이해랑 선생도 극심한 집안의 반대 속에서 힘겹게 연극을 시작해서 하나의 예술로 정착시켜 놓은 셈이다.


덧붙여 동국대학교 연극학과를 창설한 사람도 이해랑 선생이라고 한다. 이해랑 예술극장은 한국연극 100주년, 동국대 연극학부 창설 50주년을 맞아 2008년 11월 29일 개관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예술가 이름을 걸고 탄생한 공연예술 전문 극장이라고.

이해랑(李海浪, 1916-1989)

《R&J》는 작년에도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극장 내부로 들어가면,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인 나무 무대가 보인다. 클래식한 객석과 무대 중간중간에 놓여진 무대석 두 가지의 자리 중 하나에 골라 앉을 수 있다. 나는 공연을 전반적으로 조망하고 싶어 일반 객석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 공연이 시작된다. 나는 그 순간이 제일 좋다. 차분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울려퍼지면 핸드폰을 끄고 가방을 끌어안고 텅 빈 무대를 바라본다. 나를 둘러싼 공기에 기대감이 가득 차 있다. 객석을 비추던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면, 앞으로 어떤 일이 시작될지 전혀 알 수가 없고, 나는 오로지 내 마음의 일렁거림 안에만 잠겨있게 된다.


그때,《R&J》는 가장 강렬한 박동으로 관객으로서의 나를 깨웠다. 암전 상태에서 빛보다 먼저 들이닥치는 쿵, 쿵, 쿵, 쿵, 발 구르는 소리로.



쿵, 쿵, 쿵, 쿵

발 구르는 소년들


다시 한 번 이 연극의 시놉시스를 살펴보자.

《로미오와 줄리엣》을 몰래 연기하는 4명의 사춘기 남학생

그리고 이 《R&J》라는 연극이 어떻게 이 시놉시스를 표현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내가 봤던 날의 캐스팅.


1. 움직임


소년들은 발을 구른다. 뛰고 밀치고 넘어진다. 그 움직임만 보아도 이들이 사춘기 남학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벗어나 금지된 연극을 한다'는 시놉시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에너지를 가둬두는 것은 거의 천형에 가까워 보이므로.


(물론 연기하는 배우들은 평범한 20대 중후반 남성이므로… 5분만 지나면 땀에 흠뻑 젖기 시작한다. 그 상태로 2시간 반이 훌쩍 넘는 공연을 소화한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진다. 과연 작년 초연 때는 일주일만에 다시 봐도 살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2. 트레일러


신기한 트레일러다(유튜브 링크) 극을 보지 않은 사람은 사춘기의 금지된 사랑 등의 단편적인 해석 정도로 이해할 테지만, 보고 나온 사람은 트레일러에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금지된 사랑 너머에 있는 금지된 욕망, 금지 그 자체에 대한 분노, 금지 그 자체를 넘어선 세상에 대한 갈망이다.


3. 무대


상당히 미니멀하다. 나무로 된 교실 바닥을 떠올리게 하는 긴 무대 양 옆으로 오래된 책상들이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학생들이니만큼 화려한 무대장치나 소품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텅 빈 강당을 연상케 하는 무대다.


학생들이 연극 소품으로 유일하게 활용하는 건 빨갛고 긴 천 하나 뿐이다. 이 천은 상황에 따라 줄리엣을 감싼 옷자락이 되기도 하고, 티볼트와 머큐쇼가 서로 겨누는 칼끝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무척 심플한 장치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천이다. 워낙 드라마틱하게 나오기 때문에 '빨간 천 대배우'라고도 불린다…


4. 《로미오와 줄리엣》


뉴욕타임즈는 이 연극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고결하지만은 않은, 야성적이고 무제한의 열정. ('로미오와 줄리엣'이지만) 배경은 베로나가 아니다. 칼과 망토가 나오지 않고, 여자도 나오지 않는다. 금지된 섹스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북소리와 발구름 소리와 연기가 나온다. 소년들은 그들의 숨막히는 세계에서 전쟁을 선포한다.

- 「Romeo and a boy named Juliet」
Tabard Theatre에서 상연된 《R&J》/ 출처: THE STAGE (https://www.thestage.co.uk/reviews/2015/shakespeares-rj/)

생각해보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는 텍스트다. 일단 등장인물들이 너무 어리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기에는 그들의 사랑 너무 짧았다. 로미오는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이는 등 상당히 충동적인 면까지 보인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사랑보다는 사춘기의 신경증에 가깝다고 나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사춘기의 신경증. 사춘기의 욕망. 《R&J》가 《로미오와 줄리엣》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도 실제로 그 부분을 노렸다. 프로그램북에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한마디를 인용해 본다.

"R&J의 세계에는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연인, 그 둘의 금지된 첫 키스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을까?

두 남학생의 금지된 첫 키스라면 어떨까. 이 소년들이 있는 곳을 카톨릭 교리가 통제하는,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아니면 단순히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이 금지된 학교라고 설정한다면? 우리 앞엔 억압된 히스테리아가 꿈틀거리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R&J》는 거의 셰익스피어 글로만 이루어져 있다. 2018년에 발간된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85%는 로미오와 줄리엣, 10%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나 비너스와 아도니스, 한여름밤의 꿈에서 따왔으며 나머지 5%도 이런저런 인용문이라고 한다. 아마 소년들이 들고 읽는 물리 교과서 같은 것일 테다.


이 연극의 신기한 경험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분명 이 소년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연극을 하고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으로서 연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극중극이다. 로미오의 끓어넘치는 열정은 동시에 그를 연기하는 '소년 1'의 열정이다. 아버지에게 결혼을 강요받는 줄리엣의 절망은 동시에 학교의 규율과 억압으로부터 박해받는 '소년 2'의 절망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키스는 연극 속 두 등장인물의 가슴 아픈 애정표현인 동시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배경 남학교에 다니는 소년1과 소년2가 서로 입을 맞추는 성도착적 행위다. 연극은 소년들의 상황과 겹쳐지며 모든 대사와 연기가 이중의 의미를 담게 된다.


앞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춘기의 신경증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R&J》의 소년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의 상황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희곡이고, 그에 대한 파괴적 해답을 제시하는 텍스트이고, 반항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서? 그들을 둘러싼 억압에 대해서.


5. 열정


그러나 연극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마주했던 학생들은 결국 학교로 돌아간다. 최후의 순간까지 반항하는 이는 로미오 역을 맡았던 소년 1이다. 짤막하게나마 해방의 순간을 느꼈던, 연극을 통한 열정의 분출을 맛봤던 그에게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그에게 줄리엣 역을 맡았던 소년 2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이렇게 생각해. 어떤 환상이 보이는 동안 잠들었던 거라고. 그리고 끝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꿈처럼 헛된 일이라고 절망하지는 마."


이 대사는 이 연극이 말하는 바를 가장 축약해서 담고 있다.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내가 되는 것. 나의 답답한 현실을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풀어내는 것. 남들 몰래 밤중에라도 표출해낼 수밖에 없는 열정. 그게 바로 연극을 탄생시킨 가장 본질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마지막 순간, 이 연극은 연극에 대한 연극이자 연극에 대한 찬사가 되는 것이다.



다시, 이해랑 예술극장의 앞에서


연극을 보고 나오며, 나는 이 극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이해랑 선생은 1989년 숨을 거두었다. 죽는 순간까지 무대 위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얄궂게도 그가 준비하던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이었다.


어떻게 1950년대의 한국에서 연극을 만들어나갈 생각을 했느냐고 이해랑에게 묻는다면, 《R&J》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시대였다고. 그 시대에 연극을 한다는 건 비록 환상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꿈처럼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공연 정보

 공연 기간

2019.07.16 ~ 2019.09.29


● 극장 컨디션

간만에 너무 좋은 극장이다. 동대입구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편하게 올라갈 수 있고, 걸어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인 데다 가로수가 있어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 화장실 칸수도 적지 않고, 그곳이 붐빌 경우에는 화장실 방향으로 50m 정도만 더 올라가면 다른 건물로 연결된 화장실을 쓸 수 있다.


 추천 대상

웰메이드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해석이 필요한 복잡한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 셰익스피어 매니아.


● 알고 보면 좋은 팁

근처에는 편의점이 없지만, 이해랑 예술극장의 왼쪽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할 수 있다. 카페가 닫힌 주말이라면 왼쪽 건물에서 염치불구하고 정수기의 물을 떠마실 수 있다. 학교라서 이런 편의시설 이용이 가능하다…!(민폐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용하자)


대학가인 만큼 먹을거리도 많다. 교내에는 버거킹이 있어서 급한 끼니를 해결하기 좋다고 한다. 장충공원이 근처에 있으니, 데이트를 하러 왔다면 근처에 들러도 좋겠다. (하지만 정작 절대로 데이트용 연극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쉬어 매드니스> 재밌죠, 30년동안 재미있었거든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