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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May 01. 2021

잠을 잘 자지 못했던 아이

그 아이가 커서 내가 되었다네요

어렸을 적 엄마의 두 무릎에는 시커먼 색소침착 자국이 있었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허리가 너무 아파서 네 다리로 기어 다녔던 흔적이라고 한다. 입덧은 또 얼마나 심한지 두유밖에 못 먹어서 임신 후반기까지 쇠꼬챙이처럼 말랐다 했다. 임신 중의 증상도 그대로 유전된다던데, 향후 5년 안에 출산을 하려고 마음먹은 나로서는 지금부터 비장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다.


세상 밖으로 나온 후에도 기르기 쉬운 애가 아니었다. 같이 가게에 가면 가게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뛰어다녔다. 내가 아끼던 동화책이 어느새 반대편 소파에 놓여 있어서, 중고등학생쯤 되는 언니들이 키득거리며 읽고 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밤에 자려고 불을 끄면 울기 시작하는 아이였다. 밤새 울다가 해가 밝으면 잠에 들었다. 엄마가 안고 밤새 두드려 주면 조금 자다가도, 멈추면 귀신같이 우는 아이였다.


내가 이 이야기를 빨리 전해 들었으면 어떤 연유를 빨리 짐작했을 텐데. 나의 가장 근원적인 취약점이 수면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새벽에 부담감 없이 일정한 시간에 잠들 수 있게 된 게 몇 년 되지 않는다. 사실상 2년 정도밖에 안 됐다. 내 나이가 지금 서른다섯이니, 젊은 시간은 모두 잠드는 것과 싸우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에는 항상 늦게 잤다. 마음만 먹으면 밤을 새우는 게 너무 쉬웠다. 아무리 피곤한 밤에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항상 수면시간이 부족하니 아침에는 일어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중학교에 들어간 첫 해부터 나는 학교 수업은 하나도 안 듣고 시험기간이 되어서야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낮에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고, 밤에는 불안감에 만화책과 잡지를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낮에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게을리하게 됐다. 


수면위상 지연 증후군(delayed sleep phase syndrome, DSPS)

밤에 잠들기 어려워 불면증을 호소하거나 늦게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기 어려워 늦게 일어나거나 일찍 일어나더라도 주간 졸음과 사회적 활동 저하를 호소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춘기와 젊은 성인에서 높게 나타나며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의 장애를 보이며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수면센터 https://www.snubh.org/dh/main/index.do?DP_CD=NCD17&MENU_ID=005006


프랑스 작가가 쓴 <몸의 일기>라는 소설이 있다. 작중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병들어 죽을 때까지 오로지 자신의 몸의 변화만 관찰해서 일기로 쓴다. 정말 지극히 프랑스 소설다운, 별 내용 없는데 있는 것처럼 쓴 소설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 몸에 적응해서 사는 과정은 <몸의 일기>에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잘 잘 수 있는지 안다. 다행이랄지, 나는 내 수면습관이 오로지 나의 게으름 때문일 뿐 불면증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수면제는 거의 먹지 않았다(좀 먹는 게 나았나 싶기도 하고…) 대신 잠을 잘 오게 하는 영양제를 죽어라 찾아다녔다. 이제는 블루보넷의 킬레이트 마그네슘에 정착했다. 한 알 먹고 누워 책을 읽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 든다. 직접적으로 잠을 재우는 영양제라기보다는 예민한 신경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만들고, 편안해지다 보니 잠이 드는 원리의 영양제라서 그렇다. 전에는 나만 알고 있어서 구매하기 편했는데, 재작년 말쯤 한 약사 유튜버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람에 툭하면 아이허브에서 품절되고 있다. 다 좋으니 나 살 한 병은 남겨줘라, 사람들아. 

공익을 위해 공유합니다. 저 살 것만 남겨주세요…

주기적으로 운동을 다닌다. 특히 달리기를 통한 유산소에 중점을 둔다. 몸이 피로하다 보니 잠이 잘 오는 것도 같다.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채광이다. 책상은 항상 창가에 있다. 일할 때 햇빛을 받기 위해서다. 작년에 갑자기 불면증이 찾아왔을 때는 아침부터 옥상에 올라가 햇빛을 쬐곤 했다. 멜라토닌 합성을 위해서였다. 


이제는 어렵지 않게 잠이 든다. 그래도 새벽 두세 시까지 깨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당장 이 글도 새벽 두 시 반에 쓰고 있다. 그러면, 내 몸이 불편하지 않은 직장을 구하면 된다. 나는 이제 유연근무제를 시행하는 직장만 다닌다. 지금의 직장은 아예 재택근무를 한다. 그러면 나는 새벽 두세 시에 잠들고서도 6~7시간의 잠을 잘 수 있다.


그래도, 그래도 잠들 수 없는 밤은 온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사람이 모든 면에서 진보할 수만은 없는 거 아니냐고. 가끔은 내가 아닌 다른 요인으로 실패하게 되고, 그러면 그냥 내버려 두자고.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해도 내일까지 잠 못 드는 건 아니라고. 당장 그렇게 학창 시절 동안 엉망으로 잠들며 힘든 생활을 보냈어도 지금 나는 이럭저럭 스스로를 잘 추려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냐고. 


살면 살수록 나는 나의 몸과 타협하고, 몸을 타이르고, 결국 몸과 화해하게 된다. 지금은 몸과 사이가 좋아서 좋다.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사이가 좋은 게 늘 더 좋은 법이니까. 


+ 엄마도 학창 시절에 잠을 그렇게 못 잤다고 한다. 하루 6시간 이상 자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유전자 지도를 만들어보면 나를 지배하는 질병의 90%는 유전이라는 걸 알게 된다던데, 난 유전자 지도를 만들 게 아니라 엄마랑 한 10시간 앉아 엄마의 자서전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곧 나의 과거고 미래다. 그런데 지금 엄마는 잘만 자고 잠 못 드는 나를 이해 못 한다. 너무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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