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품격(10): 명품 조연의 의인화, 유재명

바닥을 딛고 거인이 된 배우의 서사

by 동물의삽


유재명은 화려한 데뷔작도, 극적인 발견의 서사도 없이 그저 묵묵히 무대를 밟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대학로 소극장의 좁은 무대에서 관객 50명 앞에 서는 일을 반복했다. 연극 <맥베스>, <햄릿>, <위대한 캐츠비>에서 그는 조연으로, 때로는 단역으로 무대 위 공기의 밀도를 익혔다.


카메라 앞에서는 NG를 다시 찍을 수 있지만, 무대 위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숨소리 하나, 시선의 각도 하나까지 관객과 직접 호흡해야 하는 그 긴장의 시간들. 유재명은 그 시간을 통과하며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몸으로 새겨갔다. 화면 속에서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 존재감은, 사실 무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숨 쉬는 공기의 높이를 모두 경험한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기량이었다.



1. 이름 없던 '학주'가 '거물'이 되기까지


https://youtu.be/_5JJqkkGHDU

우리는 그를 2015년 쌍문동 골목에서 처음 만났다. 1988년의 공기를 그대로 복사해온 듯한 경상도 사투리, 엄격함 뒤에 숨겨진 허당미. 그때의 그는 '동룡이 아빠' 혹은 '학주'였다. 캐릭터는 독보적이었지만, 배우 유재명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아직 대중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옆집 아저씨를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183cm 거구와 본능적인 연기 감각을 숨긴 채, 우리 곁에 아주 친숙한 모습으로 잠입해 있었을 뿐이다.


<응답하라 1988>이 유재명에게 준 것은 인지도였지만, 그가 작품에 남긴 것은 그보다 훨씬 정교했다. 성동일, 이일화, 김성균이라는 쟁쟁한 '아빠 라인' 속에서도 학주만의 결은 뚜렷했다. 무뚝뚝한 가장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아들 동룡의 낙제 성적표 앞에서 보이는 당황, 아내 조부장 앞에서의 어설픈 다정함은 계산된 코미디가 아닌 '사는 이의 진심'이었다. 유재명은 이미 그때, 자신이 하나의 캐릭터로 소비되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기억되는 법을 알고 있었다.



2. 조승우를 산산이 압도하는 중력, 이창준


https://youtu.be/1ynohrwBF4w

2017년, 유재명은 숨겨왔던 거인의 발톱을 드러낸다.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그는 황시목(조승우)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을 자신의 거대한 설계도 안으로 품어버린다. 조승우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산산이 압도하는' 그의 포스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었다. 뒷짓 하나, 낮은 저음 한마디로 화면의 공기를 얼려버리는 그 위압감. 대중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알던 그 학주가, 사실은 한국 드라마의 품격을 바꿀 거대한 설계자였다는 것을.


이창준이라는 캐릭터의 무서움은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논리 안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이며, 그 합리성이 타인의 생명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조차 냉정하게 받아들인다. 유재명은 이 '시스템화된 비정함'을 연기하면서도 단 한 번도 캐릭터를 만화처럼 과장하지 않았다. 조승우가 감정 없는 검사로 화면을 지배했다면, 유재명은 감정을 완벽히 통제하는 CEO로 그 위를 군림했다. 두 배우의 대결 구도는 결국 '칼날'과 '중력' 사이의 긴장이었고, 유재명은 그 중력의 중심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3. 웹툰의 평면을 찢고 나온 입체적 괴물, 장대희


https://youtu.be/iUhkCm5ocew

<이태원 클라쓰>의 장대희는 유재명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웹툰 속 전형적인 악역은 유재명의 몸을 빌려 지독하고 끈적한 '노인의 집념'을 입었다. 특수분장의 주름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안광, 자수성가한 자의 비정한 카리스마. 모두가 제 역할을 다한 현장에서도 유재명의 연기가 '찬사 일색'이었던 이유는, 그가 악역을 단순한 기능이 아닌 하나의 정교한 '비즈니스 전문가'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장대희는 분명 악인이다. 하지만 유재명은 그를 증오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바닥에서 시작해 재벌의 정점에 오른 자의 생존 본능, 자신이 쌓아올린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 그 모든 것이 유재명의 눈빛 하나, 입꼬리의 미세한 떨림 하나로 설득력을 얻었다. 웹툰 독자들조차 "실사화는 이래서 위험하다"던 우려를 거두고 "장대희는 유재명이 맞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2차원의 캐릭터에 3차원의 무게와 온도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4. 비루한 현실을 사운드로 채우는 전문가, 창복


https://youtu.be/syFCSY2AmQM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유재명은 다시 한번 몸을 낮춘다. 유아인의 침묵을 대신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창복의 수다스러운 사운드는, 역설적으로 영화에 지독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시신을 수습하는 비루한 뒷처리 업자를 경건한 전문직(?)의 포스로 그려낸 그의 연기는 이 영화의 닻이었다. 그가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퇴장하는 순간, 관객은 현실의 단단한 평지를 잃고 기괴한 심연으로 떨어진다.


창복은 유재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작은' 인물일지 모른다. 권력도, 재산도, 위엄도 없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죽음의 뒤치리를 하는 남자. 하지만 유재명은 이 비루한 캐릭터를 통해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건드린다. 그의 수다는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이고, 지나치게 친절한 말투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정당화하려는 몸부림이다. 유재명은 창복이라는 인물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가 사라진 후 관객이 느끼는 공허함을 정확히 계산했다. 그의 부재가 곧 영화의 추락 지점이 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5. 처음 마주하는 권력의 물리적 부피, 전상두


https://youtu.be/wqQhyX9boZ8

최근작 <행복의 나라>에서 유재명은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또 다른 전두환'을 완성한다. 실제 인물은 단신이었으나, 유재명은 183cm의 피지컬을 활용해 권력의 비대함을 시각화했다. 차갑게 통제된 목소리와 거대한 실루엣은 모사를 넘어,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대의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를 물리적인 중량감으로 증명해낸다. 그는 실제보다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권력이 어떻게 시스템이 되는지를 연기한다.


전상두를 연기하면서 유재명이 선택한 것은 '재현'이 아닌 '재구성'이었다. 실제 전두환의 외형적 특징을 따라하는 대신, 그가 휘두른 폭력의 크기를 자신의 신체로 번역했다. 군복 위로 펼쳐진 넓은 어깨,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존재감,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바닥을 짓누르는 듯한 중량감. 유재명의 전상두는 역사적 인물의 흉내가 아니라, 그 시대를 짓눌렀던 '공포 그 자체'의 형상화다. 관객은 그를 보며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짓밟고 역사를 왜곡하는지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가짜를 압도하는 '진짜'의 무게


유재명은 실제 인물의 키나 외형이라는 1차원적 데이터를 넘어, 그 인물이 시대에 남긴 '영향력의 크기'를 연기하는 배우다. 실제는 단신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휘두른 칼날이 거대했다면, 유재명은 자신의 거구를 꼿꼿이 펴서 그 압도적인 중량감을 관객의 눈앞에 물리적으로 들이민다.


이름 모를 조연에서 시작해 주연을 압도하는 거인이 되기까지, 그가 보여준 궤적은 결국 '본질은 가려지지 않는다'는 명제를 증명한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서, 우리는 배우 한 명이 빚어낼 수 있는 품격의 높이를 비로소 가늠하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배우의 품격(9): 켜켜이 다져진 명배우, 염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