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품격(11): 정의할 수 없는, 크리스토퍼 워큰

배우를 넘어 장르가 된 남자, 크리스토퍼 워큰의 품격

by 동물의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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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워큰은 정의할 수 없는 배우다. 코미디언인가, 악역 전문가인가, 캐릭터 배우인가. 그 어느 것도 맞고, 그 어느 것도 틀렸다. 그는 50년이 넘는 커리어 동안 장르의 경계를 지우고, 주연과 조연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워큰이 사실 고전적인 미남에 가까운 매력적인 외모와 좋은 발성, 댄서 출신답게 완벽하게 통제된 동선까지 모두 갖춘 배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그 조건들을 전형적인 주연 스타의 공식에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기들을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사용했다. 독특한 말투와 리듬, 보는 이를 압도하는 눈빛. 워큰은 어떤 역할을 맡든 '워큰 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매번 전혀 다른 인간을 창조해 낸다. 그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그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것이 그를 끝판왕으로 만드는 이유다.



https://youtu.be/OuGSXflBoWU

1978년, 워큰은 '디어 헌터'로 세상에 각인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철강 도시, 러시아계 이민자 공동체에서 사슴 사냥을 즐기던 평범한 청년 니크.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의도적으로 도입부 결혼식 장면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끌고 가며, 그들의 일상과 유대감을 천천히 담아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이후 돌아온 니크의 산산이 부서진 모습과의 잔혹한 대비를 완성했다.


워큰은 사슴 사냥을 즐기던 순수한 청년에서, 러시안룰렛에 중독된 망가진 인간으로의 추락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의 눈빛에 담긴 공허함은 전쟁이 인간에게 남긴 상처를 말없이 증언했다. 이 작품으로 워큰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고, 그의 커리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https://youtu.be/6_G7-opxBLQ

1993년, 타란티노의 각본을 토니 스콧이 연출한 '트루 로맨스'에서 워큰은 단 한 장면으로 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 영화는 타란티노 특유의 캐릭터 폭발력 속에서 크리스천 슬레이터, 패트리샤 아케트, 데니스 호퍼, 게리 올드먼, 브래드 피트가 만화 같은 인물들을 쏟아냈다. 그중에서도 워큰이 연기한 마피아 보스 빈센조 코코티는 유일하게 현실의 무게를 가진 캐릭터였다.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속은 사악함으로 가득한, 그러나 결국 폭력으로 해결하는 속물근성을 가진 실제 마피아의 모습을 소름끼치게 보여 준다. 특히 데니스 호퍼와의 대결 장면, 그 유명한 '시칠리아인' 독백 씬에서 워큰은 처음엔 여유롭게 대화를 즐기다가 서서히 드러나는 냉혹함으로 화면을 장악했다. 만화 같은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쉬는 인간을 연기한 것이다.



https://youtu.be/Dile5Ka0jw0

워큰은 1985년 '007 어 뷰 투 어 킬'에서 맥스 조린이라는 지적인 악역을 연기한 바 있다. 그러나 1992년 팀 버튼의 '배트맨 리턴즈'에서 그는 또 다른 '맥스'—맥스 슈렉을 통해 훨씬 입체적인 악당을 완성했다. 고담시의 부패한 사업가이자 권력자인 슈렉은 펭귄(대니 드비토)과 캣우먼(미셸 파이퍼)이라는 강렬한 캐릭터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워큰이 이 캐릭터에 불어넣은 것은 단순한 '악'이 아니라 '체제화된 부패'였다. 특히 엔딩에서 캣우먼에게 전기 충격으로 죽임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권력자의 오만함을 잃지 않는 그 퇴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1편의 조커(잭 니콜슨)에 못지않은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https://youtu.be/NHiG4hmxkjQ

1997년 '수어사이드 킹'은 상업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워큰이라는 배우가 한 편의 영화를 혼자서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증명한 작품이다. 전직 마피아 킬러가 은퇴 후 평범한 삶을 살다가 과거와 마주하는 이야기. 대부분의 장면이 한 공간, 한 밤에 집중되어 있고, 워큰 특유의 절제된 연기와 예측 불가능한 긴장감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관객은 이 캐릭터가 다음 순간 어떤 선택을 할지, 폭발할지 침착함을 유지할지 전혀 알 수 없다. 막판 엔딩까지 반전과 긴장이 이어지면서 90분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오롯이 워큰의 연기력 덕분이었다.



https://youtu.be/nrH4BfEM21o

2002년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워큰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인간적이고 비극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천재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버지 역할. 한때 성공했지만 몰락해 가는 사업가로, 아들에게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영웅이고 싶어 하는 인물. 워큰은 이 무너져가는 아버지의 자존심과 슬픔, 그리고 아들에 대한 사랑을 특유의 절제된 연기로 표현했다.


그는 진짜 아버지였지만 그 자리를 지켜주지 못했고, 빈 곳을 역설적으로 FBI 요원(톰 행크스)이 채워주게 된다. 하지만 프랭크에게 뛰어난 지능과 교양, 세상을 읽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분명 친아버지였다. 워큰은 실패한 아버지이면서도 아들의 능력을 만든 스승이라는 이중성을 완벽하게 표현했고, 이 캐릭터를 단순한 무능한 아버지가 아닌 비극적이지만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냈다.




정의할 수 없기에 영원한

크리스토퍼 워큰은 사악한 악역에서 기괴한 생명체까지, 코믹한 아버지에서 냉혹한 킬러까지, 모든 것을 연기할 수 있는 괴물이다. 그러나 그를 괴물로만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언제나 인간의 본질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역할을 맡든 워큰은 그 캐릭터가 숨 쉬는 이유를 찾아내고, 관객이 공감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화면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마법을 부린다. 크리스토퍼 워큰. 정의할 수 없기에, 영원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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