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 품격(5): 거장들과 로버트 리차드슨 촬영감독

빛의 폭군이 벼려낸 무시무시한 진실의 질감

by 동물의삽

로버트 리처드슨 촬영감독은 1955년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서 공부한 미대오빠 출신이었는데요. 이후 영화인들의 성지라 불리는 AFI에서 촬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에서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예일 출신의 괴짜 감독 올리버 스톤의 부름을 받고 '플래툰'으로 본격적인 상업 영화 촬영 감독으로 커리어를 굵직하게 시작했습니다.



1. 광기와 결벽의 충돌: JFK가 쏘아 올린 은빛 탄환


로버트 리처드슨의 초기 경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치열한 전쟁이었는데요. 다큐멘터리의 날것을 품은 그가 마주한 파트너는 지독한 완벽주의자 올리버 스톤 감독이었습니다. 특히 영화 <JFK>의 암살 장면은 촬영과 편집의 극한을 시험한 무시무시한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죠.


https://youtu.be/2nmGS8rVuIM

올리버 스톤 감독은 암살 장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려 7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는 파격적인 방식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촬영 과정에서 리처드슨이 담아낸 카메라의 떨림이 예상보다 과해 보이자, 스톤은 왜 내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느냐며 처음에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후 편집실에서 그 떨림을 제대로 목격한 스톤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혼란과 현장감이 바로 이것이라며 매우 흡족해했습니다. 리처드슨 촬영 감독의 의도대로, 암살 장면의 불꽃 튀는 긴박감과, 암살범(이 누구든 간에)의 심리 상태, 화면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호흡마저 하나로 만드는 기가 막힌 장면이 탄생했기 때문이었죠.


이어진 후반부 작업에서 스톤 감독은 오직 암살 장면만을 위해 촬영된 3시간 분량의 필름을 100회 이상 재편집하며 단 17분으로 압축해 버렸습니다. 리처드슨은 자신의 촬영분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며 내 촬영을 다 죽였다고 격분했는데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독한 압축과 의도된 떨림이 오히려 촬영의 밀도를 선명하게 살려냈고, 이는 그에게 첫 번째 아카데미 촬영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2. 스코세이지의 강박과 리처드슨의 빛: 애비에이터와 휴고

https://youtu.be/FK827IJqNXQ

이후 리처드슨은 마틴 스코세이지라는 또 다른 거장을 만나 기술적 정점을 찍었는데요. 영화 <애비에이터>에서 그는 스코세이지의 지독한 색채 강박을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시대별로 다른 테크니컬러의 질감을 재현하며 하워드 휴즈의 광기를 눈부신 메탈릭 광채로 벼려내는 데 성공했죠.


다만 기술적으로는 리처드슨의 근소 우위였으나, 그 해에 맞붙은 영화가 하필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기에 작품상과 감독상에서는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리처드슨은 두번째 오스카를 품에 안았죠.



https://youtu.be/vWS5KlqgpR8

도전은 멈추지 않았는데요. 영화 <휴고>에서 그는 스코세이지와 함께 생애 첫 3D 디지털 촬영에 도전합니다. 3D를 단순히 눈속임이 아닌 단단하고 묵직한 공간의 깊이로 재정의한 그는, 디지털 3D 영화 최초로 촬영상을 받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휴고>의 기술적인 면은 여전히 찬사를 받았으나, 스코세이지에게는 여전한 갈증으로 남은 절반의 승리로 남고 말았네요. 2012년 아카데미 작품상은 압도적으로 흑백 무성영화라는 본질로 돌아간 걸작 <아티스트>에게 돌아갔습니다.



3. 70mm 설원에서 서부시대의 잡화점 무대로


https://youtu.be/uoMq1CENffg

리처드슨이 가장 즐거운 작업이라 대답한 파트너는 쿠엔틴 타란티노였는데요. 특히 영화 <헤이트풀 8>은 영화적 문법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도전이었습니다. 도입부의 광대한 설원은 관객에게 거대한 스케일의 기대감을 주지만, 정작 주무대는 폐쇄된 잡화점 내부였습니다.


그는 50년 넘게 잠들어 있던 70mm 울트라 파나비전 렌즈를 꺼내 들어, 그 넓은 포맷으로 밀실의 공기를 분자 단위로 압축해 냈는데요. 인물들 사이의 살의와 의심을 낱낱이 해부하는 그 렌즈의 위력은 관객들을 숨죽이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해 촬영상은 예쁜 영화 <라 라 랜드>에 돌아갔는데요. 기술적 성취와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리처드슨의 70mm가 더 깊고 강렬한 자국을 남겼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4. 마침: 황제의 귀환을 기다리며


https://youtu.be/mbtgEE6rkxw

이제 리처드슨의 카메라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전기 영화 <마이클>로 향하는데요. 올해 최고 기대작 중의 하나인 이 작품은, 실제 MJ의 조카인 자파 잭슨이 주연을 맡아 혈통의 정통성을 잇고 있습니다. 과연 이 영화에서, 리처드슨은 또 어떤 선명한 빛의 마법을 선보일지 기대가 큽니다.


기술은 찬사를 받되 마음을 얻기는 어렵다지만, 리처드슨이 담아내는 장면들만큼은 관객의 심장을 가장 단단하게 관통하고 있는데요. 화려함을 압도하는 도전적인 미학이야말로 진정한 영상의 품격임을 그는 매 작품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스포 없는 감상기(2): 프로젝트 헤일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