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팔 할, 20세기 전자 오락실 이야기(7)

8비트 시대의 팔방미인, 애플 II PC

by 동물의삽

Apple II 시스템


80년대 말, '재믹스'파와 'MSX'파가 화려한 컬러 화면을 두고 설전을 벌일 때, 진짜 고수들은 각진 베이지색 상자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컬러 모니터조차 사치였던 그 시절, 왜 우리는 녹색 모니터의 텍스트와 5.25인치 드라이브의 소음에 열광했을까요? 애플 II는 단순한 컴퓨터가 아니라, 8비트 시절의 가장 완벽에 가까운 마법사였습니다.


그때 애플 II의 전원을 켜면, 지금의 정적에 가까운 PC 소음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드르륵, 슥-' 플로피 디스크를 읽어 내려가는 그 투박한 기계음이 들리는 순간, 우리는 현실 세계를 떠나 8비트의 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죠. 교육용 컴퓨터라는 명분 아래 부모님을 설득해 얻어낸 애플 II. 그 속에는 국영수 교과서보다 훨씬 더 방대한 우주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추억의 애플 II 시스템)


다만 70년대에 개발된 PC라서 최신 기종이었던 MSX보다는 사양이나 성능이 뒤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애플 유저였던 친구들은 게임 성능에서는 MSX의 화려한 컬러와 사운드를 부러워했습니다.


반면에 MSX유저들은 애플의 방대한 소프트웨어와, 대부분의 MSX 유저에겐 그림의 떡이었던 디스크 드라이브를 부러워했었죠. 롬팩은 가격이 너무 비쌌고 테이프는 로딩이 오래 걸린 반면에, 애플의 디스크 드라이브는 저렴한 가격에 비교적 빠른 로딩으로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집에 MSX가 있음에도 애플이 있던 친구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습니다. 오늘 올리는 이 글도 당시의 추억을 바탕으로 쓸수 있었죠.



애플 컴퓨터는 70년대에 설계되었음에도 뛰어난 확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애플 II의 메인보드)


그 이유는 뼛속부터 공돌이(?)였던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워즈니악의 설계에 대해 경영의 귀재 스티브 잡스는 확장슬롯을 줄이자고 종용했지만, 워즈니악이 뚝심으로 밀어붙였는데요. 결국은 애플 컴퓨터의 성공을 이끌어낸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보드 오른쪽에 쭉 늘어선 8개의 확장슬롯이 든든해 보이네요)


그래서 애플의 기본형 컴퓨터는 매우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피씨에 투자할 여유가 있다면 확장 카드를 통해서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머킹보드나 마우스 등을 추가하는 것이 가능했죠.



주변기기들


애플의 주변기기들은 MSX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요. 특히 조이스틱은 애플의 느긋한(?) 속도에 맞추어 여유로운 플레이를 하기에 잘 어울렸습니다.

(애플용 조이스틱입니다. 제 친구가 쓰던 것은 맨 왼쪽에 있네요)


주로 왼손이나 오른손으로 조이스틱 본체를 감싸 쥐고, 나머지 손으로 스틱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플레이했는데요. 그래도 이런 조이스틱으로 올림픽이나 카라데카 같은 액션게임까지 모두 소화했습니다.


(EPYX의 하계올림픽 게임입니다. 여러 종목들이 아기자기하게 잘 구현되어 있었죠)


(장대높이뛰기 플레이화면)


자료사진에는 컬러로 나오는데요. 애플의 내장 그래픽은 최대 6색(...)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해상도도 떨어졌기에 보통은 흑녹색 모노크롬 모니터를 이용했습니다. 그래도 그 화면 속에 세상이 펼쳐졌었죠.


(인기 대전액션(?) 게임, 카라데카입니다. 저 뿔 달린 캐릭터의 무시무시함은 당해본 사람들만 압니다)


(애플용 마우스의 변천사입니다)


애플의 마우스는 지금처럼 PS/2 포트나 USB포트가 없던 시절이기에 메인보드의 확장슬롯에 직접 꽂아서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상당히 크고 아름다웠죠.


(애플용 머킹보드입니다)


애플의 사운드는 내장 스피커의 비프음으로 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요. 이 머킹보드를 장착하면 무려 6화음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졌고, 두 개의 보드를 이용할 경우에는 12화음까지 출력이 가능했습니다.(물론 외부 스피커가 필요했음)


대표적으로 울티마 V는 두 개의 보드와 8화음을 지원해서, 애플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운 사운드를 들려주었죠.


그리고 애플을 소개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소프트웨어가 있는데요. 바로 서브로직에서 만든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입니다.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가정용 컴퓨터에 구현한 게임이었죠.


보잘것없는 그래픽에 단조로운 사운드였지만, 한번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중독성을 자랑했는데요. 주말이면 FS를 하느라 방구석에 처박히는 남편들 때문에, 마나님들의 불만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1983년에 애플용으로 발매한 FS2)


(게임 화면)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게임에 푹 빠져있던 빌 게이츠가 강력하게 인수를 추진했다는 루머가 있습니다.(나중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 걸 보면, 사실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FS의 판권을 인수했으며, 그 뒤로도 시리즈가 쭉 이어져서 FS 2024까지 이르렀습니다.



애플 IIe


우리나라에 주로 보급된 기종은 애플 II+ 호환기종이었는데요. 80년대 중후반에 비로소 애플 IIe가 시장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APPLE II enhanced)


(애플 IIe의 광고입니다. 무려 128kb나 되는 메모리 용량을 자랑하기에 이름도 MR128이군요)


80년대 후반에 교육용 컴퓨터로 16비트 IBM 호환기종이 채택되면서, 애플의 전성기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주변 친구들도 금성 마이티, 삼성 알라딘, 삼보 트라이젬등 16비트 컴퓨터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저도 삼보에서 나온 AT로 컴퓨터를 바꾸고 잠시 PC게임과는 떨어져 지내게 되었네요.(물론 콘솔은 있었습니다)



애플 II용 추억의 게임들


이대로 글을 맺기엔 아쉬워서, 제가 플레이해 보았던 추억의 게임들을 몇 개 올립니다. (이미 섬머 게임즈와 카라데카를 소개했으므로, 5개만 추려서 올립니다)


https://archive.org/details/apple_ii_library_4am

여기는 애플 2 게임들을 즐길 수 있는 아카이브인데요.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번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물론 주말이 순삭 될 수 있음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



캡틴 굿 나이트

https://youtu.be/Thew30tyvz4

플레이타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갈수록 불지옥 난이도가 펼쳐지는 바람에 승부욕을 화르륵 타오르게 했던 게임이죠.


F-15 스트라이크 이글

https://youtu.be/w2ZebXiE_yo

유저들로 하여금 진짜 전투기의 조종석에 앉은 듯한 현실감을 준 게임입니다. 194년에 발매되어 1987년에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판매량인 100만 장을 넘기면서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죠.



페르시아의 왕자

https://youtu.be/c8kN-NQAdAk

도스 시절을 기억하신다면 이 게임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1989년 첫 발매 이후로 계속 인기리에 시리즈가 이어져, 2025년에도 신작이 좋은 평가와 함께 사랑을 받고 있죠.



울티마 시리즈

https://youtu.be/b0XqwyM7ISs

한때 엔씨 소프트와 합작했었던 전설적인 개발자 리처드 개리엇이 창조한 롤 플레잉 게임, 울티마 시리즈입니다. 비록 그래픽은 기종의 한계로 별로였지만, 그 속에 담긴 세계관과 플레이는 거의 철학적인 수준으로 게임의 위상을 높였죠.



윈터 게임즈

https://youtu.be/adH3Jwb3uXo

위에 소개한 epyx의 동계 올림픽 버전입니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소음이 멈추고 게임의 로딩 화면이 뜰 때의 그 희열을 기억하시나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애플 II와 함께 보낸 가장 치열했던 혹은 가장 즐거웠던 한 장면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댓글 창을 통해 여러분의 8비트 연대기를 들려주시기를 기대하고 있고요.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기 바라며,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그 시절 애플 II의 추억 속으로 빠져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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