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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부품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 차 대리의 이야기
헤르만 헤세는 자신이 자아를 향해 달리는 방식을 ‘쓰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실적인 한 인간의 이야기가 모든 인간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라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란 존재는 그저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가 앞에 있든지 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내 앞의 누군가가 두렵다는 건 스스로를 다스리는 힘을 타인에게 맡겨 버렸기 때문이야.”
- <데미안> 중에서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개성 있게, 나답게 살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까? 혹시 팀장이 나를 말 많고 불평불만만 하는 저성과자로 낙인찍지나 않을까? 그 낙인 때문에 동기들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후배들에게 추월당하지 않을까? 나 때문에 시스템이 고장 나면 어쩌나? 개성이고 인권이고 나발이고 일단 잘 보이면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다. 두려움은 자신만의 가치를 깎아 먹는다.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곤, 그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아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노예는 주인의 눈치를 본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결정한 것을 최종 평가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 자신은 영웅도, 쓰레기도 될 수 있다. 자신이 여기 있어도 좋다는 존재 의미를 주는 단 한 사람, 그 귀한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혔다. 자신의 자아 선택권을 팀장에게 위임한 것이다. 차 대리는 울고 싶었다.
“우리들은 공인된 것과 금지된 것을 각자 자신의 힘으로 찾아야만 해.”
- <데미안> 중에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우린 우리의 힘으로 찾아야만 한다. 그럴 힘이 없는 사람은 노예가 되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차 대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열린 그의 눈에 다음 문장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차 대리는 이 문장을 기억한다. 이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몇 번이나 공책에 썼더랬다. 차 대리는 왜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을까?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닐까.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이 반복되는 답답하고 지루한 삶을 상징하는 알. 그걸 깨려는 투쟁. 약해 빠진 현실 순응형 인간인 차 대리의 손에 알을 깰 방망이를 쥐여 주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차 대리는 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봤다. 알은 가능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알은 흰자와 노른자를 하나로 뭉쳐 생명을 만든다. 알이라는 혼돈스러운 질서는 새를 향해 꿈틀거리면서 나아간다. 정해졌으나 실체는 알 수 없는 것, 운명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무엇인가를 향해 변화 할 뿐이다. ‘뭔가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이미 나인가? 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나를 딱 이것이라고 가리킬 수 없었나?’ 차 대리는 점점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물처럼 흘러 흘러 어디론가 가고 있는 여정 자체가 나라면, 내가 그동안 꿈꿔왔던 자아상은 뭐란 말인가. ‘저게 나야! 저렇게 회사에서 잘나가고 연봉 많은 사람이 바로 나야! 이게 바로 나란 말이야!’라고 외치며 가리켰던 자아상은 오히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방해하는 것들이었단 말인가.
차 대리는 《데미안》을 읽으면서 회사 생활에 지친, 내면 속 또 다른 자신을 불렀다. ‘어디 있니? 괜찮은 거지? 아직 거기 있는 거지? 내가 너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잔뜩 침울해진 차 대리의 눈에 다음 문장이 꽂혔다.
나는 살기 위해 내면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 <데미안> 중에서
데미안의 충고대로 차 대리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일을 멈췄다. 책에 나오는 비유처럼 박쥐로 태어났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라는 데미안의 말을 차 대리는 곱씹고 곱씹었다.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은 불안하다. 그 길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단 사람, 내면의 속사람과 동행할 뿐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죽음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다 자신만 왕따 되는 거 아닌가, 낙오자 되는 거 아닌가 불안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데미안》의 에바 부인은 이렇게 되묻는다.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정말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아름답지는 않았던가? 당신은 이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 <데미안> 중에서
그렇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나’로서 살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버린다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이다. 다들 자기 삶도 무거워 휘청거리고 있는 판국에, 스스로 버린 삶을 누가 거두겠는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자기만의 꿈을 꿔야 한다. 그 무엇도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멈추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꿈을 발견해야 해요. 발견하고 나면 길이 한층 쉬워지지요. 물론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하지만 반드시 또 다른 새로운 꿈이 나타나지요. 그러니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
- <데미안> 중에서
차 대리는 자신에게 새로운 꿈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꿈은 늘 새로워야 하는 법이다. 차 대리는 지난 7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일기를 엮어 책으로 내기로 했다. 일기에는 자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수없이 많은 좌절과 그것보다 하나 많은 꿈들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었다. 헤르만 헤세가 했던 대로 그동안 자신도 ‘쓰기’를 하며 자아를 향해 달렸던 것이다. 차 대리는 이제 이 생생한 자아 선택의 과정을 나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글은 책 <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에서 발췌했습니다.
직장인 독서모임에 100권을 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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