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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가 Aug 30. 2020

열린 호텔로의 실험

빌라 아우구스투스

생일을 서울 밖에서 휴가로 보내긴 처음이었다. 가고 싶었던 졸업 여행도 서울행도 이렇다 할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가 끝난 뒤 휴가 날짜를 잡고서는 약간의 전투심까지 생겼던 것 같다. "이렇게 된 이상 가장 최고의 휴가를 보내고 말겠어" 일정은 주말을 끼고 겨우 2박 3일이었다. 졸업은 했지만 진행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가 하나 더 있었고, 그 외에도 비정기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어디를 멀리 오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탈 게 아닌데 어디에 오래 가있기도, 그만한 돈을 쓰고 싶지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대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궁극의 숙소를 찾기 위해 구글링에 며칠을 쏟았다. 최종 후보로 추린 곳은 암스테르담 시내의 도개교 제어실을 숙소로 바꾼 스위츠 호텔과 도르드레흐트 외곽에 위치한 빌라 아우구스투스였는데, "도시를 떠난" 휴가 느낌을 내기 위해 후자를 택했다.

여름의 호텔과 정원을 담은 Dorine de Vos의 일러스트 (출처: 빌라 아우구스투스)

정말 과장이 아니라 홈페이지에 접속해 메인을 장식한 이 일러스트를 보자마자 "아, 무조건 여기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전담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니!) 이 토끼는 호텔의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호텔 간판, 메뉴판, 접시, 계절 일러스트로 만든 엽서와 각종 기념품 모두에 등장한다. 밤의 풍경을 담은 일러스트에는 부엉이가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동물 모티브는 객실 내의 벽 장식, 러그 등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일러스트 중앙에 등장하는 호텔 건물은 1882년 지어져 1965년까지 쓰인 급수탑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문화재이기도 한 이 건물은 네덜란드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급수탑으로 물탱크와 직원들 숙소가 자리해있었다. 2002년 도르드레흐트 시청이 급수탑과 관리동을 포함해 해당 부지를 재생하는 계획을 세웠고 600만 유로를 들여 2007년 완성된 결과물이 지금의 빌라 아우구스투스이다. 도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고민하고 따져보고 할 것이 없었다. 

식당 야외 테이블에는 절화를 꽂은 화병 대신 콜라비와 바질, 비트 등 다양한 식물이 자라는 화분이 놓여 있다. 식사하는 자리에서 재료의 생장을 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외식 경험.
내 생일 8월은 항상 방학이었다. 어린 마음에는 친구들한테 왁자지껄 축하를 못 받는 게 서운했는데 해외를 오가기 시작한 뒤로는 서울에서 보낼 수 있는 날짜라 좋았다. 올해는 그렇지 못했지만 이름마저 "8월"인 완벽한 숙소를 찾았으니 설레고 신나는 마음이 앞섰다.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찾아보니 두 가지 설명이 나온다. 첫 번째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왔다는 것이다. 유능한 도시계획가이기도 했던 그의 통치 시절 바쁘고 붐비는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교외 빌라"가 등장, 상류층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까지 읽고 나니 이 숙소가 약간 운명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네덜란드의 기후에서 8월이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게 8월 중순의 정원은 가지 각색의 꽃과 채소들이 풍성하게 열려있었다. 장미, 다알리아, 능소화, 코스모스, 백일홍, 나팔꽃, 아미초, 양귀비, 라벤더와 오이, 호박, 토마토, 배, 사과, 무화과 등이 여름 햇살에 착실하게 영글어가고 있었다. 

사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호텔이지만,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고 고민해 볼수록 그 매력이 배가 된다. 근 몇 년 간 말 그대로 "범람"했던 도시재생이라는 키워드에 호기심 혹은 의구심을 가진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원래 있던 건물을 최대한 살려 객실을 꾸민 점, 기존 부지에 있던 구조물을 철거해 (혹은 다른 건축 폐기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담장, 높은 층고의 근대 건축물을 개조한 식당과 마켓은 무난하게 도시재생의 한 사례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의 미덕은 그 공식을 "유난하게" 탈피했다는 점에 있다.

내가 방문한 날은 네덜란드 기상 관측 사상 최장(8일) 폭염이 가신지 며칠이 안 됐을 때였는데 그 때문인지 다들 더 선명한 색으로 여름을 장식하고 있었다.

빌라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큰 매력은 정원에서 키운 작물과 절화, 오븐에서 구운 빵과 디저트, 그 외 정원용품 및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마켓이다. 급수탑이 기능하던 시절 펌프실로 함께 쓰였던 노란색 건물을 개조한 이 마켓이 일종의 대문 역할을 한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모두가 오가며 들를 수 있는 이 마켓 때문에 빌라 아우구스투스는 그 어떤 호텔보다도 활짝 열려 있는, 환대의 공간이 된다. 호텔은 기본적으로 지역사회에 속해있지 않은 외부인을 위해 기능하는 공간이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유도 관광객을 유치하는 방향으로 지역 경제가 발달할 경우 (에어비앤비로 운영되는 집들 때문에) 임대료가 오르거나, 필요한 근린생활시설이 점점 사라지는 등 기존 거주민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비용이 더 커지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반해 빌라 아우구스투스가 특별한 이유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실제로 구매를 하지 않더라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마켓"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에게 정화된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세워졌던 이 급수탑의 역사를 곱씹어보게 되는 지점이다. 양질의 농작물을 합리적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이 마켓을 통해 태생적으로 외부를 향해 있는 호텔은 지역사회에 더 친밀하게 자리한다.

급수탑에 올라 내려다 본 정원과 식당/마켓 건물. 뒷편으로는 지중해식 정원과 신축 floating house들이 자리해있다.

호텔 식당은 정원에서 갓 수확한 식재료들로 주마다 (동절기에는 열흘이나 보름 단위) 제철 메뉴를 구성한다. 흔히 "팜 투 테이블"로 불리는 자급자족 형태의 외식 공간은 유통에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 "자연이 주는 것만" 소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내가 방문한 주간에는 토마토와 함께 끓인 홍합요리, 펜넬과 구운 무화과, 부라타 치즈를 얹은 토스트, 구안찰레(이탈리아 가공육의 한 종류)와 라디치오(이탈리안 치커리)를 얹은 피자, 자두 타르트가 준비되었다. 대부분의 요리는 여전히 장작을 때는 오븐을 거쳐 서빙된다. 홍합과 구안찰레, 그 외 제빵에 필요한 재료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원에서 난 재료들로 요리를 했다. 특히 홍합 메뉴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는데, 원래 이맘 때는 캐나다산 랍스터를 활용한 요리가 여름철 대표 메뉴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채소 작물을 수급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육류나 생선류도 최대한 탄소발자국을 발생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그래서 환경에 (이롭진 않더라도) 해롭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홍합 요리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코로나19로 항공 수급이 쉽지 않은 영향도 없진 않았겠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고 그 이유를 부러 설명하는 것에 마음이 끌린다.

여지없이 등장한 토끼. 테이블 위 냅킨, 나이프, 접시 모두 마켓에서 기념품으로 구매할 수 있다

홍합은 네덜란드의 여름~가을을 대표하는 식재료이기도 해서 이맘때면 식당 곳곳에서 홍합 냄비(1인팟)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산 제철 재료를 사용해서인지 메뉴 하나당 가격도 10~15유로 선으로 매우매우아주많이 저렴한 수준이다. 네덜란드의 평균적인 외식 물가에 식재료의 신선도와 품질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따금씩, 큰 마음먹고,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외식 공간으로 찾을 수 있는 호텔 식당이라니! 식당이 지향하는 환경적 가치까지 생각하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다. 그 때문인지 일요일 저녁에도 그 넓은 매장이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지역주민들로 가득 붐빈다. 코로나19 때문에 테이블 간격이 넓어져 평소보다 수용인원이 적었을 텐데도 100명은 거뜬히 넘는 듯했다. 8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텔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보고 느끼고 온 것만큼 완벽한 생일 휴가가 있을까. 서늘한 바람이 불면 여행 가방 대신 장바구니를 챙겨 빵과 채소를 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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