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가 Apr 14. 2020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의 정치

내가 1년 간 살았던 우트렉은 암스테르담에서 30여분 가량 떨어져 있는 대학도시로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Dick bruna의 토끼, 미피의 고향이자,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헤릿 리트펠트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사는/살던 곳은 어떤 곳이야?"라는 질문에 가장 즐겨 답했던 이야기는 우트렉이 바로 세계 최초로 무지개 횡단보도를 계획, 영구 설치한 도시라는 사실이다.

어느 도시를 가든, 어느 나라를 가든 횡단보도는 대개 흰 선과, 멈춰 있는 빨간색 사람, 움직이는 초록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로 나란히 그어진 흰 선 안쪽 인도에 서서 빨간불에는 기다렸다가 초록불이 되면 주변을 살핀 뒤 건넌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볼 때 횡단보도 건너는 법을 찾아보지 않는 것은, 정확히 말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횡단보도라는 공간이 도시에서 또 교통 체계 내에서 그만큼이나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디에 가든 비슷한 모습의 횡단보도가 무지개 색을 입게 되면서 그 어떤 곳보다도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우트렉 이전에도 학생, 예술가, 운동 단체가 조직한 퀴어 운동의 일환으로 대만, 미국, 호주 등에서 설치된 적은 있지만 교통 법규 위반 및 주민들의 반대 여론 등을 이유로 금방 지워지곤 했다. 우트렉의 경우 주거 및 도시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녹색당 소속의 시의원 Pepijn Zwanenberg의 제안으로 설치, 2013년 6월 21일 공식적으로 선보였으며, 그 의의를 인정받아 시립미술관(Centraal Museum) 컬렉션으로 소장되었다. 2015년 연말에는 미피의 60주년을 축하하는 신호등이 설치되면서 우트렉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양성과 연대라는 가치가
지역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어떤 방식으로 존중되고 있는지를
여섯 가지 색만으로, 하지만 그 어떤 방식 보다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네덜란드는 2001년 4월 세계 최초로 동성혼을 법제화 한 나라로 매년 6월이면 전국 곳곳에서 성대하게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열린다. 하지만 꼭 퍼레이드 기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각자의 다양성을 축하하고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그리고 심지어 그게 "들어설" 필요도 없는 횡단보도라는 것은 다른 차원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이 시의회로부터 제안되었다는 것, 도시 정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생색내기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위치도 대범하다. 도시의 공동체적 가치를 공표한다는 위상에 걸맞게 시내에서 가장 붐비는 교차로를 차지했다. 일 평균 33,000대의 자전거가 지나가는 네덜란드에서 자전거 통행량이 가장 많은 교차로이자, 관광객이든 거주민이든 늘 지나치게 되는 중심부에 무지개색 카펫이 깔려있다. 이후 무지개 횡단보도는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로도 확산되어 기차역 앞이나 시내 중심가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두의 이목을 끄는 자리에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만한 모습으로, 하지만 이내 직관적으로 "아! 무지개!"라는 생각에 도달할 만큼 이 횡단보도는 잘 만들어졌다.


네덜란드의 횡단보도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별도의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 없이 모든 신호등이 음향신호를 함께 제공한다는 것이다. 수동 신호라면 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자동신호라면 설정되어 있는 간격에 따라, 대기할 때에는 느린 박자로 신호가 바뀐 뒤에는 빠른 박자로 소리가 난다 (동영상).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가 설치되어 있는 "일부" 횡단보도에서 시각장애인이 - 혹은 누군가 실수로 - 버튼을 눌러야지만 음성 안내가 작동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여느 날처럼 서울의 한 횡단보도에 서있다가 딩동댕-으로 시작하여 "건너가도 좋습니다"라는 안내가 나올 때 무의식적으로 "아 누가 시각장애인 신호를 눌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가 멈칫한 적이 있다. 한국의 선별적인 음향신호체계는 횡단보도에서 어떤 기계음을 들었을 때 왠지 주변을 둘러보게 한다는 점에서 동료 시민 간에 무례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암시한다.

성적 지향과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도시
공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덕을 나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배웠다
네덜란드의 횡단보도 수동 신호기. 설치연도에 따라 점자 여부 및 촉각 안내의 형태가 다르다 (출처: TU Delft)

네덜란드 어느 곳을 가나, 나를 포함해 누가 신호를 눌렀든 여지없이 들을 수 있는 "딱, 딱, 따따따따"하는 소리는 단순히 시각장애인용 인프라가 잘 되어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도시가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을, 그리고 도시 구성원들이 이를 학습하는 경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각장애인"용"이라고 쓰여있지도, 점자 안내가 별도로 구분되어있지도 않다. 어느 보행자든 길을 건너려면 눌러야 하는, 휠체어에서도 닿는 그 높이, 그 버튼, 그 자리에 촉각 안내가 새겨져 있다. 시각장애인이 직접 사용해 보고 문제를 맞닥뜨린 상황에서 고장을 신고해야 하는 한국과 달리 이곳은 누구든, 어쩌면 한 발 앞서 신고할 수 있다. 잘 보이지 않아서 문제로 인식 조차 되지 않지만 그만큼 교묘하게 작동하는 우리 사이의 경계를 아예 들어낸 것이다. 저상버스가 휠체어 이용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편리한 것처럼, 음성 신호도 시각장애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편리하다. 매일 사용하는 교통 시설을 모두가 동등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사회에서 동료 시민을 대하는 방식에는 당연히도 "유별"할 것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평한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