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을 보고 사람들은 ‘너무 영화 같다’ 라고 말한다. 남녀가 어깨를 부딪힌다. 허겁지겁 떨어진 책들을 주우며 손이 겹친다. 남녀는 동시에 움찔하며 눈빛을 마주치고 이내 사랑에 빠져든다. 그 외에도 결혼을 앞 둔 남자친구가 알고 봤더니 어렸을 적 헤어진 친 오빠 라던지, 장모가 될 사람이 알고 봤더니 홀로 계신 아버지와 애인사이다! 같은 일. 어이없는 우연이나 영화 같은 막장 스토리가 반복해서 펼쳐지게 되면 사람들은 ‘너무 영화 같다’ 라는 표현에 이어 ‘너무 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번 추석에 부모님과 함께 떠난 청산도 여행에서 ‘너무 뻔하고’ ‘영화 같은’, ‘드라마에서나 펼쳐질’ 일이 벌어졌다.
차가 진흙이나 모래에 빠진다.
‘위이이잉’ 신경질적인 소리가 함께 바퀴가 아무런 효용을 하지 못한 채 헛돌기만 한다. 그런 바퀴에 애꿎은 모래나 진흙들이 튀어 올라 남녀 주인공의 얼굴을 덮친다.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지만 어느 곳 하나 제대로 응답하는 곳이 없다. 폭풍우, 폭설 같은 자연재해를 핑계 삼아, 때론 전화기 너머로 ‘오늘 쉬는 날’ ‘해당 부서로 연결 하겠음’ 같은 대사가 흘러 나온다. 부패한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장면들도 빠질 수 없지. 주인공이 모든 걸 체념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히어로가 등장한다. 불쌍한 주인공을 멋지게 구해내는 진짜 영웅이 등장하고 영화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맺게 된다.
아주 뻔한 재난 영화, 히어로 영화 한편이 지난 추석 연휴 청산도 가족여행에서 탄생되었다.
아버지와 난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내가 생각해도 소름 돋을 정도로 너무 닮았다. 특히 기계에 대해 싫어하고 그런 두려움이 들길 까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하는 모습까지 어쩜 그리 똑똑 닮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운전을 오십 넘은 나이에 시작하셨고, 나는 나름 그런 아버지보단 그나마 좀 낫다 생각하지만, 컴퓨터부터 운전까지 잡다한 기계에 능한 형이 볼 때 면 늘 노심초사다. 그런 형이 일정상 참석 못한 이번 가족 여행에서 드디어 사고가 터져버렸다.
마지막 날, 아버지가 꼭 보고 싶어 하셨던 해변을 찾아가기 위해 티맵을 켰다. 아버지보다 좀 더 스마트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여러 경로 중에 5분 가량 빠른 지름길을 선택했고 티맵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일반 도로가 아닌 논두렁 길 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와중에 또 농사일을 위해 세워둔 경운기를 피하다 보니 도저히 전진도 후진도 하지 못할 정도의 좁은 길에 갇혀 버리게 된 것이다.
“하.. 우짜죠? 아버지?”
잘난 척하면서 지 혼자 잘 와놓고 이제서야 아버지를 왜 찾는지 모르겠다.
“다시 후진을 해야 안 되긋나? 무작정 간다고 될 일이 아이다.”
“그럼 아부지가 좀 나가셔서 봐 주시면…”
나보다 심한 기계치인 아버지의 안내를 믿고 외줄타기 같은 논두렁 길을 후진 해서 나오겠다고? 아니면 내가 나가서 보는….? 그럼 운전대는? 아버지가? 아니지. 그럴 바엔 차라리 어머니가 낫지.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논이었다. 트랙터가 오고 가는 걸 위해 논두렁에서 논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추수를 끝내고 좀 되었는지 벼는 가지런히 잘려 나간 채로 메말라 있었고, 논 바닥은 차가 지나가도 될 정도로 야무지게 잘 굳어 있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괜찮겠나? 물렁해서 바퀴 빠지는 거 아이가?”
어머니가 조심스레 만류 했다. 그땐 그 사실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고 현명하다는 걸. 그리고 아버지와 나를 포함한 셋 중에 그나마 제일 기계에 능한 사람이란 걸. ‘남자는 엄마랑 와이프 말을 무조건 들어야 된다’ 란 옛말이 그땐 생각이 안 났을 게다. 자신감 넘치게 논바닥으로 차를 몰았고 논바닥에 들어선지 1초도 채 되지 않아 ‘위이이이잉’ 소리를 내며 바퀴가 푹 빠져 버렸다.
이어지는 장면은 당황한 조연이 의미 없이 엑셀을 몇 번 더 밟아대는 것이다. 침착한 주인공은냉철한 눈빛과 함께 상황 파악부터 한다. 당황한 조연이 딱 내 역할이었다. 헛도는 바퀴와 함께 논바닥의 진흙이 튀어 올라 열어둔 유리 창 안으로 흙들이 들이 닥쳤다. 작은 위기는 생겼지만 자신이 선택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자 하는 오기인지, 내 잘못으로 가족 모두를 위기 속에 빠뜨렸다는 자책인지 괜한 엑셀에게 화를 쏟아낸다. 흙만 퍼다 나를 뿐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승질 머리만 남은 못난 놈의 전형이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아버지는 글로브 박스에 담긴 보험사 책자를 꺼내 들며 비상연락번호를 찾으려 하지만, 이미 난 스마트 폰의 검색으로 전화를 걸고 있다. 그 와중에 속으로 스스로의 스마트함에 작은 감탄을 하고 있다. 막다른 논두렁 길로 이끈 게 다 그 놈의 스마트한 티맵 때문이란 걸 잊었다. 정신 차리려면 한참 멀었다.
뻔한 클리셰는 계속 된다. 112나 119에서는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라며 서로에게 떠 넘기고 있다. 때도 딱 좋은 추석 당일이다. 빨간 날 중에 빨간 날, 그들도 그냥 일하기 싫은 직장인일 뿐이다.
“119 쪽에 연락하면 장비가 있을 겁니다.”
“저희가 가봐야 구급치료 말고는 해드릴 게 없어요. ”
공공기관의 행정 편의주의에 지쳐갈 때쯤 대기업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접근에 혀를 내두른다.
“네 ㅇㅇ화재입니다. 아 계신 곳이 청산도에요? 죄송하지만 약관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도서지역은 렉카 서비스가 불가능합니다. 고객님”
넉살 좋은 어머니가 농사일 하고 계시던 어르신께 경운기로 좀 끌어내 주시면 안되겠냐며 도움을 청했다. 아까 우리의 길을 가로 막았던 그 경운기다. 그 경운기를 피해 다른 길을 들어서다 보니 이 좁디 좁은 논두렁 길에 고립되게 된 것이다.
‘아니 그르게. 애초부터 저 경운기가 아니었으면….이게 다 저 경운기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물리면 이렇게 치사하고 구차해진다. 나라고 별 수 있나.
딱 봐도 연세가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어르신, 도움이 될까? 오랜 육체 노동에 노화가 당연히 빨리 왔을 테고 농사일 하며 태양빛을 고스란히 받아 온 세월만 해도 반 백 년이 넘었을 테니 본래 나이보다 더 연로해 보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을리고 깡 마른 체형의 팔십 노인의 모습은 암만 생각해도 위기 속에 빠진 우리를 구해줄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르신은 이런저런 말씀을 내뱉으시더니, 무심하게 주황색 비닐 호수 같은 걸 잔뜩 걷어 오신다. 일단 장비가 없으니 이걸로라도 묶어 보자고 하신다. 그러더니 우리 차의 고리와 경운기를 아무지게 둘러 메신다. ‘육체 노동 중엔 농사일이 최고다’ 란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역시나 매듭을 묶는 손이 상당히 꼼꼼하고 재빠르다. 도저히 묶을 수 없는 방향에서 매듭을 만들어내는 희한한 기술도 선보인다. 아이고 어르신 제가 몰라 봤습니다. ‘드래곤볼’ 에서 변태 무천도사 할아범이 근육질 몸으로 변신해서 에네르기 파를 날려대는 모습을 현실로 보는 것 같았다.
오랜 헬스로 다져 졌다고 자부하던 30대 청년, 나의 팔뚝은 의미 없이 열심만 쏟아 부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매듭은 다 어르신이 해내고 난 옆에서 가만히 놀기 뭣한지, 괜히 낑낑대기만 할 뿐이다. 넉살 좋은 어머니는 ‘어르신 참 고맙소’ 란 말을 연신 쏟아내며 슈퍼 히어로의 등장에 흥을 돋구고, 기계치이자 반평생을 사무관리 직군에 몸 담았던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어르신의 묘기에 감탄만 할 뿐이다. 결국 우리 셋 다 위기 탈출에 딱히 큰 힘을 보탠 건 없다.
어르신이 슈퍼 히어로에 등극할 극적인 순간은 아쉽게도 고무 호스가 끊어지는 바람에 실패로 끝이 나버렸다. 경운기에 우리 차가 잠시 들썩거리긴 했지만 ‘빡!’ 소리와 함께 호스가 끊어져 버렸다. 2차 위기. 어르신은 승부욕이 발동 했는지, 집 창고에 가서 더 튼튼한 끈을 가져 오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마침 히어로도 거역할 수 없는 끝판대장이 등장했다. 어르신의 아내, 할머니. 농사일은 뒷전이고 남 돕는답시고 애꿎은 호수만 끊어 먹은 어르신을 향해 잔소리를 퍼부어 댄다. 야속하지만 할머니의 마음도 일리는 있다. 자기는 남은 일 혼자 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 양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영양가 없는 남의 집안 일이나 도와주겠다며 열 올리고 있으니. 결국 어르신은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남은 농사 일을 마저 끝내고 할머니와 함께 경운기에 올라 타 마을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평소엔 그렇게 느려 보이던 경운기가 이때만큼은 참 빠르게 보인다. 마음이 제일 급한 건 나다. 어떻게든 어르신을 뒤 따라가서 다시 도와주러 오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발을 동동 굴렀고, 어머니는 같은 여자로서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됐는지 묵묵히 바라만 볼 뿐이다. 아버지 역시 어르신이 다시 돌아오시면 막걸리 값이라도 드려야겠다며 느긋하다. ‘우리 아부지도 성격 참 좋은 사람이구나’ 란 생각을 태어나 처음 해본다.
결국 영화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장식하게 만든 슈퍼 히어로는 면사무소의 당직 직원이었다. 그날 저녁에 서울로 올라갈 버스를 예매해 두었던, 그래서 마음이 제일 급했던 내가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다 면사무소까지 전화하게 된 것이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어리둥절해 하던 직원은 일단 기다려 보시라는 말을 하더니 10분 만에 사고 현장에 나타났다. 내일 모레 마흔인 나도 면사무소 직원에게 ‘오빠’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가까이서 보니, 렉카차가 아니라 뒤뚱거리는 카니발을 타고 오셨다. 아니 영화 속에 보면 힘 좋은 트랙터나, 렉카차, 최소 트럭 정도나 되야 끌어내던데 고작 카니발? 가정적인 아빠들의 현실 드림카 카니발? 연예인들이 무대 의상이나 잔뜩 싣고 다니는 그 카니발?
자신 있게 열어 보인 트렁크에도 허연 밧줄 하나 달랑 들어있다. 장비나 도구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냥 밧줄이다. 도르래나, 걸쇠, 갈고리 뭐 이런 것도 아니고 최소 쇠사슬도 아닌 그냥 허연 밧줄? 의심 가득한 내 눈빛을 읽었는지 면사무소 계장님은 이래 보여도 이게 배 위에서 쓰는 거라 절대 안 끊어질 거라며 자신감을 보이신다.
“위이이이잉~~~부아아아앙~~~슈우웅!”
두세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차가 끌려 나왔다. 논바닥에 뒷바퀴가 처박힌 지 두 시간만이다. 오 주여. 역시 국가의 녹을 먹는 양반은 달라! 공무원 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다 있다! 그날의 슈퍼 히어로는 최첨단 수트나 비브라늄방패 따위가 아닌 밧줄 하나 달랑 들고 오신 계장님이었다. 청산도 면사무소 계장님.
다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셋만 남겨졌다. 누구의 잘못에 대해서 원망을 하거나 기쁨의 탄성을 지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차 곳곳에 묻은 굵은 진흙 더미를 닦아냈다. 어차피 세차를 다시 해야 할 테지만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 있는 진흙들이 좀 창피했다. 기계치인 우리 부자의 무력함으로 비춰져서 보는 사람마다 비웃어댈 것 같았다. 무심히 다시 켠 티맵에는 최신 목적지였던 ‘장기미해변’ 이 남아있다.
“우짤까요? 장기미해변으로 갈까요? 아부지?”
“그 … 뭐….”
아버지도 어머니도 썩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으셨지만, 난 또 괜한 오기가 생겼다.
“기왕 이리 된 거 장기미해변, 무조건 함 봐야 안 억울하겠습니까?”
장기미해변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기계치인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운명 탓인지, 어떻게든 결판을 보고 싶은 오기였다. 엔딩을 해피하게 해야 그래도 청산도 여행의 끝이 덜 찜찜할 것 같았다. 비록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리 셋 모두는 ‘그 고생을 했는데 설마 또 사고가 나겠어?’ 란 확률론적인 확신과 함께 ‘그래도 설마?’ 란 불길한 걱정을 함께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분 탓인지, 도착해서 바라 본 장기미해변의 풍경은 생각보다 소소했다. 파도와 함께 밀려와 여기저기 한 가득 방치되어 있던 쓰레기들도 한 몫 했을 테지만, 해변의 풍광이 주는 기쁨보단 논바닥 사고의 스트레스가 컸던 탓 일거다.
3분 정도 지났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셋은 담담하게 다시 차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집으로 돌아올 배를 타야 할 청산도항이었다.
“이제 당신 보고 싶은 거 실컷 다 봤으니 됐으요?”
역시나 넉살 좋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농을 던지며 적막한 분위기를 깨려 했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먼 길 내려온 아들 녀석 보다는 그래도 매일 보는 아버지가 조금 만만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괜히 또 마음 졸이게 해드린 게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근질 거리는 입을 놔둘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것만 봤나요? 볼 것 안 볼 것 실컷 다 봤죠 뭐.”
1박2일의 청산도 여행 중에 처음으로 셋이 동시에 박장대소를 했다. 그제서야 ‘이것 역시 훗날 좋은 추억이 될 테지’ 란 뻔하지만 정답일 수 밖에 없는 위로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다. 그래. 이걸로 됐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셋이 크게 웃었으니 됐다. 매년 명절마다 얘기할 영화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졌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형에게 들어야 될 잔소리 거리가 좀 크게 생겨난 건 찜찜하다.
넉살 좋고 긍정적인 어머니와 불 같은 성격을 가졌지만 위기 상황에선 의외로 느긋한 기계치 아버지, 몸은 제일 멀쩡하고 힘도 세고 그나마 최신 스마트폰을 다루지만 역시나 의욕만 앞선 기계치인 나. 셋이 함께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우린 과연 몇 일이나 버틸 수 있을까?’ 란 엉뚱한 상상을 하며 청산도를 떠나 완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