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 '미스터 션샤인'

by 마선생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서 그게 눈에 들어 왔는지, 그래서 다시 검색을 하려고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끔 멍하니 스마트폰을 하염없이 몇 시간이고 들여다 볼 때가 있는데 내 인생의 가장 큰 낭비이다.)


멍하니 검색 창에 ‘미스터…’ 를 치다가 한참 잘 때리고 있던 멍이 확 달아나 버렸다.

‘미스터’ 를 침과 동시에 포털 사이트의 자동 완성 기능으로 인해 ‘미스터 션샤인’ 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왜 미스터 션샤인이지? Mr. Sunshine 이면 미스터 선샤인인데…아니 왜 선샤인이, 썬샤인도 아니고 션샤인이냐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도 방문해 보고, 포털에 등장하는 공식 명칭도 찾아 봤지만, ‘썬샤인’ 이나 ‘선샤인’ 이 아닌 ‘션샤인’ ‘미스터 션샤인’ 인 게 확실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아니 션샤인이 대체 뭐? 왜?’ 라고 생각할 것이다. 선샤인이든, 션샤인이든 드라마 제목 표기 때문에 일반적인 우리 삶이 크게 달라 질 일은 없으니깐.

그래. 드디어 오늘이다. 이 글과 함께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근 20년간 떠나 보낼 수 없던 그를, 나만의 ‘미스터 션샤인’에 대한 추억을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2002년 6월이었다. 4월의 마지막 날에 군에 입대한 나는 6주간의 신병 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 받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긴장해라. 지금부터 군대 이야기가 시작된다. 안심해라.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까진 할 생각이 없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중간 tmi가 들어갈 것이다.)




입대가 취업이라면 신병 교육대는 신입사원 연수원 정도가 될 것이고, 자대에 배치 받았다는 얘기는 신입사원이 연수를 마치고 진짜 내가 앞으로 일해 나갈 현업에 배치 받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당시 나 역시 우리 부대의 가장 큰 관심을 독차지 했었고, (물론 그 관심이 절대 사랑일 리 없지만) 나 역시 인생 통틀어 가장 긴장을 하고 지냈던 시간이었다. 나는 긴장이라 생각했지만 고참들이 보기에는 어색함과 어벙함이 동시에 좔좔 흐를 무렵이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조별 예선을 무난히 통과해서 16강을 앞두고 있던 바깥 세상의 분위기 만큼이나 당시 우리 부대 역시 상당히 들떠 있었다. 특히 정신 교육 주간을 맞아서 일주일간 실내에서 사상교육을 한창 받던 중이라 격한 훈련이나 육체 노동이 없었고 간부고 사병이고 간에 늘 싱글벙글이었다. 그 좋은 분위기 덕인지 당시 중사 계급이었던 간부가 우리에게 포상휴가증 3장을 걸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요즘 밖에서 쿵쿵따가 유행인데, 분대 별 대표 한 명씩 나와서 쿵쿵따를 하자. 쿵쿵따해서 마지막으로 남은 분대에게 포상휴가증 3장을 주겠다!”




분대는 회사로 치면 ‘팀’ 과 유사했고, 1개 분대에 보통 10명 정도 됐으니, 10명 중에 3장이라..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사병들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게다가 쿵쿵따는 한창 사제물 가득한 핫한 게임 아닌가!


10명 중에 대표 한 명. 당연히 탈락 시에 대표를 향한 비난이 상당할 테니, 대부분의 대표들은 그 분대의 최고참 격인 분대장 또는 병장들이 나와 있었다. 전부 다 여유 가득한 미소로 연습 게임을 하며 리듬에 맞춰 입을 풀기도 했다. ‘쿵쿵따~ 쿵쿵따~’


하지만 우리 분대는 상황이 좀 달랐다. 다른 고참들이 나에게 ‘니네 고참들 진짜 무섭다. 조심해’ 라는 걱정 어린 말을 건넬 정도로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가득했던 지라 몸이 아닌 머리를 좀 굴려야 하는(?) 쿵쿵따 게임은 그리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대 배치 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나에게까지 그 공이 떠밀려 넘어 왔고 분대원 10명 중 유일한 4년제 대학 재학생이란 이유로 대표로 선출되게 됐다.


“우리 5분대는 막내가 대표다! 4년제 다니는 엘리트! 막내! 준비됐나? 떨어지면 니는 오늘 뒤질 줄 알아라!제?”


끝까지 살아 남아 포상휴가를 가겠다는 희망찬 표 따윈 정말 조금도 없었다. ‘초반에 떨어지면 쪽팔리지 않겠나’ 라는 뜨뜻 미지근한 감정도 없었다. 오로지 저 고참들한테 갈굼 당하면서 맞을 수 없다란 생존 본능, 그것 뿐이었다.


“쿵쿵따아~~ 쿵쿵따아~~ 쿵쿵따리 쿵쿵따아~~~”


좁은 내무반 전체엔 남정네들만 가득했고, 짐승의 포효와 같은 쿵쿵따 리듬이 흘렀지만, 재미와 열기는 어떤 예능 프로그램 못지 않았다.


그 순간! 죽을 수 없다는 간절함 덕분인지, 경기가 시작되자 생각지도 못한 필살기들이 떠올랐다. 입대 전 술자리에서도 유치하다는 핑계로 쿵쿵따는 별로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당시 나의 머리 속에는 초인적인 무언가가 작용했던 것 같다.


“대머리! 쿵쿵따~~ 이발소! 쿵쿵따~~ 소지섭! ……….우와아아아아!!”


“전당포! 쿵쿵따~~ 포이즌! …………
우와아아아아아!!”

“카센타! 쿵쿵따~~ 타이슨! ………… 우어어어어어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병장들의 목을 하나씩 베어 내고 드디어 최후의 2인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상대는 8분대의 최고참. 말년이라 이런저런 훈련과 작업에서 열외된 탓에 피부도 뽀얗고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가득했던 문병장.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지 제대를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도 포상휴가를 향한 탐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노려 봤다.

“너 나 이기면 죽는다 흐흐”


상대편인 문병장을 이겨도 죽고, 지더라도 우리 분대 고참들에게 죽는다. 이러나 저러나 난 죽는다. 기왕 죽을 거 불꽃처럼 죽자. 영웅다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쿵쿵따~~쿵쿵따~~ 리어카! 카메라! 라디오!”

소싯적 쿵쿵따를 좀 해본 사람을 알 것이다. 이상하게 저 ‘리어카-카메라-라디오’ 콤보가 많이 나온다. 보통은 ‘오디오’ 를 주고 받으면서 시간을 좀 끌거나, 애매한 ‘오징어’ 져 댈 것이다.


“라디오! 쿵쿵따…….”

“오… 오디션! 쿵쿵따…. 우어어어어어 와아아아아아아”


문병장이 ‘라디오’ 를 던진 순간, 이미 난 승리를 직감했고 쿵쿵따의 리듬에 맞춰 자신 있는 목소리로 ‘오디션’을 외쳤다.

자대 배치 받은 지 일주일도 안 된 이등병의 신분이었지만, 이때 만큼은 정말 화려한 세레모니를 했던 것 같다. 긴장감 가득했던, 길고 길었던 쿵쿵따를 드디어 내 손으로 끝내버린 순간이었다. 무시무시했던 우리 분대 고참들과 얼싸 안으며 기뻐하던 순간,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션샤인…”


션샤인? 선샤인도 아니고 션샤인? 에이 아니지. 아무리 영어라지만 이건 아니지. 발음 자체가 다른데. 우길 걸 우겨야지. 그래. 문병장 쪽팔리니깐 뭐라도 하고 싶어서 뱉은 거겠지. 션샤인? 그래 얼추 비슷하긴 하네.



근데 당시 심판이자 포상휴가배 쿵쿵따 대회의 주최측이었던 중사는 깊은 고민을 했고 애매한 영어 발음을 이유로 ‘션샤인’ 을 정당한 공격으로 인정해 버렸다. 결국 상대방의 정당한 공격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른 세레모니만 펼친 나의 패배.

아씨… 여러 병장들의 목을 베어가며 올라갔던 결승전이었던 만큼 나 역시 이등병 주제에 표정관리가 안됐고 우리 분대 고참들은 씩씩 거렸지만, 덩치만 우락부락했지 결국 문병장보다 짬이 안 됐던 지라 그렇게 포상휴가가 문병장 팀에게 돌아가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썬샤인이면 몰라도 션샤인은….. 참나”


그날 밤. 모포를 깔고 긴 하루를 마감하려 한 나에게 문병장이 찾아 왔다.


“야 막내! 잠깐 나와 봐”


‘히히 나한테 좀 미안하지 문병장? 뽀글이라도 끓여 주려고 그러나? 그래! 네가 생각해도 ‘션샤인’ 은 좀 억지잖아. 어차피 자대 배치 받은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난 포상휴가는 바라지도 않았어. 고참들한테 이번에 들어온 막내 장난 아니다! 이 정도 평판만 얻었으면 됐지 뭐 히히’


내심 냉동만두, 최소 뽀글이를 생각하며 기분 좋게 따라나간 나를 문병장이 이끈 곳은 뜻밖의 화장실이었다.


“야 대가리 박아!”


화장실 바닥엔 칫솔 뚜껑이 놓여져 있었다. 대가리 박기의 상위 버전. 칫솔 뚜껑 위에 대가리 박기.

“야 너 아까 표정관리 X나 안되더라? 짬밥 X도 안 되는 X끼가 말이야. X같냐? 어?

X같애? 병장한테 쿵쿵따 져가지고 X같냐고? X발 나도 션샤인 틀린 거 알아.

그래 네 말대로 선샤인이야! 근데 뭐 X발 어쩌라고? 그럼 니가 중대장한테 가서 말해!

저 X끼 대신 니가 포상휴가 가겠다고!”


군대가 육체적으로 힘든 곳일 뿐만 아니라 X같기 까지 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쿵쿵따 결승전에서 아쉽게 떨어진 것은, 포상휴가증을 아쉽게 놓친 것도, 정말 조금도 아쉽거나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화장실, 바닥에 놓인 칫솔 뚜껑을 찍어 누르던 내 머리통의 묵직한 고통 큼이나 문병장이 나에게 내뱉었던 그 모멸감은 절대 잊혀 지지 않는다. 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군가 그랬지. 군대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배운 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고, 정해진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때론 원칙이나 논리가 아닌 말로 설명 할 수 무언가가 더 크게 작동되는 곳이 사회랑 똑같은 곳이라고.


문병장. 너도 기억하지? 그때 그 쿵쿵따, 그리고 션샤인. 기억 못할리가 없을거야. 쿵쿵따 나가서 끝까지 살아 남은 덕에 포상휴가 나왔다고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영웅담처럼 떠벌리고 다녔을 테니깐. 그럼 절대 잊었을 리 없지. 잘하면 우리 아들 장하다고 휴가 나간 첫날 엄마랑 격한 포옹까지 했을 수도 있었겠네.


너도 요즘 ‘미스터 션샤인’ 이란 드라마 보냐? 한창 가족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30대 후반의 가장일 수도 있으니, 못 챙겨 볼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한번 쯤은 ‘미스터 션샤인’ 에 대해서 전해 들었을 거다. 혹시 너도 나처럼 그때 그 쿵쿵따 각했냐?

그래 네가 이겼어. 20년 동안 내가 이긴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만 정말 억울한 줄 알았는데. 드라마 제목 덕에 결국 너의 승리였다는 게 증명되어 버렸네. 어쩌면 괘씸했을 수도 있겠다. 네가 당연히 이긴 건데 이등병 놈이 표정관리도 못하고 띠거워(?) 했으니.


션샤인이고 선샤인이고 간에 어차피 군대에서 ‘짬’ 보다 위대한 건 없으니, 당시에나 지금이나 너에게 포상휴가가 돌아가는 건 변한 게 없을 거다. 근데 썩 기분이 후련하지는 않네. 20년 전 철천지원수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인정과 용서를 한 것 같아서. 뭐 어쩔 도리가 없지.



용서한다. 잘 살아라 문병장.


너의 승리다. 미스터 션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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