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My 찬호 Park

by 마선생


박찬호가 최근에 TV에 나온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20년 전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라는 주제로 보여진 영상이었다. 20대 아이돌부터 중견 배우까지 여러 연예인들이 나왔지만, 하이라이트는 단연 왕년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였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20년이란 시간만큼이나 거칠고 억세진 수염, 은퇴 이후 취미를 붙였다는 골프 덕에 한껏 그을린 피부의 그였지만, 입을 떼는 순간 20년 전, 한국인 출신 제 1호 메이저리거 찬호 팍의 얼굴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내가 볼 땐 너의 머리가 커져있다. 사람들이 다 너 좋대. 영웅이래…”


그는 20년 전 영웅이었던 자신에게 ‘겸손’을 먼저 얘기했다. 하긴 20년전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를 통틀어 가장 잘 나갔던 인물이었으니, 또 방송에 나와서 하는 뻔한 설정이니깐, ‘겸손’ 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진부한 결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얘기는 전혀 뜻 밖이었다.



“누가 자살하려고 마포대교에 올라갔어. 근데 ‘에이 죽기 전에 박찬호 경기나 보고 죽자’ 하면서 내려왔대. 근데 하필 그 경기 때 네가 왕창 깨진 거야. 그 사람이 열 받아서 5일을 기다렸대. 근데 그 다음 경기는 네가 정말 잘 한 거지. 그때 그 사람이 깨달았대. 비록 지금은 내가 너무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5일 후, 5년 뒤에…… 꼭 박찬호처럼 재기할 수 있을 거야.”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박찬호는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였다. 아니 스타보다는 영웅에 가까웠을 것이다. 특히 1998년 대한민국에 IMF라는 큰 위기가 찾아 왔을 때엔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기까지 했다.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 된 후 하루 공원을 전전하던 가장들, 사업하던 나의 아버지 세대들에게 그 시절이 더 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입시 지옥에 갇힌 고등학생 신분이었던, 초중고 12년도 모자라 재수까지 1년 더 한 나에게도 삶이 그리 녹록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박찬호가 등판한 메이저리그 경기가 주로 새벽에 열렸기에 매일 아침 신문 가판대의 1면 기사를 확인하는 건 나의 중요한 아침 일과 중에 하나였다. 선발 투수였던 박찬호는 주로 5일 간격으로 등판했기 때문에 스포츠 신문의 메인 기사들 역시 5일 로테이션으로 돌아갔던 시절이다. 경기 당일은 승패에 따라 ‘ㅇ이닝 ㅇ실점 ㅇ피안타 ㅇK’ ‘코리안 특급 161Km’ 등이 주 레퍼토리였다. 승리라도 챙긴 후면 경기 2-3일 동안에도 그 감동을 우려낸 재탕 기사들이 연이어졌고, 경기를 앞 둔 전날에는 ‘박찬호의 천적 ㅇㅇㅇ 경계 주의보!’ 등 상대팀에 따른 공략 기사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박찬호와 어떤 여배우의 사진이 나란히 1면 기사로 등장했던 적도 있었다. 나 역시 이게 웬 핵폭탄급 열애설 인가 싶어서 들여다 봤었는데 알고 봤더니 ‘박찬호의 배우자감’ 으로 어울리는 여자 연예인 순위에 관한 앙케이트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쓰여진 기사였다.

당시 내가 고등학생의 순수한 마음으로 흠모했었던 최지우가 1등이었고, 그 외 소위 말하는 A급 여자연예인들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장난 삼아 다뤄질 이상형 월드컵 따위를 1면 기사로 다뤘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지만, 그만큼 박찬호는 난세의 영웅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당시 박찬호와 함께 세계 골프계를 호령하고 있던 박세리를 국가적 차원에서라도 결혼을 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것만이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이 스포츠 강국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며 말하기까지 했다.

당사자들은 경악할 일이겠지만.


그렇게 이상형 연예인까지 빼앗아 간 박찬호였지만, 박찬호였기에 용서할 수 있었고 오히려 나의 그녀를 박찬호 같은 멋진 남자에게 보낼 수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기 까지 했던 고등학생 김한빛은 세월이 흘러 재수생이 되었다. 박찬호가 메이져리그에서 풀타임 선발로 자리잡은 97년 이후 정상급 투수로서의 활약을 이어갔던 것처럼, 나도 지긋지긋한 수험생활을 1년 더 이어 가고 있었다.

머리는 저렴한 만원짜리 염색약에 노랗게 물들었고 술과 담배를 당당하게 돈 주고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박찬호를 향한 충성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엔 그냥 쳐다만 보던 스포츠 신문이었지만 재수생 시절에 좀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매일 아침 지하철 가판대에서 한 부씩 사서 손에 집어 드는 걸로 찬호형에 대한 팬심을 대신했다. 어차피 똑 같은 어제 있었던 박찬호의 선발 등판 경기의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 서울, 투데이, 일간 등 주요 스포츠 신문의 1면 기사 타이틀을 견주어 가며 고심 끝에 500원짜리 동전을 건네던 일은 나의 빼놓을 수 없는 아침 일과 중 하나였다. 재수 학원이 있던 부산의 서면역까지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스포츠 신문을 정독하고 난 후에도 박찬호와 관련된 나의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서면 지하철역에 내려 재수학원으로 가기 위해선 500미터 가량의 지하상가를 걸어 갔어야 했는데, 그 지하상가의 한 켠에는 나이키 매장이 꽤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었다. 매장 매니져의 아이디어였는지 지나가던 행인들이 볼 수 있는 외부 유리창에 ‘박찬호 ㅇㅇ승’ 이라는 문구가 크게 있었고, 당시 박찬호의 경기 결과에 따라서 승수를 바꿔 붙이곤 했다.

나이키 매장을 지날 때 마다 ‘박찬호 ㅇㅇ승’ 이라는 문구를 바라보며 상당히 뿌듯해 했었다. 스포츠 신문과 반복 시청한 스포츠 뉴스를 통해 뻔히 박찬호가 몇 승인지도 알고 있었고, 그가 몇 승을 하든 재수생인 나에게 달라질 것 하나 없는데도 마치 나의 모의고사 성적이 오른 것 마냥 자랑스럽고 행복했던 기억.



박찬호의 영상을 보다 보니, 굵직한 허벅지가 강조된 타이트한 유니폼을 입은 채로 힘차게 발을 차올리며 공을 던져대던 20년 전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박찬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마포대교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그 사람처럼 그의 승수, 탈삼진, 실점을 마치 내 시험 성적 마냥 집착했던 20년 전 어린 나의 모습까지 생각이 났다.


박찬호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시대와 국적을 통틀어 그 어떤 위인이 그와 같은 삶을 살 수있을까? 자신의 본업인 야구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야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국민 영웅’이라 불려졌다. 시즌이 종료된 시점엔 여러 신문에서 앞다퉈서 ‘못해도 이 만큼은 받아야 된다’라고 앞 다퉈서 대신 우겨주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현역 시절 축적한 연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가진 굴지의 기업가 집안에 사위가 되었다.


부러운 건 지는 거라는데 부럽다. 백 번 져도 상관없으니 부럽다. 글을 적다 보니 20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부러워 죽을 것 같다. 박찬호와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그의 재력, 명예, 화려했던 커리어 모든 것이 부러움 투성이지만 그 중 딱 하나를 고르라면 세상 모두가 그를 응원해 준다는 것이다.


박찬호가 힘들 땐 그와 일면식도 없는 나를 포함한 수천만의 국민들이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 했다. 그가 잘할 때면 그래서 소위 정말 ‘잘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기분 좋아했다. 심지어 당시에도 충분히 잘 나가던 그가, ‘훨씬 더 잘 나가길’ 마음 속으로 바라기까지 했다. 박찬호의 승리를 위해서 만큼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 할 것 없이 국민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내일 박찬호가 8이닝 무실점! 아니 7이닝 1실점 정도만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아멘!’

참 부러운 일이다. 내가 잘 나가길 그리고 행복하길 그래서 그들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어주길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래 준다는 것. 그리고 참 그립기도 한 일이다. 그 시절의 나의 모습들이. 적어도 내 삶에 ‘영웅’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했었고, 그를 위해 뜨거운 응원을 보내던 그 시절 나의 마음이. 어른이 되었다는 해방감에 술 담배는 마르고 닳도록 입에 대곤 했지만 찬호 형을 좋아했던 마음만큼은 순수했던 스무살 무렵의 내가.


“명심해라. 지금 네 머리 커진 거, 그거 무거워서 목이 아파질 거다. 그러니깐 야구 잘하는 것보다 겸손한 것 먼저 배우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는 거, 너의 성장과 성숙으로 잘 가꾸어봐.”


영상의 말미, 20대 젋은 청년 박찬호에게 50을 바라보는 박사장은 다시 한번 ‘겸손’을 얘기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가, 불미스러운 스캔들 한번 없이 지금까지도 그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찬호형이 그 와중에 겸손을 얘기한다.


이래서 내가 마블 영화에 별 감흥을 못 느끼는 거다. 나에겐 살아있는 영웅, 찬호형이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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