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승리

by 마선생

한 여름 밤의 승리


올해 여름 날씨가 참 지독스럽다. 사람을 참 지겹도록 지치고 진득거리게 만드는 날씨다. 덕분에 이사 올 당시만 해도 “언제 한번 맘 놓고 틀어나 보겠나” 싶던 천장형 에어컨을 매일 같이 시원시원하게 틀어대고 있다.


10년전 한 달을 50만원으로 월세까지 감당하며 버텨야 했던 고시생시절,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가는 전기요금 좀 아껴 보겠다고 두꺼비 집 자체를 내려 버리고 외출하는 바람에, 냉장고 넣어놨던 소중한 밑반찬을 다 갖다 버린 웃픈 추억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야속한 그 간의 세월들이 날 참 많이도 변하게 했다. 무식했지만 나름 인간미는 있었던 ‘생계형 짠돌이 김한빛’ 이었는데. 그 시절의 내 기준에서 생각해 본다면 송풍구를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냉기와 함께 전기요금이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천장형 에어컨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한 가전기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상상이야 신경 끈 지 오래됐다. 내 육신 만큼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 된 탓도 분명 있을 테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다’ ‘근검절약이 미덕이다’ 따위의 구시대적 명분에 얽매이지 않게 된 탓도 클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결국엔 겨울에 따숩자고, 여름엔 좀 더 시원하자고 그렇게 열심히 돈 벌어대는 팔자들 아니겠는가.


일할 준비와 돈 벌 자격을 갖추기 위해 20년 가까이 학교에서 대다수의 적성에 맞지도 않는 펜질 하느라 충분히 골치를 썩어 왔다. 힘들게 그 자격을 갖추고도 혜택을 맛보기 보단 각자의 자격에 걸 맞는 각양각색의 스트레스를 감당해 내는 대가로서 푼 돈을 겨우 손에 움켜 쥐게 되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푼 돈을 조금씩 나눠 쓰는 그 순간마저도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아야 한다면 내 모습이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


본능적으로 ‘적정 실내 온도 27도’ 를 향해 올리려던 손을 리모컨에서 놓아 버린다.

“그냥 좀 틀자. 나도 좀 시원하게 살아보자. 그 얼마나 한다고. 내 짜증이 더 비싸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값을 매겨보진 못했던 내 몸뚱어리와 짜증에 값을 매겨본다. 과거에 난 그렇지 않았는데. “먹는 것에 돈 아까지 말자” 라고 외치는 사람이 제일 이해가 안 됐다. 월세, 전기/수도/가스, 버스/전철, 휴대폰 요금, 등록금, 책값 들처럼 대학생이란 현재의 내 위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던 돈들의 내역 중에서 ‘식비’ 는 유일하게 내 재량껏 절약할 수 있는 항목이었다. 식비 뿐만 아니라 병원비나 약값 역시 내 통제 범위 내에 있었다. 내가 참고 버티기만 하면 되니깐. 그렇게 나의 감정과 신체는 늘 돈 보다 뒷전이었다.



내 마음과 몸뚱어리는 내 것이니깐 당연히 무료라고 생각했고 아무리 써도 나만 괜찮으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발목을 크게 삐었어도 절뚝거린 채로 새벽 알바를 나갔고, 썩어 들어가는 충치 때문에 어금니가 아파 와도 치약만 잔뜩 입에 문채로 잠을 청하는 밤도 있었다. 스스로 튼튼하고 씩씩한 청년이라 생각했고, 그런 ‘청년 김한빛’ 에게 스스로 열정페이를 강요해왔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함부로 가져다 쓴 만큼, 정확히 딱 그 만큼만, 내 몸과 마음닳아 있었다. 힘겹게 꾸려가던 서울 유학 생활에서 유일하게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내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세상에 공짜는 절대 없었고 열정페이 따위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부쩍 사사로운 일에 짜증과 화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게 흥분하는 와중에도 내가 아닌 회사, 동료, 썩어빠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일에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게 잘 돌아간다. 몸도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을 찾아 볼 수 없다. 당장 병원을 찾아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이구야’ 란 한숨과 함께 여기저기 습관처럼 주물럭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감정과 육체의 잔고 역시 마냥 무한정 재고를 쌓아 두고 있는 것 같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에 달려 있는 에어컨을 바라보니 괜한 승부욕이 발동한다.


“내가 인마. 내 몸뚱어리가 너 따위랑 비교가 될 것 같아? 내가 훨씬 비싸 인마!

너 딱 두고 봐. 오늘밤에 너 쌩쌩 틀어 제끼고 아주 그냥 보송보송하게 잘 테다!”


일단 에어컨에겐 이긴 것 같다. 일상에서 느끼는 이 작은 승리감이 나쁘지 않다. 이 기분에 도취되어서 오늘 밤은 모처럼 아주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마무리 하려다 보니 “집에서도 얼음에 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글을 쓰면 지금보다 훨씬 더 글빨이 잘 설 것 같다” 는 묘한 확신이 든다. 시원하게 일시불로 질러서 최신 얼음 정수기 따위도 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2017. 8. 2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