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픽업 아티스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by 마선생



‘픽업 아티스트’ 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단순히 ‘꼬시다’ ‘꼬셔오다’ 에 머물러 있던 단순 동사가 주체와 객체, 그 자체가 목적격으로 인정받는 ‘동사형 명사’로 격상된 것이다.


어렸을 적 친구들끼리 모여있던 자리에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호기로움에 취해서 하던 일시적인 행위들이 장기간에 걸쳐,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서게 됐다. 이런 사회적인 트렌드에 발맞춰 TV 프로그램들 역시 픽업 아티스트를 전문가로서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정확할 지는 모르겠지만, ‘시티헌터’ 라는 이름 모 방송프로에서는 전국에 숨어있는 픽업 아티스트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해서 실제 거리로 나가 모르는 여성들의 전화번호를 얻게 되는 과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며 꽤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영화 '픽업 아티스트'



심지어는 후진양성, 연애에 힘겨워 하는 모태솔로들을 구제한다는 취지 하에 강남, 홍대, 종로 등지에 픽업 아티스트 학원까지 생겨나게 됐다. 그쯤 되면 픽업 아티스트도 프로게이머처럼 신종 직업 군으로 인정받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쇼호스트를 준비하며 부족한 방송 관련 커리어를 채우기 위해 이리저리 기웃거린 던 시절, 방송 관련 취업 포탈사이트에 ‘픽업 아티스트 공채’ 공고가 올라온 걸 발견 하게 됐다.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나는 당시 같이 준비하던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에 알렸고,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포탈에 이런 채용공고까지 올라오냐” “아예 ㅇㅇ포차 앞에서 채용 설명회라도 개최해야 하는 거 아니냐” 라며 한창 웃고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재미 삼아 같이 지원해 볼래?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라는 쪽으로 분위기가 모아졌고, “그래! 픽업 아티스트였다고 하면 나중에 쇼호스트 면접 볼 때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우리는 점차 의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경력도 경력이고,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남자들의 끝없는 논쟁거리, “우리 중에 누가 여자에게 인기 많을까?” 라는 자존심 걸린 주제에 대한 공식적인 랭킹을 매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됐다. 다들 강남의 스튜디오에서 몇 십 만원씩 줘가며 찍었던 방송용 프로필 사진도 있었겠다, 쇼호스트 지망생의 필수 덕목인 설득 스피치 스킬도 갖췄으니, 다들 결과를 기다리며 나름 자신감도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발표된 결과는 우리 모두 ‘서류광탈’이었다. 길고 긴 백수생활 속에서 나름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한 ‘서류탈락’ 이었지만, 픽업 아티스트 채용에서의 ‘서류광탈’ 은 뭔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남자로서 갖춰야 할 직업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수컷으로서의 매력까지 동시에 평가절하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았다.


물론 우리 중에 서류 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원래 픽업 아티스트들은 심리와 화법으로 승부를 보는 사람들이라, 외모가 너무 출중하면 자격미달이다. 그래서 우리가 안 됐나 보다.” 라며 서로서로 위로하고 털어버렸다.



당시 분위기를 반영해서인지 한국 영화에서도 잠깐 ‘픽업 아티스트’를 소재로 삼은 멜로 영화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멜로의 정수라 하면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꼽는다. 대표작이라 불리 우는 ‘봄날은 간다’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임수정과 황정민이 출연한 ‘행복’이란 영화도 뒤늦게 좋아지고 있다.


영화 '행복'

철없던 20대 시절에는 그냥 잔잔한 영화 정도에 그쳤는데, 이상하게 서른을 넘어갈 수록, 케이블이나 IPTV를 통한 시청 횟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정확히 세어 보진 않았지만 두 영화 모두 족히 스무 번은 넘었을 텐데 매번 자그마한 디테일에서 뭉근하게 배어 나오는 진한 영화적 맛을 발견하는 재미가 내겐 참 쏠쏠하다.



두 영화 모두 확실한 공통점이 있다. 일반적인 멜로 영화들의 기승전결과는 달리 남녀 주인공이 영화의 초반부에 너무 싱겁게 연인으로 맺어진다는 것이다. 온갖 밀당이 난무하고 수줍음과 용기의 엇갈림 속에 마침내 ‘우리 오늘부터 1일!’ 이라고 외치는 썸의 단계들이 너무도 평이하게 훅 지나가 버린다. 오히려 영화는 ‘1일!’ 이후 둘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아무도 방해할 이 없이 탄탄대로라 여겼던 두 사람의 연애가 권태를 반복하다가 이별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


현실 속 시골 요양소에서는 절대 찾아보기 힘든 절대 미모의 임수정을 연인으로 둔 황정민도 별 수 없다. 그녀를 두고 잠깐 서울로 쐬러 나간 콧바람을 그는 결국 태풍으로 만들어 버린다. “라면 먹고 가라” 란 참신한 멘트로 귀엽지만 치명적인 유혹을 건네던 이영애 역시 더 이상 유지태 앞에서 설레지 않는다. 이제 그녀에게 유지태는 그저 ‘라면 끓여주는 사람’ 일 뿐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우리의 멍청한 질문에 두 영화는 ‘이렇게 사랑이 변한다!’ 라고 담담하지만 친절하고도 긴 풀이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



알랭 드 보통의 최근작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 300여 페이지가 넘는 전체 분량 가운데 두 남녀가 만나서 결혼이란 결실을 이루는 부분은 초반 50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라면 ‘둘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마지막 문구와 함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덮어야 할 텐데, 아직도 소설은 250여페이지 가량 더 남아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란 책의 제목처럼 알랭 드 보통의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제 아무리 낭만적인 유럽의 도시에서 만나 로맨틱한 고백을 통해 결혼에 골인한 커플일지라도 별 수 없다. 친구 부부가 그들보다 더 좋은 장소로 긴 여름 휴가를 떠난 다는 별것 아닌 이유로 부부싸움은 시작되고,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와 피곤함으로 인해 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돌아보고 살필 마음의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있질 않다.


어느덧 중년에 이른 두 사람은 어찌 됐든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함께 견뎌왔고 아이들을 어느 정도 길러 낸 서로의 모습에 새삼 사랑을 느낀다. 잔혹했던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전우들처럼 그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애틋함을 깨닫고 전투로 인한 서로의 상흔을 어루만진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수법들과 수작들이 오고 가는 로맨틱한 썸의 순간도 분명 사랑일 테지만, 그렇게 극적으로 이뤄낸 그들의 마음을 지켜내고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일, 육아, 살림, 일상 등을 지켜내는 것, 때론 ‘일단 버티고 보기’ 역시 사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영화, 드라마, 책(심지어 애들 동화책까지도)같은 대중 미디어는 전자에게만 늘 초점을 맞춘다. 그게 훨씬 더 극적이고 다루기 편할테니깐. 덕분에 우리 역시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이라 하면 늘 서로의 마음을 얻어내고 확인하는 ‘픽업’의 순간만을 떠올린다.


현실 사랑에서 우리가 실패하고 점차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그 ‘픽업’의 장면만이 낭만적인 사랑이라 착각하기 때문 아닐까? '픽업' 이후의 연애와 서로의 일상, 관계를 지켜가고 버텨내는 ‘킵업’의 시간과 노력들은 사랑이라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예전 같지 않다’라고 투정 부리고 ‘권태기인가 봐’ 라고 체념하며, ‘변했어 너’라고 서로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돌려버린다.


한창 나이를 지나도록 모태솔로라는 지위를 벗어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이성의 마음을 얻어낼 스킬을 전해 주는 ‘픽업 아티스트’의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후의 시간, 수면 위를 우아하게 떠다니기 위해 물 속에서 쉬지 않고 물장구를 치는 백조의 모습처럼,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하루하루 잘 버텨낼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노련한 ‘킵업 아티스트’의 등장 역시 간절해 지는 시대이다.






PS) 그때 우리를 제치고 서류 전형을 통과해서 최종 합격까지 해낸 픽업 아티스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내가 5년차 쇼호스트가 된 것처럼 그들도 5년차 픽업 아티스트로서 업계에 적당히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을까? ‘ㅇㅇ포차’ 의 난립으로 업계 자체의 질서 무너져 내린 상황이니, 그쪽도 결코 녹록지 않을텐데. 아무쪼록 본인 밥그릇 잘 ‘킵업’ 해내길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