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흔히들 말하는 '문어발식' 바람둥이. 동일한 시기에 복수의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형태. ‘바람’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 가장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죠. ‘어장관리’ 역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문어발식’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전형적인 유형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 못지 않게 습관적이고 악랄하다고 볼 수 있는 타입이 바로 '타잔형' 바람둥이 입니다.
‘타잔형’ 바람둥이에 대한 이해가 좀 안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타잔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타잔이 정글 속에서 빠르게 이동할 때 나무줄기를 이용하죠.
‘아아아아아’ 라는 고함과 함께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나무에서 그 다음 나무로, ‘줄기’를 옮겨가며 빠르게 이동합니다.
타잔 애니매이션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타잔이 나무 ‘줄기’를 바꿔 잡는 순간입니다.
그는 다가올 나무 줄기를 자신의 손으로 확실히 움켜잡기 전에는 결코 이전에 잡고 있던 나무줄기를 놓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타잔형' 바람둥이는 진정한 의미의 '바람둥이' 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가 두 줄기를 동시에 움켜 잡는 순간은 정말 찰나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타잔은 '이동'이라는 최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의 줄기를 완벽히 잡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부터
그동안 자신의 몸둥아리를 지탱해 주던 이전의 나무 줄기를 과감히 놓아버립니다. 그렇게 새로운 나무 줄기에 몸을 의지한 것도 잠시, 빠른 이동을 위해 또 다시 다음 나무 줄기를 찾아 재빨리 눈을 돌리게 됩니다. 지난 줄기는 재빨리 던져 버리고, 지금의 줄기도 만족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줄기로 옮겨 타야 하는 얄궂은 ‘타잔’의 운명.
“어떤 바람둥이가 더 쳐 죽일 놈이냐?”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타잔 얘기를 한 건 오늘이 바로 '타잔형' 직장인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일요일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가 심한 이들은 일요일이 아니라 불금의 숙취가 가시기 시작하는 토요일 저녁부터 그 고민이 시작되기도 하죠.
하루가 멀다하고 '퇴사와 이직' 을 꿈꾸지만 갈 곳이 정해지기 전에는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 합니다. 내가 붙잡을 다음 줄기가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쩔 수 있나요?
그저 울며 겨자먹기로 지금 이 줄기,
설사 그것이 썩어 빠진 동앗줄 일지라도, 썩어 문들어 질때까지 붙들 수 밖에.
제가 첫 직장을 그만 두게 될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의 선배, 동기들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죠.
" 갈 곳은 정해놨냐?"
"최소한 갈 곳은 정해놓고 그만둬야 할 것 아니냐? 적은 나이도 아니고."
하지만 당시 저에게 그런 말을 건넸던 선배, 동기들, 그리고 당시 저 조차도.. 수많은 타잔 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 있었습니다.
바로 '나무 위 에서' , '나무 줄기' 만을 찾아 헤맸다는 것입니다.
일단 줄기를 놓아버리고 나무 밑, 땅으로 내려오면 더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도 동물들의 제왕 타잔일테니 큰 짐승의 등을 잠시 빌려 타도 될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치타의 재롱 피우는 모습을 구경거리 삼아 슬슬 걸어가도 될 일입니다.
때론 길 잃은 '제인' 같은 어여쁜 여인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죠.
물론 그 여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곳은 ‘나무 줄기 위’ 가 아니라 바로 두 발을 딛고 있는 나무 밑의 땅입니다. 제 아무리 제인의 미모가 뛰어나더라도 쉼없이나무 줄기를 바꿔가며 빠르게 움직이는 타잔에게는 절대 보일리 없을테니깐요.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
서커스의 가장 큰 볼거리 중에 하나는 하늘 높이 매달린 그네에서 펼쳐지는 ‘공중그네’ 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타잔’의 그것과는 명확하게 다르죠.
붙잡고 있던 이전의 그네를 완전히 놓아버리고, 그 탄력을 이용해서 공중에서 묘기를 부린 다음 건너편의 그네를 움켜 잡습니다.
관객들이 탄성을 보이는 순간 역시 명확히 정해져 있죠.
곡예사가 이전의 그네를 놓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이고, 공중에서 위험천만한 묘기를 부리고 난 후 다음 그네를 힘겹게 움켜잡는 그 순간, 소리치며 박수를 보냅니다. 수많은 연습의 결과일 테지만, 아랫 쪽의 대형 그물을 제외하고는 의지할 것 하나 없이 공중으로 스스로 몸을 날리는 그들의 몸짓은 박수 갈채를 받아 마땅합니다.
지금 붙잡고 있는 줄기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 불안하고 때론 지긋지긋할 정도로 끔찍하다면, 그냥 놓아버리셔도 됩니다. 잠깐 땅 밑으로 내려와도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나무위로 올라가도 되겠죠.
물론 그게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줄기를 놓치게 되었다 할지라도 생각처럼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의 경우엔 오히려 나무 밑의 세상도 있다는 걸 생전 처음알게되어 참 좋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엘 가야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무조건 취업을 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저였으니, 그런 생각을 그제서야 처음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을테죠.
물론 아직도 누군가에겐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서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제가 큰일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빠르고 치열하게, 빌딩 숲 사이를 이동하고 있는 주변 선배, 동기, 후배 타잔 들이 바라볼 땐 특히 더 그렇겠죠.
굳이 나무 위에서 다음 번엔 또 뭘 붙잡아야 할지, 어떤 줄기가 지금보다 더 튼튼할지를 찾아서 열심히헤매이기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그 줄기를 붙들고 있는 손이 찢겨나갈 정도로 지쳐 있다면 말이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목적이 꼭 어떤 지점에, 어떤 시점까지 반드시 도착해만 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럼 뭐냐" 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난들 아냐?" 라고 대답할게요. 하지만 왠지 '목적지를 향한 이동' 보다 '여유 넘치는 여행'에 가까울 것 같다고 느끼는 이 기분을 저만 느끼는건 아닐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