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크 등대에서
블라디보스톡 마야크등대로 가는 길에 내가 봤던 것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한 바다였다. 바다가 얼다니, 이런 모습은 난생 처음 본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일지 몰라도. 그러고보니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극동위치에 있어 부동항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얼어있다. 과거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힘을 쏟은 이유도 부동항 확보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그리 새롭지 않게 느껴졌다.
바다위를 걸어가
이때는 몰랐지만 꽁꽁 언 바다위를 걷는 다는 것은 매우 신기했다. 내가 예수님도 아니고 모세도 아닌데 언젠가는 녹아 물이 될 곳을 이렇게 단단히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완전히 얼어서 눈까지 쌓인 바다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 같아 보였다. 저 멀리 걸어나가면 어느 정도나 얼어있을지 알 수 있을까?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마야크 등대는 러시아 본토 쪽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어서 꽤 의미가 있는 장소다. 뭍의 마지막을 의미하면서 루스키 섬으로 가는 시작을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아이슬란드 여행이 떠올랐다. 그때는 백야기간이었지. 아무리 아이슬란드라도 온 바다가 모두 얼어붙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추우면 바다가 얼어? 여행 전 만났던 친구는 몸서리치며 소름돋아했다. 물이 언 위에 내가 앉아있다. 바다가 얼어붙은 끝자락에는 두꺼운 얼음이 큰 조각으로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잘 찾아보면 아기공룡 둘리가 어딘가에서 엄마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잘 얼어붙은 조각을 타고 바다 위를 둥둥 뜰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만화같은 상상을 해 본다. 한때는 물이었을 커다랗고 뾰족한 얼음 조각은 땅으로 변한 바닷물의 일부이므로 대지의 조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멋진 말로 하자면 '대지의 파편.'
물 위를 뛰어올라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어 발바닥이 눈 위를 밟고, 뽀득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내 체중을 한껏 실고 나면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래, 확실하게 얼었구나. 내가 살 얼음을 잘 못 디뎌 여행 전 체결한 여행자 보험 항목에 사망 보험금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 다음에는 좀 더 거침없이 쿵쿵쿵, 힘주어 걸어본다. 막 발걸음을 떼고, 걷기를 마친 아기가 여기저기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처럼 우리도 그랬다. 그렇다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차례다. 아니, 우리는 언 '물'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참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했어. 설레고 두근거리고 쿵쿵뛰는 심장을 주체못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거든. 그걸 사진으로 담으면 더 좋고 말이야. 그게 우리에게는 점프샷이었어. 이곳이 안전하고, 단단하고 무언가 확신을 주는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점프를 했지. 바닥에는 아주 작은 실금도 가지 않았어. 그만큼, 마야크 등대 인근 바다는 우리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었어.
그래서 케이트와 옥사나에게도 같은 것을 권했지. 너희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살며 평화로운 여기를 자주 왔을 테지만, 원한다면 몇 번이고 왔을테지만 이상하게 점프를 하는 것은 어색해 했어. 난 그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단다. 아, 어쩌면 정말 일상적인 장면과 장소라서 그랬을 수 있겠다. 나같아도, 내가 살았던 월미도 앞마다에서 점프샷을 한다는 것은 꽤 어색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만족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우리와 함께 평화로운 장소에 함께 와주고 친절을 베푼 너희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사진 한 장 뿐이었어. 모쪼록 내가 찍은 너희들의 사진을 보면서 언제든 우리를 기억해주길 바라.
등대 끝에서
끝까지 걸어갔을 때 내가 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겠지? 아주 의외겠지만, 나는 녹고 있는 바다를 보았어. 며칠 전 블라디보스톡에는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쳤고, 모든것이 얼어붙었지. 하지만 오늘 날씨를 봐, 이렇게 따뜻하니 그렇게 두껍게 얼었던 바다는 금세 물이 되어 졸졸 흐르고 있는 중이야. 마야크 등대를 향해 걸어오며 단단하게 언 바다만 봤기 때문에 처음 그런 장면을 마주한 나는 금방 익숙해져버렸거든. 여기에 와 녹은 바다를 보니 또 새로운 기분이더라. 실감이 가지 않는거야. 함께 여행하던 뀨와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기까지 했어. 무슨 맛이 났게?........................................................................................... 당연히 아주 짜!
그래도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봐. 잔잔한 바닷물이 길로 밀려 들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장면이야. 겨울왕국 영화에서 엘사가 순간 모든 것을 얼려버린 순간처럼 느껴지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환되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차갑게 굳어버리는 순간이 있어. 언젠가 정말 잘 지내던 친구와 한순간에 멀어져 버린 적이 있다고 했지? 너는 갑자기 왜 그런 상황이 생겼는지 무척 힘들어했어. 이유를 알고 싶어했고. 조금 비약이겠지만 또다시, 봐. 땅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던 바닷물은 그대로 얼어버렸지. 땅에 닿지 못했어.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냥 날씨가 많이 추웠을 뿐이라고. 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는 언젠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물은 다시 땅으로 밀려들어오겠지. 이 물이 그때 그 물인지는 묻지 마.
시간은 짧아
아인슈타인이 그랬어.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금방 흘러가. 좀 더 머물고 싶지만 물리적인 한계점이 있는 거지. 해는 지고 있었고 금세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했어. 콧속은 얼얼하고 발가락도 시렸지. 우리의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어. 그러고보니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방금 내가 있던 시간은 과거가 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자신만의 시간 속으로 뛰어들어 가. 어떤 것을 할지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지. 하지만 그 때에도 시간은 흘러. 그러니까 좀더 대담하게, 좀 더 적극적으로 시간을 향해 뛰어들어보는거야. 어차피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이 마음이 '나의 시간'을 만드는거니까 .
블라디보스톡의 다른 어떤 곳을 더 많이 둘러봤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우리가 함께한 시간동안 오고갔던 눈빛과 감정과 이야기들은 어디서도 똑같이 경험할 수 없었을 거야.
어두운 밤이 되어서까지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줬던 케이트와 옥사나. 너희와 함께 지났던 작은 꽃시장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어. 무섭고 두렵고 긴장했던 러시아 여행의 시작을 정말 예쁘게 열어주었던 시간을 다시 생각할 때, 난 진한 러시아의 꽃냄새를 떠올릴거야. 앞으로 남은 여행이 참 많지만 충분히 멋진 프롤로그를 남겨주어 다시한번 고마워.
with 이상규, 이혜연, 케이트, 옥사나
with M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