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동포의 딸 사랑 아내 사랑
바쁜 연말이지만 매년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가족이나 친척, 아니면 친구들에게 여기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을 사서 국제소포로 선물을 붙이는 일이다. 마음이야 모두에게 부치고 싶지만, 그렇수는 없고 매년 2 군데를 골라 보내는데, 작년에는 지병으로 고생하는 사촌 형에게 약을, 입양한 딸을 둔 초등학교 친구에게는 초콜릿과 영양제를 보내줬다.
올해는 중국에 있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친구에게 영양제와 영어책를, 부산에 있는 중학교 친구에게는 영양제와 마른 견과류를 소포를 이번 달 초에 국제우편으로 부쳤다. 그런데, 한 일주일 후에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책이 소포 안에 없다는 연락이 오자, 혹시 외국책은 관세나 내용 때문에 그럴 수 있으니 우체국에서 다시 찾아보라고 했지만, 역시 책은 못 찾았다는 것이다.
속으로, 아직도 국제 우편을 검열을 해서, 내용이 중국 정부와 부합하지 않으면 금수 조치를 하는 것 같아 어떻게 찾을까 고민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양과 크기가 같은 상자를 동시에 붙이다 보니, 우체국 직원이나 나의 실수 인지 모르겠지만, 발송자 레벨이 바뀌는 바람에 중국으로 갈 것이 한국으로, 한국으로 갈 것이 중국으로 잘못 부쳐진 것이었다.
하지만, 유독 중국으로 물건을 보낼 때면 나의 선입관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불안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는 과거에도 이런 유사한 경험이 있다.
길림성 연길시에 있는 연변 가무단에서 당시 단장으로 있던 교포 2세의 "이용(李龍)"이라는 음악가가 있었다. 그는 특히 러시아 현대음악에 박식했고, 클라리넷이 그의 전공 악기이며, 그의 아내 역시 같은 가무단에서 바이올린을 하는 교포 2세라고 했다. 당시 그는 동경의 무사시노(武蔵野) 음대 대학원에서 그 대학 부담으로 단기 유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그는 소박한 옷차림과 중국교포 특유의 우리 말씨로 나에게 처음부터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다.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묻고 했던 사이였는데 하루는 내가 사는 기숙사로 초대를 했는데, 마침 한국 주재원 자녀의 음악 지도를 하고 오는 길이라 클라리넷을 들고 오게 되었고, 나는 때를 놓칠세라, 부끄러워하는 그에게 한 곡 연주를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 그가 연주한 곡은 “선구자”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40센티 안팎의 짧고 가느다란 관현악기 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방 안에 울려 퍼져 나의 귀를 울려왔고, 눈감고 듣고 있던 나에게는 왜 많은 곡 중에서 그 곡을 연주할까라는 의문이 한순간 생겼다. 그러나, 연주가 끝나고 나서 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밖에서 식사를 같이 했을 때, 그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 봉투 안에는 연변에서 구하기 힘든 악보집이 들어 있었고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면서 악보집 첫 표지와 다음 장 사이에 풀을 붙여 숨길 공간을 만들고 그 사이에 만 엔짜리 다섯 장, 한화로 50만 원 상당의 지폐를 넣었다고 했다.
돈을 몰래 부쳐 아내의 생활비와 외동딸의 교육비를 해결한다고 말하면서 정성껏 풀로 봉한 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있던 그에게 왜 돈을 은행으로 송금하지 않고 보내느냐고 묻자, 돈 부쳤다는 기록이 남아 당국에서 알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일한다고 오해할 것을 염려해서, 그리고 편지로 돈을 동봉한 적이 있었는데 분실된 적이 몇 번 있어 이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 그는 한국 사람들은 재미교포나 재일교포는 한국에 가면 그래도 교포 취급을 해 주는데, 공산권 특히 중국교포들은 교포 대접을 잘 안 해주고 있다며 독립군의 후손들인 자신들을 한국 정부가 귀찮아한다며 불만을 토로했었다.
“해방이 되어도 돈 벌려고 안 들어온 재일교포나 자기만 잘 살아보려고 미국으로 이민 가 버린 재미교포에 비하면, 우리 중국 교포가 그들보다 못하진 않을 텐데…., 우리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다른 나라 교포 후세들에 비해, 우리는 더 그들보다 훌륭히 2세, 3세 들의 민족 교육에 힘쓰고 있는데…..”
그의 낙담 섞인 말속에 다소 감정에 치우친 이야기도 있었지만, 왠지 내 마음이 무거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중국 정부의 차별보다 과거 우리 정부의 그들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서러웠을 것이고, 중국인의 그들에 대한 반 이민족 감정보다는 부모의 조국을 찾아온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멸시가 더 가슴 아팠을 듯하다.
헤어질 때 “연길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접속합시다 (만납시다)” 며 연락하라고 말한 그의 집에 가면 그때는 무슨 곡을 연주해 줄까? 그때는 그의 아내의 바이올린 선율에 맞취 협연으로 마음 가벼운 가곡을 들으며 재회의 기쁨을 맞이하고 싶다.
며칠 전 상해에 있는 연변 출신의 지인을 통해 그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려 찾는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찾아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지금은 족히 영하 10도로 내려갔을 광활한 만주 벌판 한가운데 위치한 연길시. 그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용정(龍井)의 해란(海蘭) 강. 그 강은 이 혹한에 꽁꽁 얼어 있겠지만 그 강 위를 달렸을 선대의 선구자들의 말발꿉 소리처럼 그의 따스한 소식을 곧 전해 듣기만을 바라고, 그래서 내년 연말에는 연길로 그에게 꼭 선물 소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