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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Aug 20. 2018

한 여름날의 제주여정(3)

한 여름날의 제주여정(3)    


약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약속하나 있다. 성주촛불을 밝혔던 당시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 시절에 한반도의 미군기지가 있는 지역을 찾아서 다니자고 했다.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면서 싸웠던 지역주민들과 연대를 모색하자고 했었다. 서울 미군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사드철회, 주한미군 철수하라”를 외치자고 했었다. 

첫 출발이 2017년 제주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였다. 다녀온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성주촛불은 내부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이 간 사기그릇은 순식간에 쩍 갈라지듯이 우리도 쩍 갈라져 깨졌다. 우리가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아니다. 저들은 파란나비원정대를 만들어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사드반대 선전전을 하러 다닌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반도의 미군기지가 있는 구석구석을 다 찾을 수는 없을거다. 그러나 아주 대표적인 곳과 알려진 곳이라도 직접 방문해서 눈으로 확인하고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지금 현실에서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투쟁하고 있는 현장이라면 더욱 의미있는 연대를 만들 수 있었을거다. 제주는 내게 그런 의미있는 곳이다. 

제주 강정의 해군기지와 앞으로 진행될 성산의 제2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소성리할매들의 연대는 아름답다. 

강정에서 성산까지 평화야 고치글라! 제주생명평화대행진의 막을 내렸다. 소성리할매들의 노래공연은 끝났다. 우리는 원불교 강은도교무님이 마련해 준 펜션숙소로 이동했다.         


교무님 교무님 제주여신 교무님

깜깜한 밤에 도착한 펜션은 고급스러웠다. 방과 거실과 부엌시설이 갖춰진 펜션 두 채에 잠잘 사람을 나누고 짐을 풀었다. 영재씨와 진석씨 남자는 둘이고, 여성들은 열네명이라 성별로 숙소를 구분할 수 없었다. 두 남성은 방 하나를 차지 했지만, 인신은 자유롭지 못했다. 문을 열고 나오면 거실에 진을 치고 있는 다수의 여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여야했다. 

늦은 밤, 장거리 여행에 피곤한 할매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앞을 다투어 샤워를 했다. 대중목욕탕도 아닌 작은 욕실에 기다리는 게 지루한 탓인지 두 명씩 들어가 샤워를 한다고 법석이었다.  

제주에 도착할 때부터 소성리할매들을 극진히 모신 강은도교무님은 팬션에 도착하자 차트렁크에 있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와 보따리를 꺼냈다. 수박과 복숭아, 오이와 시원한 얼음생수가 가득 담긴 보따리였다. 주무시기 전에 꼭 과일을 드시라고 신신당부하면서 팬션에 넣어주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강은도교무님이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로 달려왔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서 소성리할매들을 모시고 간 곳은 섭지코지에 있는 ‘해녀의 집’이었다. 원불교 교도님들이 전복죽을 대접해주었다. 

소성리는 원불교성지다. 원불교의 2대 교주 정사종사님이 태어나서 자란 마을로 달마산 구도길을 걸어 김천역에서 전라도로 건너가서 대종사를 만났다고 전한다. 사드가 소성리로 확정되기 이전부터 원불교는 성주촛불과 김천촛불과 함께 사드반대투쟁을 열렬히 해왔다. 

강은도교무님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진밭교에 철야기도를 시작했던 강해윤교무님의 동생이고 원불교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는 강법진교무님의 고모가 되는 분이다. 

1차 사드침탈이 벌어졌던 2017년 4월26일에도, 2차 사드침탈이 벌어졌던 2017년9월 6일과 7일에도 강은도교무님은 소성리에서 우리와 함께 날밤을 새워서 싸웠던 분이다. 

원불교의 교무로서 당연히 성지를 지켜야 할 책무가 있었지만 소성리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뜨거운 분이었다. 우리가 제주로 온다고 결정되었을 때, 경비문제며, 이동문제며, 잠자리와 식사 등 챙겨야 할 것이 많았던 임순분부녀회장님이 원불교에 도움을 청했다. 원불교 사무여한단에서 소성리할매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드리자고 이야기를 했다고 강은도교무님은 전한다. 강은도교무님은 신심을 다해서 소성리할매들을 지극정성을 다한다. 

일단 교당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우리에게 숙소로 제공해주었다. 다행히 짐 싸들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번거로움은 사라졌다. 아침식사를 우리 손으로 교당에서 해먹을 수 있는데도 밥과 반찬과 국을 새벽부터 준비해서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우리식구들을 거둬 먹였다. 

일정이 끝나는 저녁식사로는 고급횟집에서 한상차림으로 회를 대접해주기도 하였다. 

모든 비용은 원불교의 사무여한단에서 마련해주었다고 말씀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강은도교무님의 마음씀씀이의 예사롭지 않은 깊은 뜻도 알 수 있었다. 

수 년동안 사드로 멍든 가슴을 이 곳 제주에서 살포시 보듬고 쓰다듬어주고 싶었던 마음을 말이다. 연대하러 온 길이지만, 이왕에 먼 길 왔으니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말이다.  지친 몸을 좋은 음식으로 보양해주고 싶은 마음을 말이다. 

강은도교무님의 정성스런 보살핌에 떠나올 때 인사를 나누던 우리 할매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교무님이 소성리에 오시는 날은 우리가 어떻게 보답을 할 수 있을지 걱정도 한편 되었다.     


강정에서 뜨거운 만남

제주여정의 안내를 맡은 영재씨는 일상의 편안한 여행코스를 고민했다고 한다. 최근에 제주에 불고 있는 바람이 ‘다크투어’로 방향을 바꿨다.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릴 때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 학살터를 둘러보았다. 할매들이 겪었던 625전쟁의 참상을 제주에서 마주한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했던 강정주민들을 만났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고 결정나고 마을주민들은 뜻을 모아 모두 반대하고 나섰을 거다. 십년이 지나는 동안 마을은 하나였다가 둘로 나눠졌고, 다시 하나가 되려는 모든 노력은 국제관함식을 앞두고 촛불로 교체되어 기대를 한 몸으로 받고 있는 문정부에 의해 다시 씻지 못할 상처로 남게 되었다.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의 건설을 반대하는 싸움이 커지면서 강정을 들렀던 사람들은 아름다운 구럼비를 지키고 싶어했다. 구럼비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무모하리만큼 짐을 싸들고 강정으로 내려와서 구럼비를 지켜내려고 애썼다. 강정마을의 주민들보다 더 강정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녀 들은 강정의 새로운 주민이 되었다. 

최근 국제관함식을 강정마을주민들은 총회를 개최해 반대의사를 결정했지만, 문정권은 무엇이 그리도 불안해서 일주일 사이 청와대비서실에서 네 차례나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만나 다시 총회를 개최해 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매달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면에 어떤 계약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 결국 마을총회는 다시 개최되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그리고 강정을 사랑하여 이주한 주민들을 불순한 세력으로 취급하여 갈등만 키웠다. 정부가 만들어낸 작품이 강정마을을 이롭게 하지 않았다. 

강정에는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기 위해서 모여든 연대자들이 밥을 먹는 삼거리식당이 있다. ‘중덕이 아방’인 종환삼촌이 지난 십년동안 이곳 식당에서 밥을 해왔다고 한다. 

삼거리식당에서 만난 강정사람들은 소성리에서 온 할매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서로의 상황은 피차 모르지 않았다. 최근의 아픈 소식까지도 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마주보는 것만으로 애틋한 우리들이니까. 

강정사람들은 소성리할매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싶어했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을 법한 식당을 우리 때문에 문을 열게 했고,  장사를 하게 했다. 마을에서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이 운영하는 한식뷔페식당이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뷔페라도 반찬을 날라서 식사를 하기 좋게 상차림을 만들어주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 강회장님은 고기라도 구워야 한다면서 바쁜 와중에 삼겹살을 준비시켰다.  뜨거운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상마다 화로에 불이 켜졌다. 두꺼운 삼겹살이 접시위에 담겨져서 상마다 올라왔다. 상차림에 밥과 국이 더해져서 식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제주 똥돼지 삼겹살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모두 고기가 잘 구워지길 바랐을거다. 화로의 불은 불판을 달구기 시작했다. 달궈진 불판위로 고기 한 점씩 올려지기 시작하자 고기가 굽히면서 떨어지는 기름이 불꽃에 닿아 피어오른 연기가 숨막힐 정도로 뿌옇게 시야를 흐렸다. 

무엇보다 뜨거운 한 여름날에 에어컨을 아무리 가동하더라도 상마다 뜨겁게 올라오는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나보다.  

두꺼운 제주 똥돼지 삼겹살은 익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할매들의 등줄기에는 쉬지 않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할매들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상 앞에는 고기 굽는 사람만 남았다. 

강정마을을 대표한 강회장님과 소성리를 대표한 부녀회장님은 서로 마주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물줄기가 흘러내려오지만 차마 체면상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끝내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와 부녀회장님은 강회장님께 

“아이고,, 회장님 우리가 강정에 자주 안 왔다고 이렇게 뜨거운 맛을 보여줍니까?” 

하고 농담을 던지면서 웃었고, 강회장님은 얼굴이 빨개져서 

“잘 할라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고기는 꾸역꾸역 불판위에서 잘 익어갔다. 고기의 맛은 아주 기가 막히다. 제주 똥돼지 삼겹살 맛을 제대로 봤다. 

아마도 소성리 할매들은 강정에서 잊을 수 없는 뜨거운 맛을 기억하게 될 거다. 

식사를 마치고 둘러본 마을의 카페와 해군기지가 있는 부두가에서 고권일씨의 안내로 강정투쟁에 대해 알아갔다. 우리가 잘 싸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 뒤에 또 다시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을 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힘이 세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윷놀이. 

일과를 마치고 교당 숙소로 돌아와서 우리가 즐기는 놀이가 있었다. 할매들은 자신들의 오락거리로 윷을 준비해왔다. 넓은 거실에 펑퍼짐하게 이불을 펴서 윷판을 만들었다. 백돌과 흑돌 4알씩 말로 쓰고, 말잡이는 임순분부녀회장님과 차옥자엄니였다. 

차옥자엄니는 평소에는 된장공장에 일 다니느라 잘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잘 부르고 흥이 많은 분이어서 민들레합창단을 함께 하였다. 어디든 공연을 하게 되면 된장공장을 하루 쉬는 것쯤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번 제주에 오게 된 것도 지금껏 많이 못 나온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는 둥그렇게 앉았다. 최소 열넷에서 최대 열여덞명이 둘러앉아서 흑-백-흑-백으로 편을 나눴다. 윷을 던질 때마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도~게~걸~윷~모~뒷도까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윷이 떨어진다. 뒷도 한번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태환언니는 뒷도를 해서 x맨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윷놀이의 승부는 결정되는 그 순간까지 예측할 수 없는 묘한 재미가 아슬아슬하다. 싸울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가도 한방에 웃고 넘어가는 센스를 갖춘 넉살좋은 엄니들과 늦은 밤까지 놀았다.  

금연엄니는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잘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윷놀이할 때만큼은 정말 편안하고 즐거워보였다. 할매들에게 이만큼 재미나는 일이 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윷놀이에서 이기면 500원 내고, 지면 1000원을 내서 모은 돈으로 맛난 거 사먹자고 했다. 진편이 4000원을 내고 이긴 편이 2500원을 거뒀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태환언니가 곰곰이 따져보니 계산이 잘못 된 거다. 옆에 누운 규란엄니께 태환언니가 그러더란다. “아주매,, 계산이 이상하다 아닌교? 분명 3500원인데 와 2500원이라고 하지” 하니까 규란엄니가 “계산 끝났다. 잊어버리고 자자” 하였다. 그래도 계산이 맞지 않아서 두 사람은 계산을 해보고 난 결론은 이긴 팀이 3500원을 내야 하고 진 팀은 4000원을 내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이미 돈은 다 거뒀고, 계산은 누가 어떻게 잘못해서 그리되었는지 범인을 찾으면서 또 한바탕 배꼽 빠지게 웃었다. 

이틀간 윷놀이로 모은 돈으로 식사 한 끼는 해결할 수 있을 듯 했다. 즐겁게 놀면서 돈까지 모았으니 일타이피는 되는 셈이다.     


제주연대 소회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교무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보낸 제주여행이었다. 연로한 소성리할매들에게 버거운 여행일 수도 있었다. 

비행기를 타러가기 전에 조금 허락된 시간을 이용해 우리는 둘러앉아서 제주여행의 소회를 나눴다. 소성리엄니들은 소성리사드철회성주주민대책위와 민들레합창단에서 지원하는 돈으로 여행을 다니면 천벌을 받을 거라고 했다. 소성리할매들은 연대를 온거지 여행을 온 게 아니라고 했다. 자금도 소성리 진밭을 지키면서 고생하고 있을 소성리평화지킴이들과 성주주민대책위 사람들 보기 미안스러워서 안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불교의 강은도교무님은 사무여한단을 대신했다고 말씀하지만, 강은도교무님의 정성스런 대접에 감동이 컸다.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거 같았다. 

우리가 소성리로 돌아가서 또 힘을 내어 열심히 사드반대 투쟁을 해야 할 책임도 커졌다. 

된장공장 다니느라 낮에는 잘 나와보지 못하는 광순엄니와 옥자엄니도 민들레합창단 노래연습은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올거고, 정조자엄니는 연대하러 다닐 때 필요하면 된장공장 하루 휴가내고 같이 다니겠다고 약속한다. 

민들레합창단은 아니지만, 민들레합창단이 노래연습하는 수요일날이면 마당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수덕엄니도 사드반대 투쟁을 더 열심히 하겠다며 다짐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수덕엄니는 원래 민들레합창단도 아니었지만, 빨간티셔츠 무대공연복장이 없어서 무대에 오를 계획이 아니었다. 때마침 내 가방에 있는 빨간티셔츠를 빌려드려서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사드야 가라’ 노래를 마치자 바라보이는 관중들이 뜨겁게 앵콜을 외쳤다. 행사주최측과는 앵콜곡 없이 부녀회장님 연설과 노래 한곡으로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바라본 뜨거운 반응에 수덕엄니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앵콜곡 한번 더하자고 했다는거다.  그런 바람에 노래 한 곡 하고 내려와야 하는데 민들레합창단은 그대로 무대 위에 서 있게 되고, 사회자가 앵콜곡을 듣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듣지 못해서 구호를 외치면서 내려왔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마도 그때 수덕엄니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나보다. 이번 제주일정으로 민들레합창단을 좀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세운 거 같아 다행이었다. 

소성리민들레합창단이 움직일때마다 보좌하는 스텝들이 있다. 

운전과 안내가이드를 맡은 영재씨는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반대 투쟁을 할 때 이곳에서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서 누구보다 제주를 잘 알거라 믿었다. 분명 제주에 대해서는 우리보단 더 많은 정보와 내용을 가지고 있었던 건 맞지만, 운전은 초보였다. 초보라기 보단 풍부한 운전경력을 보유하지는 않았다. 2017년 1월 소성리에서 운전면허증을 땄다는 사실을 지금껏 몰랐다. 아마도 소성리엄니들 모신 봉고차 운전에 무진장 애를 썼을거다. 긴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테다. 가벼운 접촉사고까지 에피소드로 남겨둔다. 

사드가 들어온다고 난리가 났던 2016년 여름에 계획한 제주여행이 수포로 돌아가고 소성리할매들과 제주를 찾은 조은학씨와 박수규씨 부부가 자신들의 여행일정을 소성리할매들의 일정에 맞춰주었다. 부족했던 자리도 메워주었다. 

예정에 없었던 정가수의 출현도 재미있었다. 할매들 틈바구니 속에 홀로 외로웠을 영재씨와 한 방을 쓰면서 함께 해주었다. 

고희림시인과 김정복선생님 그리고 나, 할매들 가방모찌로서 충실히 잘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좋은 기억을 함께 공유한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대구공항에는 우리를 맞아주는 소성리식구들이 있다.  김천목사님과 강현욱교무님, 김상패감독님, 짱돌님 모두 소중한 또하나의 가족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소성리로 돌아왔다. 

우리를 기다리는 소성리주민들과 평화지킴이, 연대자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드뽑고 할매들과 오래살고 싶다.  


「열매의 글쓰기 2018년 8월20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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