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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Aug 15. 2018

다 내려놓고 가소서.
고 김주중 영가를 위한 기도

다 내려놓고 가소서. 고 김주중 영가를 위한 기도    

‘ 그런데 8월6일에 나오니까 분노가 끓어올라요. 울화가 치민다고 하나요. 8월7일 새벽에 구로 사업소에 가서 정문을 닫아버렸어요. 차 못 들어오게요. 들어오는 차마다 다 제지하고 “실례합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죠. 경비들이 난리 났어요. “형구씨 왜 그래?” 하기에 “지금 외부 세력 체크 중이다. 쌍용공장 안에 외부 세력이 들어온다는 첩보를 들었어. 나도 외부 세력 체크 중이다. 내가 외부 세력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틀어막으며 거기서 한바탕 싸우고, 노무과에서 내려와 실랑이 벌이는데, 우리 부서 직장이 내려와서 “형구씨, 그러지 말고 회사에 들어가 커피 한잔 하자”고 해요. “너무 한 것 아니냐?”면서, 저 마시라고 사온 캔 맥주를 직장 가슴에 던져 버렸어요. 빡 하고 터져 버렸어요. 거품이 막 일고요. 그 다음에 회사 의무실에 가서 발목에 감았던 붕대를 풀었더니 그때까지 피가 계속 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집으로 갔어요. 그냥 ’외부 세력‘이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우리보고 외부 세력이라고 하던 게 계속 생각났어요. 파업 나오니까 허탈했어요.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파업 나오니까 허탈했어요.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는 울분이 끓어올랐어요. “너 그리고 너 그리고 너희들이 다 합류해서 파업했으면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를 외부 세력으로 몰지 않았으면, 우리를 내부 세력으로 생각했으면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외부 세력이면 도대체 누가 내부 세력이냐?”

<그의 기쁨과 슬픔 중 >    

김천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 좁은 의자에 몸을 의지해 조용히 휴식을 취해 꺼내든 책 <정해윤작가의 그의 기쁨과 슬픔>이다. 책은 2013년 H-20000 모터쇼에 나온 달랑 한 대의 차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면서 집필하기 시작했다. 쌍용차 정리해고로 스물두번째 희생 사망자가 발생하고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린다. 대한문 분향소를 지켰던 쌍용차 정리해고된 서른 명의 선도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그들은 2009년 공장옥쇄파업 참가자들이기도 하다. 

형구씨의 이야기에 이르자 묘한 슬픔에 끝내 눈가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소성리엄니들과 서울 대한문에 분향소가 차려진 <고 김주중 님>의 49제를 올리기 위해서 향했다.  

쌍용차에서 정리해고 되어 복직의 약속을 받기까지 한 역사의 획을 긋지 못한 싸움의 주인공들이 하나 둘 죽어간다. 국가폭력과 흡혈귀자본에 의해 피 빨려 죽어가는 노동자들이다. 사회적 살인이라고 불리는 정리해고제도에 희생된 이들이다. 서른 번째 사망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더욱 모질게 고독해질까봐 두렵다. 

원래는 제주에서 짬을 내서 영화를 집단관람하기로 했다가 여의치 못해 보지 못한 영화를 소성리에서 보자고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갈 사람을 모아서 “신과 함께 인과 연”을 보러 갈 계획이었다. 하필 화요일 약속을 다 잡아놓고 예약을 할려고 인원을 체크 하던 중이었는데 부녀회장님이 잠시 보류해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화요일이 쌍용차 고 김주중님의 49제 날이라서 원불교에서 종제를 지낸다고 한다. 부녀회장님이 쌍용차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한번 가 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이 쓰여서 할매들과 의논을 해보기로 했다. 다른 날도 있겠지만 때마침 49제를 치룰 때 가는 길에 노자돈이라도 보태고 육신을 남겨두고 떠나는 영혼을 위해서 정성어린 기도라도 해 드리고 싶었나보다. 

할매들은 서울, 결코 가깝지 않은 먼 길이지만 가보자고 했다. 팔순을 넘긴 분들이라 먼 거리 여행은 부담이 커서 돌봄이 필요하다. 

부녀회장님. 금연엄니, 옥남엄니, 경임엄니, 상돌엄니, 수덕엄니, 여섯분이 가기로 했다. 내가 옆에서 가방모찌를 할 예정이었는데 방학 중이라서 시간을 내어준 조은학샘과 박수규대변인 그리고 박철주상황실장까지 모두 열명이 움직였다. 

할매들의 건강이 허락한다면 이왕에 비싼 차비 들여서 가는 길에 이 곳 저 곳 들러보면 좋으련만, 그렇게 무리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재미동포로 미국의 위스콘신 대학의 NAN KIM 교수가 마중 나왔다. 방학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여러 사회운동을 취재하는 중인가보다. 제주 강정에서 만났던 인연이 크지만 성주촛불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눴던 분이다. 

조은학 샘의 시누이가 올케언니 생일을 챙겨주러 서울역까지 마중 나왔고, 우리 모두의 저녁을 대접해주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얻어 먹을 복은 많다지만,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된다. 엄니들보다 살 날 많은 내가 걱정이다. 

 대한문 앞에 서자 얼마전 소성리에 들어와서 깽판을 쳤던 그 무리와 비슷한 혐오언어와 욕설을 사용하는 이들이 아주 커다란 음향시스템을 설치하고 얼룩덜룩한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어대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유독이 빵빵한 음향을 이용해서 온갖 왜곡된 역사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쌍용차분향소에 심각한 소음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원불교 종제가 시작되자 수구꼴통님들도 따라서 집회하면서 우리의 행사를 방해하고 있었다. 상덕교무님은 세상의 온갖 잡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로지 고 김주중 영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가시는 길에 우리가 좋은 인연이 되어 당신의 가는 길을 지켜드리겠다는 하나의 생각만 하라고 독려하였다. 

소성리엄니들은 며칠 전에도 그렇지만, 사드가 소성리로 들어오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그들, 보수꼴통님들의 괴롭힘에 시달려왔던 터라 대한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셨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서 기도하는 중에도 “뭉디 같은 망할 놈들이 와 여기 와서도 저 지랄이고 ” 하면서 욕을 해댔다. 

나이 오십도 안 된 아들 같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가?  그의 어머니나 처자는 어떻겠냐는 동정어린 말씀을 소곤소곤 나눈다. 

대한문을 보고 나서 그래도 소성리는 저런 소음은 좀 덜하니까, 그래도 공기는 나으니까. 살짝 위안이 되지만 여기 남은 사람들은 늘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먼 길을 자주 가 보지 못하는 미안함과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면서 고 김주중 영가가 땅의 인연을 잘 정리하고 하늘로 평안히 떠났을거란 위안을 삼으면서 다시 김천구미역 으로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깜깜한 밤에 도착한 소성리 평화마당에는 윤성아저씨와 재영아저씨 그리고 참새방앗간 사장님 내외와 편의점 사장님, 진철아저씨, 강장로님과 영재씨가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소성리 평화마당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너 그리고  너, 그리고 너, 그리고 너희들이 다 함께 하였더라면 우리가 파업에서 이렇게 깨지지 않았을텐데 ...” 원망과 설움과 분노를 다 내려놓으소서. 그리고 편안히 하늘에서 좋은 인연을 맺으소서. 고 김주중 영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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