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일대에 있는 군산미군기지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 비행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육군비행학교로 세워졌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시기에 잠시 미군사 고문단이 머물다가 한국군에게 돌려주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다시 주둔했고, 1974년부터 미 제7공군 제8전투비행단(WOLF PACK)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군산지역에 있는 미군기지의 소재지는 전북 군산시가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주가 되었고, 기지가 확장될 때마다 군산시의 면적은 줄어 들지만, 캘리포니아 주의 면적이 넓어지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처음 일본군 비행조종사 양성학교를 지을 때만 해도 활주로 포함해서 48.8만평이었던 기지 부지는 2014년에 313만 평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아파치 헬기장 부지와 탄약고 안전거리 확보를 명목으로 지금까지 64만 평을 추가로 확장해서 현재 총 389만 평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기지가 확장할 때마다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경작하는 땅은 국책사업이란 이름으로 헐값에 강제수용을 당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바닷물은 막히고 갯벌이 사라지고 고깃배 출항이 점점 어려워져 주민들은 생업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전국 부안군에서 군산시에 이르는 33.9km 규모의 방조제를 축조하고 8,560만평에 이르는 바다를 토지로 덮고 3,569만평에 이르는 호소를 조성한 사업으로 더이상 하제마을 앞바다 하제포구는 백합이나 소라 등이 잡히지 않는 죽은 바다가 됐다.
하제마을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새만금 간척사업의 영향도 크다.
하제마을도 미군기지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탄약고의 안전거리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국방부가 땅을 수용하면서 644세대에 달하는 주민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마을은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 건, 그곳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두 가구가 떠나지 않고 있다. 이웃주민들이 이사하기 바쁘게 굴착기와 공사장비가 들어와서 건물을 마구잡이로 부수고 위협해도 떠나지 않고 살아내는 전진현 씨가 있었다.
내가 살던 하제마을은요.
“하제라는 동네는 안 나오는 게 없이 정말 갖가지 것들이 나왔어요. 정말 큰 어촌이고, 개가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니는 동네가 하제라고 할 정도로, 연말이면 택시회사에서 선물을 싸갖고 달려와요. 술 마시고 택시 타고 들어오니까 택시가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드나드는 동네, 화물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동네”
미군기지의 탄약고와 가장 인접한 거리에 있는 하제마을이지만, 옛날부터 마을 앞바다는 갯벌이 발달해서 백합 양식과 키조개 등의 조개잡이로 풍요로와서 흥청거렸던 하제포구가 있었다. 갈퀴만 들고 나가면 하루벌이를 거뜬히 해냈고, 농업과 어업이 성행해서 부지런하기만 하면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마을이었다.
“그거 다 일본에 수출했는데 하루종일 나가서, 겨울 이면 바람이 이렇게 불어 바다가 뒤집어지면서도 키조개가 잡혀요. 그게 하루 저녁에 나가서 800만원씩 벌었어요. 그뿐 아니라 물고기도 안 나오는 거 없었고, 조개 같은 게 산으로 쌓여있어서 동네 주민들이 다 나와서 조개를 까고 먹고 살았어요.”
진현 씨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는 면세유가 없던 시절에 기름이 가득 담긴 쇠드럼통을 뒹글뒹글 굴려서 배마다 기름을 다 넣어줬고, 200여척이 넘는 마을의 배들은 진현 씨네 가게를 거치지 않고 출항을 할 수 없었다. 뱃사람 중에 진현 씨네 가게에서 담배를 사다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군산시에서 담배가 가장 많이 팔리는 가게로 손꼽힐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배에 쓰이는 그물이며 연장 중에 취급하지 않는 물품이 없는 만물상회였다.
”우리 가족은 남들처럼 외식도 한번 못 해봤어요. 식구들이 다 같이 둘러앉아서 밥도 한번 제대로 못 먹어볼 정도로,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요. 아빠가 한 번도 가게문을 닫은 적이 없어요.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장사를 해서, 난 어릴 때 아빠가 욕심이 많아서 돈 벌 욕심에 가게문을 안 닫는다고 생각했어요.“
진현 씨가 중2가 되는 해에 어머니는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루면서도 아버지는 가게를 비우지 않았고, 어린 진현의 마음에 원망도 깃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진현 씨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 아빠가 하는 말이 새벽4시에 문을 열면 나는 간하고 쓸개를 처마 밑에 두고 가게문을 연다고 얘기를 해, 옛날에는 사고가 많아서 배에서 손가락이 잘리고, 추락하는 일도 있고, 배가 고장 나서 긴급하게 수리하는 일도 벌어지는데, 아빠가 그러는거야. 그 사람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데 가게를 닫는 동안 혹시나 볼트 하나, 너트 하나를 갈아끼우지 못해서 배가 못 나가게 되면 그 사람들이 벌어먹을 수가 없고, 가족도 챙길 수가 없다는 거지, 내가 어리석고 철이 없었던 거지.“
아버지의 가게는 어느덧 진현 씨가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지만, 새만금공사로 하제마을의 포구에 정박했던 배들도 점차 사라져갔고, 진현 씨네 가게를 찾던 뱃사람들의 발길도 점점 줄어들어갈 때, 국방부는 탄약고 인근 마을 토지수용을 하고 강제 이주를 진행시켰다.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바닷가 마을에서 생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현실이 마냥 고집을 피울 수 없게 했다. 국방부는 간교한 술책으로 사람들을 마을에서 내보냈다.
싸움의 원인은 국방부의 거짓말 때문
“저는 정당한 보상을 받기를 원하죠. 그건 결론이에요. 누가 저를 나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근데 저한테 나쁘다고 하면 안 되는 거에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쟤네들(국방부와LH공사)가 잘못한 거잖아요. 그동안 내가 힘들게 소송한 것도 10년 이상이 되었는데 그들이 거짓말을 안 했으면 문제가 안 됐겠죠. 이게 다 처음부터 국방부의 거짓말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요.”
국방부가 진현 씨에게 ’토지인도소송‘을 제기했다. 이제 진현씨가 평생을 살아온 땅과 집을 두고 떠나라고 한 것이다. 하제마을의 모든 땅은 국방부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곧 미군기지로 공여될 계획인데, 이 이야기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방부) 고시공고는 2005년에 났지만, 국방부가 고시공고 내기 전부터 땅을 사들이고 고시가 났어요. 그러니까, 날짜가 안 맞아요. 법정에선 그게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내 기억에는 실제로 그랬어요.
동네 측량할 때 이장이랑 국방부랑 공사직원이랑 손수 측량을 하고 나서 바로 금액이 딱 산정돼 가지고 이걸 안 받으면 이게 (강제수용)넘어간다고 해서 땅값을 받았던 거에요. 그러고 몇 년 있다가 갑자기 이제 건물이 들어갔어요. 그 기간이 꽤 길었어요. 그래서 내가 고시 날짜도 안 맞는다고 하는 거고, 나는 이해가 안 되는거야. 땅을 다 주고 나서 몇 년이나 지나서 고시가 나고 그 다음에 건물이 들어간거야.”
그리고 또 하나 진현 씨가 의문을 품었던 건 국방부가 감정평가를 제대로 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어느 날 감정평가서가 나왔고, 감정평가한 금액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나는 솔직히 내 문제가 해결되면 나가야죠. 내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혼자 평생 살 수도 없고, 그렇지만 내가 나가더라도 정당하게 내가 받을 거 빨리 받고 나가야지. 장사도 허가받고 신고하고 그렇게 장사를 했는데, (국방부는) 저희한테 사업자 등록증 하나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무슨 장사를 했는지도 몰라. 근데 감정평가를 해서 금액이 나왔어. 아주 소액으로 정해서 그걸 공탁을 그냥 걸어버렸어요”
그를 소개받고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하제마을의 마지막 주민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보상협상이 제대로 잘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엄격히 말하면 국방부가 편법과 속임수로 땅과 집을 강제수용하는 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었다.
국방부가 제시한 보상은 기준이 없어 진현 씨가 납득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살 수 없는 금전적인 보상을 진현 씨는 거부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진현 씨 집에 세들어 살던 세입자가 무슨 영문인지 집주인도 모르게 보상을 받고 떠난 일도 있었다.
“원래 아빠명의로 된 집이었어요. 아빠가 돌아가실지도 모르니까 오빠 명의로 바꾸자고 해서 오빠 명의로 바꿨어요. 근데 우리집에 세 들어 산 아줌마가 여기 살지도 않으면서 문을 잠가놓고 집을 비워주지 않는 거에요. 계약기간도 끝났는데, 오지도 않고, 우리가 명도소송을 했어요. 집달리가 와서 짐을 뺐어. 그때도 몰랐어요. 근데 세입자가 보상을 다 받고 나갔다는거야. 원래 세입자가 보상을 받을려면 집주인의 도장이 필요하거든요. 동네 이장도 찍어준 적이 없대요. 근데 보상을 받고 나갔대. 내가 LH에 전화해봤어. 우리가 도장 안 찍어줬는데 그렇게 해도 되냐니까 서류상 문제가 없대요.”
문제가 없다던 서류는 3년전에 진현 씨가 국방부와 LH공사 직원이 함께 앉은 자리에서 확인했었다. 동네이장은 다른 동네 이장의 도장이 찍혔고, 집주인의 이름은 진현 씨의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명도 도장도 찍히지 않았다.
“그때 아빠가 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중환자셨어요. 6월에 집 명의가 오빠이름으로 명도소송 결정이 났는데, 그 여자가 12월에 보상받고 나갔어요. 서류에 아빠 이름이 적혀있길래 내가 국방부 관계자한테 이거 잘못된 거다. 시기적으로 맞지도 않고 아빠가 서명을 할 수도 없다고 했거든요.”
그제서야 국방부 관계자는 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LH공사가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눈치챘고, 이내 국방부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방부는 하제마을의 주민들이 거의 다 이주할 시점까지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진현 씨에게 끝내 ’토지인도소송‘ 소를 제기했고, 현재 2심 재판 중이다.
법정에 서서 버텨내는 것도 싸움이다.
”그런데 결론은 이렇게 되고 나서(이주한 주민들이) 정말 99% 후회를 해요. 지금 다 이사갔잖아요. 정작 이사를 가도 네모 반듯한 괜찮은 집으로 이사를 간 사람이 거의 없어요. 군산대학교 앞에 주공아파트가 있거든요. 영구임대 아파트로 동네주민들의 반 이상이 하제마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래요. 그 아파트가 하제아파트라고 불릴 정도에요.“
국방부는 자주 주민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 보상기준도 사람마다 달랐다. 그래봐야 공시지가에서 100원을 더 주고 덜 주고의 차이였지만, 국방부가 돈이 없어서 보상해줄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고, 보상 없는 국가시책의 강제수용은 주민들을 늘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 집 두 집 이사를 나갈 때마다 골목의 텅빈 폐가가 생겨나고, 폐가들 사이에 혼자 남게 되는 것도 곤욕스러웠다.
”그때 당시 군산시 아파트가 평당 800만원 할 때에요. 지금은 1100만원까지 가격이 올랐거든요. 근데 국방부가 우리집 건물에 공탁금을 3000만원을 걸었어요. 제가 왜 감정평가를 안했다고 말하냐면 우리집에 들어와서 본 적이 없어요. 근데 평가를 했다는 공문서가 나왔어요. ’00감정평가서‘와 ’11감정평가서‘ 우리나라에서 아주 큰 회사에요. 감정평가를 하면 기본이 사진이잖아요. 사진을 남겨야 하니까 다 요청을 했는데 안 주는 거에요. 그래놓고는 국방부에서 감정평가를 안해도 됩니다라고 보내는데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왜 그러냐면, 논이 있으면 이 논을 감정평가했어. 그럼 옆에 논은 안해도 된다는 그런 식인거죠. 그건 우리하고 안 맞는 내용이죠.“
진현 씨는 국방부와 LH공사가 공문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하며 법정에서 10년을 넘게 싸우고 있다. 사실 아버지의 인생에 전부였을 가게와 진현 씨가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을 보상이란 말로 쉽게 맞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보상이란 말은 누군가에게 전부인 것을 너무나 손쉽게 뺏을 수 있도록 편리하게 쓰이는 방법이다. 지금의 진현 씨를 있게 한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살아온 역사가 이곳 하제포구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햇볕과 풀 한포기, 흙 한줌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텐데 이 땅을 두고 어디로 떠날 수 있을까.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의 가까운 곳에 탄약고를 두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가 지금껏 우방이라 믿어왔던 미국이 한국과 동맹이란 이름으로 미군기지를 짓고, 군사무기를 팔아왔다. 기지를 확장할 때면 기지 인근의 주민들의 재산을 떳떳하게 뺏고 쫓아냈다. 마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에게 자행했던 학살이 21세기의 대한민국 군산에서 미군을 대신해서 국방부가 주민들의 땅을 뺏고 쫓아내는 모습은 세기를 달리할 뿐 본질은 닮았다.
그러나 진현 씨가 보상을 잘 받기를 원한다는 바람은 돈을 밝히고 지독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쫓겨나지 않기 위한 진현 씨 나름의 싸움의 전략을 찾은 것이라는 생각을 뒤늦게 깨달았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법정에 서서 그는 버텨내고 싶었나 보다.
”다 나가도 나는 억울해서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화병이 날 거 같아요“
모두가 떠나 폐허가 된 하제마을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진현 씨는 잘 안다. 그래서 마냥 이렇게 살 수만 없다는 것도, 언제가 되었던 떠나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충분히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길고 긴 싸움을 선언하듯이,
”지금 와서 감정평가를 다시 한다는 건 말도 안되잖아요. 그때 당시에는 장사가 잘 될 때였는데, 지금은 장사가 안되잖아요. 저는 손해배상 청구할 거에요. 너희(국방부)가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 재판을 끌어온 시간도 10년이나 되고, 그동안 저는 가게문을 열고 있어도 이걸로 못 먹고 살아서 매출이 있건 없건 사업자는 그대로 두고,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배 들어오면 수산물 받아오고, 꽃장사도 해보고, 노점상도 해보고, 나 보험회사도 다녔어요. 어린이집 교사도 해보고 너무 여러 가지 해봤네. “
밖에서 일하다가 돌아와서 가게문을 열면 혼자 남은 이웃을 위로하기 위해서 옛 주민들이 찾아왔다. 텅빈 마을, 텅빈 가게에서 텔레비전을 같이 보고,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고, 수다를 떨다가 이웃들은 떠난다. 진현 씨는 혼자 남아 집을 지켰다.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을 보냈다.
모두가 다 떠나고 집이 허물어지고 나서 동네가 훤해졌을 때, 하제마을에서 600년을 살아낸 팽나무의 존재가 드러났다. 2000여명이 넘는 마을주민들이 빼곡이 집을 짓고 살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던 둥치가 크고 잎새가 우람하게 퍼진 장엄한 나무가 신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오래된 나무가 우리 동네에 있었어. 남들처럼 똑같이 그랬어요. 그렇게 느꼈죠. 600년이나 된 나무가 미군기지로 들어가게 되면 잘리는 거 아니야. 어떻게 되는거야. 난 그게 걱정이었어요.“
하제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모습을 드러낸 팽나무
하제마을에는 200년을 살아낸 소나무도 있다. 배를 타고 떠난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고, 집안의 온갖 우환을 풀어놓고 정화수 앞에서 빌고 또 빌어 손바닥이 닳도록 빌면서 기도했던 당산나무였다. 마을주민들은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받은 보상금을 십시일반 모금해서 반듯한 육각 모정을 지었다. 높다랗게 지은 모정은 미군기지 철조망 안을 들여다보기 좋은 높이여서 우리땅찾기 모임에서 미군기지 감시활동을 하는 평화운동가들에게 적절하게 감시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회합의 장소였다. 지금은 국방부에서 하제마을을 토지강제수용을 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모정도 부서지고 없애버렸다.
마을이 다 부서지고 건물폐기물들이 치워지고 집터에 수풀이 우거져 허허벌판이 되자 하제마을이 생기기 훨씬 옛날부터 하제의 터에서 살아낸 600살 된 팽나무는 웅장하고 신령스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제마을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한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과 <평화바람> 회원들이 그동안 미군기지 감시활동 사진과 기지 인근 주민의 삶을 기록한 사진을 ’안녕하제展‘에서 전시했는데, 팽나무가 찍힌 사진이 있었고, 팽나무의 신령함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평화바람 활동가 오이는 ’안녕하제展‘에서 처음으로 팽나무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8년에 뭐 사진전을 한번 했었는데 이재각 사진가가 찍은 팽나무가 있었어요. 그 사진을 보고 하제에 이런 나무가 있었어? 저는 그때 처음 하제에 이런 나무가 있었나 그랬던 거고, 우리는 미군기지 때문에 한때 하제포구로 성황을 이뤘던 마을이 없어지게 생겨서 우리가 살고 있는 군산에 이렇게 슬픈 마을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몇몇 단체들과 몇몇 사람들을 모아서 평화답사를 하러 하제마을로 향했어요.“
군산지역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슬픈 마을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졌다. 군산시민들이 좀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하제마을로 평화기행, 평화답사, 기지촌탐방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하면서 마을을 드나들었다. 집들이 부서지고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들여다보고 관찰했었다.
”마을이 없어지고 나면 마을에 뭐가 남았는지 봤는데 나무들 밖에 없더라구요. 진짜 기분이 되게 이상했는데, 집이 다 부서지고나니까 거기에 버리고 간 고양이나 개들, 그리고 소나무도 두드러지고, 팽나무가 엄청나게 두드러지고, 그때부터 팽나무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고, 양광희선생님 같은 경우는 그 나무를 보자마자 이거는 보통 나무가 아니다면서 마을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나무에 대해 물어보고 구술을 받고,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나무의 가치를 알아낸거죠.“
600년이란 숭고한 세월을 견뎌온 팽나무가 국방부에 의해 미군기지로 땅이 공여되어버릴지 모를 절대절명의 위기는 어쩌면 군산을 더이상 미군기지로 넘겨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가닥 빛이 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은 하제마을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뛰었다. 문화재적 가치가 탁월한 팽나무를 지키는 일이 하제마을의 끝자락을 쥐고 놓지 않는 의미로 다가왔다. 한 줌의 땅도 미군기지로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행동했다.
”실제로 (부서진 마을에) 펜스를 치려고 할 때, 펜스치지 말고, 미군기지에 땅을 공여하지말라고 기자회견도 하고, (군산)시장도 만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요. 요구 중에 하나가 팽나무를 보존하자는 거였어요. 중요한 나무가 있는데 이거를 보존해야 될거 아니냐“
군산지역 시민들에게 미군기지 때문에 하제마을의 집들은 부서졌지만, 600년을 살아온 팽나무를 지키자는 서명을 받았다. 팽나무를 지킨다는 건 땅을 지킨다는 상징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통했나보다. 짧은 기간동안 굉장히 많은 군산시민들이 관심을 보였고, 팽나무를 지키는 서명에 동참하면서 여론을 뜨럽게 달궜다. 군산시의원들이 직접 나서서 팽나무를 보호하고 미군기지로 땅을 공여하지 말자는 건의문을 국방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군산시도 여기(하제마을)가 미군기지로 편입되는 걸 바라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왜냐면 국방부에서 펜스를 칠려고 할 때, 사람들이 여기 쓰레기를 너무 많이 버린다는 핑계로 펜스를 쳐서 자기들이 관리를 해야겠다고 했었거든요. 근데 군산시에서 우리가 쓰레기 치울게. 그냥 이렇게 드나들게 하고, 펜스 치지 말고, 일정 정도만 치고 다 치지 말라는 요구를 국방부에 했대요.“
하제마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국방부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적정 보상가를 받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는 마지막 주민이 있는 한 하제마을은 사라질 수가 없다. 하제마을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팽나무가 위치한 터에 밭을 일구고 작물을 가꾸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서 예술인들이 하제마을로 찾아와서 팽나무의 정기를 받으면서 ’문화제‘를 하자고 제안했고,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의 회원들과 군산의 시민들도 뜻을 모아서 2020년 10월부터 ’팽팽문화제‘를 시작했다. 팽팽문화제는 좀더 멀리서 하제마을의 슬픈 소식을 접했던 이들을 불러모았다. 제주에서 서울에서 평택에서 성주에서 가까운 전북의 여러 도시에서 꾸준히 하제마을로 찾아올 수 있게 자리를 넓게 펼쳤다.
”우리땅찾기시민모임이 근 20년이 넘게 미군기지 정문에서 집회를 했어요. 거기서 본 사람들이 팽나무 문화제에서 보고, 성주에서 오고, 평택에서 오고, 강정에서 오고 그랬잖아요. 이렇게 유지되는 거 보면 지금까지 활동을 꾸준히 해왔던 시간들이 꾸준히 함께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어떻게 쌓여있나 이런 게 좀 확인이 되는 거 같은 거에요. 그래서 팽나무 문화제가 유지가 되는구나. 그 시간들의 의미가 안 느껴질 때도 있고, 느껴질 때도 있을텐데 그걸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잘 버티고 유지해왔나, 이거를 보여주는 순간, 팽팽문화제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팽나무를 지키자는 평화활동가와 시민들의 마음이 모이고 쌓여서 600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겪고 이겨내 온 팽나무는 2021년 6월 25일 <전라북도 기념물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로 전라북도가 지정한 문화재가 되었다. 그리고 하제마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제마을엔 아직 사람이 살고 있고, 팽나무가 살고 있고, 팽나무를 지키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기 위해서 함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