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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Jul 14. 2018

오상아(吾喪我)

#여유와 설빈 #생각은 자유

폰이 초기화되었다. 스마트폰을 쓴 지 8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강박적으로 기록하던 하루의 짧은 일과와 가계부의 최근 몇 년간 데이터가 날아가버렸다. 아마도 지난 8년간 가장 화가 나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더 큰 문제는 이 일이 인도에 6개월 간 파견 근무를 위해 출국하기 3시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비행 내내 불안, 초조, 심박수 불안정에 머리가 띵한 것이 마약 금단현상이 따로 없었다. 델리 호텔방에 도착하여 불꽃 검색 끝에 폰을 되살릴 수 없음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때, 나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씻지도 않고 불도 끄지 않은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몇 달 전 어디에서 누구와 저녁을 먹었다는 기록이라든가, 몇 년 전 몇 월에 카드값을 얼마나 썼다든가 하는 사소한 기록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저장된 연락처 중 1년에 한 번이라도 연락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지. 요즘은 유진이 찍어서 보내주는 사진을 저장만 할 뿐 직접 사진은 잘 찍지도 않잖아. 하루에 단 한 문장이라도 써보자며 애쓰던 예전 그 나날들이 무색하게 최근 몇 년 간은 어떤 것도 제대로 쓰지 않았는데. 세상은, 그대로 있었다.  


폰을 처음부터 다시 세팅하다 보니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평소 써보고 싶었던 새로운 가계부 앱을 구매하고 나니 심지어 기분이 좋아졌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극적인 감정 변화라니. 분명 유진이 옆에 있었다면 어쩜 그리 단순하냐며 핀잔을 줬을 테지만, 정말이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책에서 봤던, 장자 제물론 편에 나온다는 문구 ‘오상아(吾喪我)’를 떠올리며, 나는 나를 서둘러 장사 지냈다. 싯다르타가 니르바나에 이른 성스러운 땅에 온 마당에 이보다 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귀결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래, 이제 난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비밀을 간직한 채로, 나는 괜찮은 남자고 친구고 연인이고 아들이고 청춘이고 열정이라는 굴레들을 잠시 벗어던지고 좀 더 진짜인 시간들을 노래* 하리라.


요동치던 감정이 가라앉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되돌아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여전히 나의 화두는 ‘나’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물론 도를 터득해 무아의 경지에 이를 수야 없겠지만, 폰을 새로 세팅하며 나를 장사 지내고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조금 과하지 않나. 참 못 말리는 자기애다. 나에게 자기애란 늘 자기혐오와 동의어 같은 것이었다. 모자라고 단단하지 못한 나를 자주 나는 미워했고, 그런 내가 살아내는 어설픈 삶이라고 만족의 대상일 순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여유도 없었을뿐더러 의식적으로도 이런 식의 소모적인 자아탐구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며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찌 되었든 덕분에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인도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 일찍 법인 사무실에 출근하여 현지 직원들과 기싸움을 하고, 본사와 연구소와 몇 통의 전화를 하고, 주재원들을 따라 반주와 함께 저녁을 먹은 후 밤늦게 호텔로 돌아와 쓰러져 잠이 드는 하루하루.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을 이끌고 있는 상징적인 인도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의 공세에 밀려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내부 위기감 또한 점점 커져가고 있는 이 와중에, 정작 나를 진정으로 머뭇거리게 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여유와 설빈 - 생각은 자유

존 레논의 노래처럼 꿈을 꾸고 밥 딜런의 노래처럼 시를 쓰며 한대수의 노래처럼 살고 싶다는, 그래서 제주도에 내려가 살아가고 있다는 이 두 사람의 노래를, 주말 텅 빈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듣고 있노라면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머뭇거리며 생각은 자유라고, 다짐하듯 되뇌는 것이다.



* 권나무 - 여행 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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