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담 May 13. 2016

파타고니아 여행기

#여행 #남미

파타고니아. 남미 대륙의 최남단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아르헨티나의 서쪽과 칠레의 동쪽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흔히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와 남극으로 가는 관문 기지인 칠레의 푼타아레나스 등이 파타고니아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우리나라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인 이곳에, 직장인의 휴가로는 길지만 멀리 떠나기에는 충분치 않은 총 10박 11일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미국 댈러스를 경유, 댈러스에서 다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파타고니아의 첫 목적지인 엘칼라파테까지 장장 30여 시간의 비행을 견딘 끝에 도착한 그곳에는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거대한 빙하가 제 몸을 깎아내리며 울고 있었고, 만년설이 뒤덮인 안데스 산맥이 구름 속에서 자태를 뽐내었으며, 척박한 황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생경한 풍경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지만, 렌즈에 맺힌 상은 웬일인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맺는 것 같지 않았다.


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의 Tres Torres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의 깎아지른 산봉우리와 그 앞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작은 호수가 만들어내는 절경을 마주하고서 조물주의 신비로운 미적 감각에 탄복하지는 못할망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성철스님의 말씀을 떠올린 것은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 풍경을 보려고 가파른 산길을 굽이굽이 걸어 올라온 것이 장장 4시간이었고, 또 그만큼을 꼬박 걸어 내려가야만 했다. 이 첩첩산중에 맨 처음 길을 낸 사람은 누구인가. 대체 무엇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고생스런 길을 내어놓은 것인가.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왔으니 너무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한 것이었을까.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압도적인 풍경에 깊은 감동을 얻는 대신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가까운 곳에 가면 차이점을 찾게 되고 먼 곳에 가면 공통점을 찾게 된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일본에 가서는 우리나라와 흡사한 풍경 속에서도 수많은 다름을 발견하며 놀랐던 반면, 지구 반대편 파타고니아의 전혀 다른 풍경 속에서는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네들의 삶이 먼저 보였다.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심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 위에서 춥고 건조한 날씨와 싸워가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는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을 했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한 데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삶은 무엇인지 모를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여정이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울고 웃고 만나고 헤어졌다.


먼 거리를 떠나온 여행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 평범한 진리는 신기하게도 그들과 나의 삶 사이에 있는 희미한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삶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고통이라고, 고통의 시간들을 견디게 하는 것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라고, 행복은 무언가를 증명해낸 자만의 것이 아니라 증명해내고자 하는 자의 것이기도 하다고, 파타고니아의 풍경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조금의 위안을 얻었다.


칠레의 땅끝 마을, 푼타 아레나스

사실 떠나간 거리와 여행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은 비례하지 않는다. 김훈의 기행문을 단 한 편만 읽어 보면, 오이도에 가도 세계 어느 곳에 간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떠나기 전에는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고된 여정 속에서 이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하며 계획했던 것을 모두 수행하는 것에 여행의 목적은 있지 않다. 여행의 묘미는 정확히 그 반대에 있다. 얼마만큼 자신을 내려놓느냐에 따라 여행 중에 얻을 수 있는 감정의 폭은 달라진다. 여행은 늘 뜻밖의 선물을 주기 마련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몇 번이고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니던가.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더 멀고 험했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산티아고로, 산티아고에서 댈러스로, 댈러스에서 도쿄 나리타로, 나리타에서 인천으로 무려 4대의 비행기를 갈아타고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춥고 건조한 날씨 탓에 걸린 감기로 착륙하는 비행기는 정말이지 곤욕이어서 도착하자마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절이 바뀌어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니 파타고니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사무치게 궁금해진다.


*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1 Page 여행기 공모전을 위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가 미처 쓰지 못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