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원더보이
삶은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 세상이란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경이로운 일이다. 갓난아이의 몸짓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의 신비가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만 같다. 아이는 엄마의 자궁 밖 빛 속으로 태어나 경이로움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더 이상 세상이 경이롭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경이로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아이는 평범해진다. 평범하다는 것은 판단하기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속에서 종종 '의미가 없다'는 것과 통용된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것은 평범함이 곧 무의미를 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삶의 무의미 앞에 부딪힌다. 그리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만 하는 번뇌의 굴레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아이를 낳는다. 아이가 자신의 삶의 무의미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갓 태어난 아이는 실제로 부모에게 아주 명백한 삶의 이유가 된다. 사람들은 이 작고 예쁜 생명체의 양육을 위하여 남루한 일상에 기꺼이 뛰어든다. 부모가 되기 전 자신이 갖고 있던 꿈은 내려놓거나 잊어버린다. 가끔은 아이가 자아내는 경이로움에 홀려 삶의 무의미에 대해 잠시 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는 태어난다. 태어난 다음에는 다시 그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 부모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나아간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아이는 삶의 무의미 앞에 부딪히고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과연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어지는 질문, 나는 왜 태어났는가. 보통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을 때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낳은 거지?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모의 세계를 탈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부모의 세계를 부정하려고 한다. 여러 성장담에서 그것은 부모의 '죽음'으로 상징된다. 실제로 아이는 마음속 부모를 '죽임'으로써 어른이 된다. 그것은 필연적인 일인데, 자식이 부모의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부모가 자식의 삶의 의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이 생긴다.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믿는 자와 그 해답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의 간극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될 준비를 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겠지만 실은 아이가 맞닥뜨리게 될 삶의 무의미이다. 아이는 언젠가 나에게 자신을 왜 낳았냐고 물을 것이고, 그때 내가 아이에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얘야,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단다. 혹은, 에헴, 아빠와 엄마가 너무너무 사랑해서 어느 밤에 네가 생겨버리지 않았겠니? 아니면, 내 삶이 무의미한 나머지 너를 낳으면 좀 달라질까 기대했지 뭐냐, 이렇게 대답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어떤 대답을 한다 하더라도 아이의 질문에 해답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설령 내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그 목적이 아이의 삶의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김연수의 소설 <원더보이>에서 평범해져 버린 정훈에게 재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답이야 세상에 널려 있잖아. 네 아빠의 비망록에도 이미 다 나와 있고. 1968년에 네 아빠와 엄마는 처음 만났고, 그래서 네가 태어났어. 그게 정답이지. 우리가 모르는 건 그 정답에 대한 질문이야. 네가 태어난 게 정답이라면 원래 질문은 뭐였을 거 같니?” (p.242)
삶의 무의미 앞에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식은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오면서 알 수 있다. 우리 부모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부모에게 나를 대체 왜 낳은 거냐고 묻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정답이야 뻔한 것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과연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이다.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부모 쪽이다. 아이를 낳고는 그 아이가 자신의 삶의 이유라고 믿는 부모.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가면서 부모를 부정하는 데 반해, 부모는 아이에게 주었던 삶의 의미가 험난한 양육의 과정 속에서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를 위해 눌러 삼켜야만 했던 눈물이 마음속에 고여 아이에 대한 애착이 굳건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하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내가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해준다'는 생각은 언제나 균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해준다'는 생각 이면에는 '해달라'는 마음이 늘 뒤따르기 때문이다. '해준' 다음에 오는 보상심리는 관계를 지탱하는 장력을 교란시키고 서로의 세계를 간섭한다. 그렇게 될 경우 그 관계는 삶 속에서 짐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기 쉬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엄밀히 말해 내가 낳고 싶어 낳은 것이지, 자식을 '위해서' 낳은 것은 아니다. 자식을 낳았으니 길러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고, 그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에게 내 삶의 의미를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부모도 역시 다른 누구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의미를 고민하면서, 누구에게 미루거나 의지하지 않고 무의미해 보이는 미지의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정훈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무공 아저씨의 말처럼 산은 더욱 산이 되고자 하고 물은 더욱 물이 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인생에서 내가 할 일은? 그건 더욱 내가 되는 일이었다. (p.159~160)
부모가 자식에게 해답을 구해줄 수는 없다. 본인에게도 없는 해답을 자식에게 어떻게 구해주겠는가. 다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도 너처럼 삶의 무의미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해왔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뿐이다. 삶이 정답을 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이냐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귀띔해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수의 <원더보이>는 근사한 소설이다. 작가는 열세 살이 되는 자신의 딸 열무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한 편의 소설로 엮어냈다. 이제 막 부모의 둥지를 벗어나려고 하는 딸을 위하여, 꼭 해주고 싶은 말이지만 아빠의 세계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또 혹시나 어린 딸이 못 알아들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써 내려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군부 독재 시절의 암울했던 시대상(그래도 역사는 발전하고 있단다), 우주의 비밀을 느끼며 호흡하는 법(호흡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질 수 있지), 세상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법(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창의력이 필요하단다), 사랑이 시작되는 신비로운 과정(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작가가 쓰지 않은 것까지 읽을 줄 아는 독서법(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어떻게 읽느냐가 더 중요하단다), 그리고 우리의 밤하늘이 이토록 어두운 까닭(우리 우주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계속 성장해야만 하지).
우리는 모두 처음 겪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자식이든 부모든 마찬가지이다. 미지의 하루는 그 의미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질문하는 만큼 우리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정훈의 엄마는 이야기한다. '벚꽃이 그토록 아름답게 피는 까닭은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여름의 북방쇠찌르레기 새끼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라고. 삶의 무의미 앞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식은 분명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의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내 부모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 장성수 선생님 정년퇴임 기념 문고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을 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