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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3. 2016

사랑은 둘의 관계이다

#사랑 #결혼

나의 신부 유진에게.


봄여름가을겨울을 두 번 보내고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함께 한 계절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 소중했던 시간이 제각각 흩어지지 않고, 한 데 모여 추억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이 행운을 인연이라고도, 운명이라고도, 하느님의 뜻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내가 만나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이 놀랍고도 신비로운 과정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 대한 강렬한 갈구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자. 우리는 사랑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약속하였다. 결혼을 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듯이.


사랑의 완성, 어린 연인들에게 결혼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여태까지 겪은 결혼은 사랑의 결론이라고 하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려고 보니 사랑이 억압받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사랑은 둘의 관계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렇게 말했다. 첫째는 사랑한다고 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둘의 관계여야 한다는 뜻을, 둘째는 사회적 지위나 배경 등 다른 어떤 외부 요소도 배제한 둘 만의 관계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실로 사랑은 둘의 관계일 수밖에 없고 둘의 관계여야만 한다. 사랑이 강력한 힘을 지니는 이유는, 둘의 관계 속에서 내가 가장 나일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내가 나보다 더 큰 존재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은 너무 많은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고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법적' 배우자일 것을, 시댁의 며느리, 처가의 사위일 것을, 자녀의 부모일 것을, 또 사회 구조의 근간일 것을, 구성원 재생산의 첨병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싹 틔운 사랑의 나무가 있다고 해보자.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내는 동안 때로는 따스한 춘풍을 받으며, 때로는 매서운 북풍을 견디며 나무는 자라났다. 나무는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갔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 튼튼한 뿌리와 견고한 기둥과 아름다운 잎새들을 갖게 되었다.


결혼은 마치 이 사랑의 나무에 받침대를 받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받침대를 받치는데, 원래 나무가 자라는 대로 받치지 않고 약간 높거나 다른 방향에 놓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결혼이라는 받침대가 없이도 사랑의 나무는 사시사철 제 가지를 뽐낼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매력 넘치는 나무였다. 그런데 받침대가 놓인 나무는 그 고유의 모습과 생명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결혼은 이렇게 '둘의 관계'를 방해함으로써 사랑을 억압한다. 따라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라기보다, 사랑의 탈을 쓰고 사랑의 나무를 잠식하는 방해꾼에 가깝다. 결혼 생활은 이러한 방해꾼들로부터 우리 사랑의 나무를 지켜나가는 투쟁이 아닐까.


유진아,


그래도 나는 우리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결혼을 결심한 그 순간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은 오로지 우리의 사랑이 맺은 열매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곧 우리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 결혼이 실제로는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라는 것을 서로 인지할 때, 우리는 다시 '사랑은 둘의 관계'라는 철학자의 말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성장환경, 종교, 취향 등 서로 다르지만 '둘의 관계'에서 배제되어 사랑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처럼, 결혼 역시 외부 요인으로 분류하여 관계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싹 틔운 사랑의 나무를 가장 우선에 놓는 것이라 하겠다. 나무가 양분을 흡수하여 가지 뻗어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견고한 받침대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휘어질지언정 더 넓게 그 팔을 펼치지 않겠는가. 그래서 먼 훗날 아름드리 거목 아래 조그만 받침대가 무슨 대수일 것인가.


너를 만나서, 너와 내가 '둘'이 될 수 있음에 한없이 감사드린다. 앞으로 겪어나갈 수많은 봄여름가을겨울 동안 우리 사랑의 나무는 뜨거운 태양에 메마르기도 하고 세찬 눈보라에 꺾여 나가기도 하겠지만, 늘 살아있기를, 늘 푸르기를, 늘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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