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담 Feb 19. 2020

Grow Old with You

#결혼 #생애

유진에게


기념일이 지난 후 한 달 간의 숙고를 통해 편지를 쓰는 우리의 새로운 전통(?)에 맞추어 결혼기념일 편지를 띄웁니다. 결혼 6주년을 축하합니다. 6년이라는 세월은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읽기와 쓰기, 곱하기와 나누기, 우정과 사랑, 모순과 불평등을 모두 터득하는 긴 시간인데, 우리가 함께 보낸 6년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부로서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과 부모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는 것은 읽기와 쓰기 못지않게 중요한 인생의 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무언가를 알아버린 것만 같은, 마치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나이가 들면 예전에 자기가 좋아하던 음악만을 계속 듣게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들으려는 노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기껏해야 아는 밴드의 신보를 듣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마음에 드는 새로운 음악을 만났을 때 느꼈던 희열이 상당했었는데 투자하는 노력이 시나브로 줄어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요. 하긴 시간을 세며 가능성을 헤아렸던 청춘과 요즘을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시절에는 취향의 지도를 그려내는 것이 중대한 과업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무거운 것들이 있으니까요.


우리는 가능성의 세계를 떠나 먼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슴 뛰는 가능성의 세계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완전히 미련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만, 유진과 함께 걸어온 이 길도 꽤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 30대가 되면 다른 삶을 살겠다며 29세가 얼마 남지 않은 겨울에 유진에게 청혼을 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으나, 막상 가능성의 세계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워 ‘매리지 블루’를 겪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우울을 해소해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와 같이 ‘매리지 블루’를 겪고 있는 유진의 우울이었지요. 미래를 약속한 두 사람이 서로의 우울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다른 삶의 가능성에 애도를 표하는 유진의 모습에 이 사람이라면 먼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가능성의 세계로부터 더욱 먼 길을 떠나는 우리의 앞길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유진과 나누는 대화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좋은 대화의 충족 조건은 다음 셋 중 하나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같은 목표에 대한 대화이고, 둘째는 비슷한 취향에 대한 대화이며, 셋째는 평가받지 않는 욕망에 대한 대화입니다. 나에게는 유진만이 셋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함께 걸어온 길이 가끔 고단하고 대개 즐거웠던 것은 유진과 나누었던 일상의 대화 덕택이라고 믿습니다. 책임과 의무의 세계를 헤쳐 나가며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더라도, 지금-여기 샘솟는 감정들과 쓸모없음의 아름다움과 부질없음의 짜릿함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둘이 걷던 길을 셋이 걷게 되었고 곧 넷이서 걷게 될 테니 축복받은 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축복의 대가를 유진 혼자 치르도록 남겨두고 온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이라고 김훈은 썼는데, 지금 유진이 나의 다른 삶을 견디어 주는 것처럼 나도 훗날 유진의 다른 삶을 지지할 것을 여기에 분명히 밝혀둡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이루어가는 생애가 서로에게 똑같이 근사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은 꼭 신경 써서 챙겨 먹고, 무리하게 운동하기보다는 자주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영양제를 챙겨 먹듯 좋아하는 음악도 많이 듣기 바랍니다.


그리움을 담아,

작가의 이전글 결핍의 결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