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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Apr 02. 2019

화요일의 번데기탕

스트레스에 지쳐 놀이동산이 생각난다면

 


 어릴 적 우리 집은 과천과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또래 사촌이 있는 외삼촌네와 함께 서울랜드나 서울대공원을 자주 찾곤 했다. 그때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 보다도 군것질을 하며 뛰어다니는 것이 좋던 나이였다.

 드넓은 광장을 거슬러 올라가 코끼리 열차를 타고 내리면, 비릿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 향이 나를 반겼다. 그럼 여지없이 아빠에게 '500원만'을 외쳤다. 번데기는 생긴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바다향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갯고동을 사는 날이 많았다. 한동안 갯고동만 줄기차게 찾던 나는 갯고동의 뚜껑을 퉤퉤 뱉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먹는 수고에 비해 먹을 것이 많지 않아서 갯고동에 시들해졌다.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고 기온 38.4도라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김일성이 죽은 그 해, 바로 1994년에 만화영화 라이온 킹이 개봉을 했다. 티몬과 품바가 신나는 리듬에 맞춰 '하쿠나 마타타'를 외치며 벌레를 맛깔나게 먹었다. 누군가는 벌레를 먹는 장면 때문에 티몬과 품바를 싫어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아! 번데기도 먹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렇게 나는 번데기를 먹는 아이가 되었다.
 대학생 때 남자 친구와 놀러 간 서울랜드에서 발견한 갯고동과 번데기가 반가웠었다. 하지만 번데기를 보고 경악하는 남자 친구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번데기를 좋아해'라고 말하지 못했던 날도 있었다. 새내기 직장인이 되고 술맛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때 번데기탕은 가벼운 주머니에도 부담 없는 술안주가 되어주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유동 번데기 통조림이 눈에 들어왔다. 스무 살에 번데기를 부인하던 내가 떠올라 번데기에게 미안했다.
느닷없이 남편에게 '난 번데기를 좋아해! 오빠 번데기 먹을 줄 알아?'라고 물었다. 갑자기 취향 고백을 하는 나에게 남편은 '응 나도 번데기 좋아해, 소주 안주에 최고지!'라고 답했다.
그렇게 카트에 번데기 통조림 하나를 담았다.

번데기탕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열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뚝배기 같은 냄비를 준비한다. 이럴 땐 스타우브 베이비 웍이 딱이다.
통조림 하나를 통째로 붓고 중불을 켠다. 편마늘을 넣고 마늘이 익을 때까지 끓인 후 청양고추도 썰어 넣는다. 간을 보며 물을 추가해 주면 끝.
둘이서 나란히 앉아 한라산 한잔에 번데기를 먹으며 오늘 하루 힘들었던 마음을 풀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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