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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Mar 04. 2021

유령작가가 소개하는 자기(自己)는 나일까, 유령일까

요즘, 청소년 브리핑



  2주 전이었나? 여하튼 일 때문에 전주에 가는 길이었다. 승용차 한 대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이동하는 길에 내가 불현듯 “우우”하고 야유하자 모두 이유를 물었다. 창밖을 보다가 문득 옆 차선을 달리던 모 사립초등학교의 스쿨버스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다 큰 어른으로서 초등학생이 탄 버스에 야유를 보내는 일은 어른답지 못할 것이나, 항변하자면 야유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아홉 살 무렵의 나였다. 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설명하려면 20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홉 살의 나는 영어 말하기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대회 3개월 전부터 한국어로 원고를 쓰고, 영어 단어를 찾고, 단어를 모아 문장을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단어를 찾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다. 모르는 것은 선생님께 여쭤보기도 했지만 단언컨대, 그 원고는 내 것이었다. 완성된 원고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연습한 결과 나는 대회 당일에 실수 없이 연설을 마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려서 거리가 얼마나 지저분해졌으며, 깨끗한 거리 조성을 위해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물론 ‘초등 영어’로. 다른 초등학생 참가자들도 흥미로운 주제를 발표했다. 물론 ‘초등 영어’로, ‘초등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주제’를. 



그런데 대회 끝 무렵, 그들이 등장했다. 모 사립초등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다수의 어른들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자리에 간다 해도 정치 이야기가 난무하는 초등학생들의 영어를 이해할 자신은 없다. 그들이 연설을 시작하자 웬 외국인 선생님이 등장했다. 관객석을 등진 채 맨 앞줄에 서서 연설을 지도했다. 억양은 손으로, 내용은 입으로. 학생이 가끔 단어나 문장을 잊어버리면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 다음 학생도, 그 다음 학생도. 세 명의 학생은 모두 같은 사립초등학교 출신이었다. 세 학생의 연설이 끝났지만 관객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 연설은 외국인 선생님의 것이었을까, 학생들의 것이었을까?



  대회가 끝나고 참가자와 관객들은 썰물처럼 자리를 빠져나갔다. 1등, 2등, 3등은 모두 모 사립초등학교 학생들의 차지였다. 나를 비롯한 몇 명의 어린 참가자들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분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연히 발견한 그때 그 사립초등학교 스쿨버스를 보고 ‘불현듯’ 부당함이 떠올랐고, 분함을 느낀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불현듯’에 주목했다. ‘어떠한 생각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을 뜻하는 부사. 나는 왜 그 분함을 ‘불현듯’ 느꼈나? 돌이켜보면 취업을 준비하던 대학 동기가 자기소개서 대필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레포트를 사고 파는 사이트에서 다른 이의 글을 그대로 베껴 제출하는 학생을 봤을 때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으레 그렇게들 하니까?



  그런데 이 ‘대필’은 비단 취업준비생의 이야기만도,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한 어느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현재 고등학교 학생부, 자소서, 추천서 등의 서류에서는 객관적인 학업 성취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중부대학교의 모 교수는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대입 서류전형을 하다보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뻥

이고, '구라'인지 구별이 어렵다. 대입전형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진실과 뻥, 그리고 구라를 찾아내어 판별하는 것이다.”라는 글을 기재한 바 있다.



나 역시 학생들의 작문을 읽고 있자면 간혹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된다. 몇몇 학생의 경험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심지어 주말에 다른 지역에 있었던 학생들의 경험도 완벽히 맞아 떨어진다. 누구의 경험을 다른 누가 베껴 썼기 때문이다. 으레 그렇게들 하니까 자연스레 그런가보다 한다. 이 자연스러움에 길들여진  '나이 든' 나는 유년 시절의 경험을 ‘불현듯’ 떠올리고서야 비로소 괴리를 느낀 것이다.  타인이 소개한 ‘자기’를 들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당위성과 의미를 가질까? 원어민 선생님이 써 준 정치적인 주제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입상한 초등학생은 나중에 자기를 소개할수 있을까? 대필 자소서를 들고 입사 면접에 참여한 취업준비생은 면접관들에게 어떻게 자기를 드러냈을까?



"대입전형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진실과 뻥 그리고 구라를 찾아내어 판별하는 것"이라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기성세대가 가져야 할 혜안은 자소서의 ‘구라’를 판별할 수 있는 눈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를 찾아 이끌어낼 수 있는 눈이 아닐까? 누군가 나의 가치를 알아봐준다면, 유령 작가에게 내 소개를 맡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각자의 가치를 발판 삼아 흠집 있게 써 내려가면 그만일 것이다. 그것이 자소서든, 연설 원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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