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 없는 존재, ‘늑구’라는 이름의 시작
우리는 흔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들을 일컬어 장삼이사(張三李四)라 부른다. 장씨네 셋째 아들이나 이씨네 넷째 아들처럼, 구체적인 개별성 없이 성씨와 태어난 순서로만 치환되는 존재들.
장삼이사란 말은 중국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의한산습득(擬寒山拾得)》이란 詩에서 張三褲口窄,李四帽簷長이라 말한데서 출발한 것 인데, 풀이하면 ‘장씨네 세째의 바지 가랑이는 좁고, 이씨네 네째의 모자 갓은 길구나’ 라는 의미다. 그저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서민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 ‘이름’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집단 속의 위치를 나타내는 숫자에 불과하다. 최근 대전 오월드를 탈출해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던 늑대, ‘늑구’의 시작 또한 그러했다.
‘늑구’라는 이름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서글픈 보편성이 느껴진다. 아홉 번째로 태어난 늑대라서 ‘늑구’라 불렸다는 사실은, 그가 태어난 사파리라는 폐쇄적 생태계 안에서 그가 얼마나 대체 가능한 소모품적 존재였는지를 반증한다. 그는 고유한 영혼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 관리 번호 9번에 해당되는 ‘일반명사로서의 늑대’였다. 그러나 그가 사파리의 담장을 넘는 순간, ‘늑구’는 더 이상 숫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해방의 상징이자, 평범한 존재가 스스로의 의지로 쟁취한 고유명사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울타리 땅 밑에 굴을 파고 탈출한 것을 보면, 늑구의 탈출은 단순히 우발적인 행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담장을 뛰어넘는 것은 순간이지만, 굴을 파는 행위에는 쇼생크탈출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2. 케냐 마사이 부락의 마사오
십여년전,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족 부락에서 한달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유네스코에 고용되어 파견된 것 이었는데, 주로 동양무술을 마사이족에게 가르쳐 보는 실험적인 프로젝트 였었다. 매일 기린과 가젤, 얼룩말을 보았고, 밤이면 내 방 창가 밑에서 하이에나가 울어대는 곳 이었다.
어느날 들개 한 마리가 나에게 찾아왔다. 만져도 가만있고 착해서 먹이를 주었더니, 다음날에는 식구들을 십여마리 데리고 왔다. 한동네 개 들은 유전자가 비슷하여, 다 똑같이 생겼다. 어느놈이 어느녀석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다. 들개는 식탐이 있어서, 구별하지 못하면 특정 개체가 밥을 독식하고, 약한 개체는 밥을 못 먹게 될 수 있었으므로, 누가 누구인가를 구별해야만 했다.
그래서 개 들의 이마에 두꺼운 매직펜으로 숫자를 썼다. 그리고 ‘마사이의 개’ 라는 말을 줄여서, ‘마사일(1), 마사이(2), 마사삼(3)’ 이런 식으로 부르기로 했다. 아침이면 밥달라고 개들이 왔고, 매일 아침마다 이마에 숫자를 써 주었다. 이건 개 들과 나의 무언의 계약이었고, 개 들은 젊잖게 앉아서 나와 이 의식을 매일 치렀다. 동물학대가 절대로 아니었으니 이해 바란다.
이때도 개 들의 이름은 숫자였다. 나도 역시 그들에게 고유명사의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3. 아시아적 명명법과 숫자에 갇힌 개인들
동양의 역사에서 개인이 고유한 이름을 얻지 못하고 숫자로 불린 사례는 대단히 흔하다. 이는 개인보다 문중과 가족의 질서를 우선시했던 아시아적 공동체주의의 산물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무술계의 전설적인 인물, 영춘권의 시조로 알려진 방칠랑(方七娘)을 들 수 있다. 그녀의 이름 ‘칠랑’은 말 그대로 ‘방씨 집안의 일곱 번째 딸’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남성 중심의 무술계에서 독보적인 체계를 정립하기 전까지, 그녀는 그저 집안의 일곱 번째 구성원일 뿐이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다. 이치로(一郞), 지로(次郞), 사부로(三郞)같은 이름들은 첫째, 둘째, 셋째라는 태생적 순서를 그대로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 근대 소설의 거장 노신이 1921년에 쓴 《아큐정전(阿Q正傳)》역시 마찬가지다. 정확한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성씨의 알파벳 표기와 애칭만을 결합해 부르는 이 인물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 겪는 자기기만적 승리법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린다는 것은, 개인이 가진 고유한 서사보다 그가 속한 계보와 서열이 더 중요하게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늑구’는 바로 이러한 아시아적 ‘번호 매기기’ 관습의 현대적 변용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정신승리’라는 말은, 아큐정전에서 주인공 아큐가 했던 행위에서 나왔다. 정신승리의 기원은 아큐 이다.
4. 매트릭스의 네오와 늑구의 ‘빨간 약’
늑구의 삶은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의 주인공 네오(Neo)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네오는 기계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속에서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른 채,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했다.
사파리 안에서 태어난 늑구에게 사파리는 곧 우주였고 유일한 세계였다. 담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이 왜 이곳에 갇혀 있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사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늑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네오가 모피어스에게 건네받은 빨간 약(진실과 고통)과 파란 약(안주와 망각)사이에서 갈등했듯, 늑구 역시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낯선 공기와 익숙한 사료의 안락함 사이에서 고뇌했을 것이다.
탈출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차원의 점프다. 늑구가 담장을 넘었을 때, 그는 사파리라는 ‘매트릭스’를 붕괴시켰다. 외부 세상의 위협과 추위, 그리고 인간들의 추격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대가로 그는 비로소 ‘나’라는 자각을 얻었다. 시스템 속의 번호였던 늑구가,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을 마주하는 ‘단 하나의 존재’로 각성한 것이다.
5. ‘네임드(Named)’의 탄생과 명예의 무게
늑구의 탈출극은 대전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탈출한 늑대의 안위를 걱정했고, 그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 이입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붙잡혔지만, 그 과정에서 늑구는 단순한 늑대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늑구빵’의 이미지까지 나올 정도로 그는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네임드(Named)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원래 이 용어는 MMORPG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 유래했다. 게임 속에는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일반 몬스터(잡몹)들이 있다. 이들은 이름이 없으며, 오직 레벨과 종족명으로만 표시된다. 하지만 그들 중 유독 강력하거나 독특한 서사를 가진 개체에게는 고유한 이름이 부여되는데, 이를 ‘네임드 몬스터’라 부른다.
평범한 ‘잡몹’에서 ‘네임드’가 되는 과정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그것은 시스템이 부여한 한계를 돌파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늑구는 사파리의 수많은 늑대 중 하나(잡몹)에서, 전 국민이 이름을 아는 존재(네임드)로 진화했다.
명예(名譽)라는 단어의 한자를 풀이하면 ‘이름을 드높임’이다. 이름이 없는 존재에게는 명예가 있을 수 없다. 명예는 오직 자기 자신의 이름을 책임지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숭고한 가치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곧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타인에게 기억될 권리를 얻는다는 뜻이다.
6. 익명의 그늘과 책임 없는 목소리들
현대 사회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가명이나 닉네임 뒤에 숨어 활동한다. 물론 닉네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닉네임 역시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익명성을 방패 삼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당히 살아가는 이들을 비난하고 훼손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자들에게 과연 명예가 있을까? 익명성 뒤에서 타인을 괴롭히는 이들은 사실 ‘장삼이사’보다 못한 존재들이다. 장삼이사는 비록 평범할지언정 자신의 삶을 묵묵히 지탱하는 실체가 있지만, 익명의 공격자들은 존재의 근거조차 불분명한 유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 익명으로 유명해진 사람으로는 뱅크시(Banksy)와 사토시 나카모토 (Satoshi Nakamoto)가 있다. 뱅크시는 철저히 익명으로 활동하며 거리 예술(Graffiti)의 문법을 완전히 바꾼 인물이고, 사토시는 비트코인을 창시하며 현대 금융 시스템에 균열을 낸 사람이다.
위에 나열한 익명으로 활동하는 유명인들은 단체를 설립해서 대표자로 활동하거나, 유료로 돈을 받고 영리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익명을 고수하는 자 들은 분명히 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이름은 곧 신뢰의 척도다. 이름을 내건다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말을 한다”는 선언이다. 늑구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파리를 탈출해 ‘늑구’라는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겁한 익명의 그늘에 숨은 자들은 결코 ‘네임드’가 될 수 없으며,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명예도, 책임질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늑구만도 못한 인간들 인 셈 이다.
7. 우리 안의 늑구
늑구의 이야기는 단순한 동물의 탈출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고유성’에 대한 외침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사회 시스템 속에서 숫자로 관리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몇 학번”, “몇 사번”, “어느 동네 몇 평 아파트 거주자”라는 수식어들이 우리의 이름을 대신하곤 한다.
하지만 늑구는 보여주었다. 비록 아홉 번째 늑대라는 뜻의 보잘것없는 이름일지라도, 스스로 차원을 점프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드러낼 때 그 이름은 비로소 광채를 발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언더독의 분투에 감동하고 환호한다.
우리는 각자의 이름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나의 이름은 단순히 남들과 구분하기 위한 기호인가, 아니면 나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는 고유명사인가? 늑구빵의 달콤함 뒤에 숨겨진 늑구의 고독한 결단과 갈등을 반추해본다. 이름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 수 있고, 비로소 장삼이사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네임드’로서의 생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각자의 매트릭스에서 탈출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름 없는 잡몹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기억할 고유명사로 거듭날 것인가. 그 선택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몫이다.
늑구는 집 나가면 개고생을 깨달았을지도 모르지만, 고생스러움을 감수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중동의 이븐밧투타나 중국의 서하객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생명체에게 다음생 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늑구가 자유로운 여행자로 다시 태어나길 바래본다. 나는 늑구를 나와 같은 여행자의 하나로 대우해 주려고 한다.